소설리스트

3. 육아 시작합니다 (3/11)

3. 육아 시작합니다

[길드]간계밥 : 겸, 어디야? 알 부화했는데 아기 늑대만 찾는다.

[길드]푸름 : 형, 얘 진짜 나르맞아요? 나르는 멋진 갑옷을 입었던 것 같은데..

[길드]간계밥 : ㅃㄹ 길드성..!

[길드]간계밥 : 나르가 너 약하다고 ㄷ

[길드]푸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형 약하다고 데리러 가야 한다고 나가는 거 계란형이 막고 있어요!

기다리던 연락이 온 건 잭의 퀘스트 중 마지막 던전 클리어 요청을 막 받았을 때였다.

나르가 입은 게 갑옷이 아닌가? 서둘러 길드 성으로 향하자 성문까지 나온 이상한 동물과 그 동물을 필사적으로 말리는 권경배가 보였다.

“저기, 아기 늑대 왔네. 봐, 기다리면 온다고 했잖아. 유우겸 닮아서 고집은.”

“그대, 조금 커진 것 가꾼. 나를 깨워줘서 고맙따! 레미들도 잘 보내주어찌.”

“뭐… 뭐야, 나르 맞아?”

눈앞의 나르는 저번에 봤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아담한 인형 같았다. 아마 나르를 만들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외형을 섞어놓은 듯한데…….

30센티가 채 안 되는 키에, 등에는 손바닥 반만 한 검정 날개를 달고 있었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백발의 동그란 머리엔 고양이 귀를, 눈 색마저 노랑과 파랑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꼬리는 또 폭신한 토끼 꼬리였다.

얼굴만 보면 날카롭게 위로 올라간 눈꼬리 탓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워 보였지만, 말하는 걸 보니 딱 어린아이라 웃음부터 터졌다.

[나르 Lv. 250] - 유우

-500년 전 연금술사가 만든 키메라.

역시 저 혼종은 키메라였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반가운 마음에 마구 달려 나르의 앞에 섰다. 권경배의 손을 뿌리친 나르도 내게 날아왔다.

“미친,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하는 줄.”

“언제 깨어났어?”

“아까 깨어나찌. 그대, 왜 기다려주지 아는 거시냐?”

“미안, 깨어나기 전엔 오려고 했는데…. 좀 늦었네. 그런데 이 모습은 다 뭐야?”

“그대와 비슷한 모습을 차자따. 아프로 함께 다닐 거시 아닌가.”

나르가 근엄한 모습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르의 뺨을 살살 어루만져 준 후 길드성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근데 너 방금 깨어났으면서 레벨이 왜 그렇게 높아? 그거 만렙 아니야?”

“그대가 약하지 아는가. 내가 강해야 든드나게 지켜줄 쑤 이찌.”

“너 나한테 졌잖아.”

“…그땐 저주에 걸려썼지 아는가! 200년을 200년 내내 저주에 걸려이썼스니 레벨도 함께 낮아진 거시다. 자, 이게 원래 나으 힘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레벨은 높지만 내가 빨리 레벨 업을 하지 않으면 자신도 원래 스킬을 사용할 수 없으니 빨리 업 하라며 연신 잔소리를 해댔다.

일단 나르의 정보를 비공개로 돌려두고…. 가만, 이렇게 보니 주인과 펫이 뒤바뀐 모습이었다. 권경배도 그렇게 느꼈는지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어, 형! 나르랑 만났네요.”

“응, 푸름이도 계속 나르 부화하는 거 기다려준 거야?”

“네, 꼭 보고 싶어서.”

푸름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손 위에 펫 먹이를 올려 나르에게 손을 뻗었다. 나르는 본 척도 안 하곤 내 목덜미만 쓰다듬었다. 의아한 광경에 푸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렇게 보니까 형이 펫이고, 나르가 주인 같아요. 역시 외형 때문인가?”

[길드]민초맛사탕 : 나르랑 아직 길드성에 있어?

[길드]유우 : 네,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길드]민초맛사탕 : 일단.. 숨을래? 우리 길드랑 합병하자는 길드가 있어서 길드 성으로 가는 중인데.

[길드]화환 : 그냥 있어. 걔들 겸이랑 어떻게든 얼굴 터보려고 오는 거니 한 번 보여주지 뭐.

[길드]간계밥 : 저희 지금 길드 홀인데 그럼 계속 여기 있어요?

[길드]화환 : 응, 마음대로. 그냥 인사나 한번 해 줘. 그래도 꽤 유명인이니까.

[길드]민초맛사탕 : 걱정인데.. 그래도 잘됐다. 나도 나르 보고 싶었는데.

“그대, 왜 그러케 허공을 보고 있는 거지? 어디 아픈 거신가?”

“아, 아니. 멀쩡해.”

이상하다는 듯 눈을 좁힌 나르에게 아까 받았던 음식 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고깃덩이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푸름이 건넨 펫 푸드엔 눈길도 주지 않던 나르가 내 앞으로 나타난 고기를 보자 눈을 반짝였다. 이내 고기를 양손으로 안아 올리더니 내 입 앞에 바짝 가져다 대었다.

왜 나한테 뭘 못 먹여서 안달인 거지….

“너 먹으라고 준 건데.”

“이렇게 많지 아는가! 가, 가치 먹는 게 좋아.”

쑥스러운 듯 귀를 쫑긋거리는 나르를 한 번 보다 앞에 들린 고기를 한 번 깨물어 먹었다. 그걸 확인한 나르가 그제야 고기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고기의 풍미를 느끼며 한 번 더 크게 베어 물 때, 갑자기 길드성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길드성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홀에서 빈둥거리는 중이었기에 막 들어오는 사람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문 쪽을 바라보던 푸름과 간계밥이 다른 길드원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게 보였다.

나르가 먹는 걸 힐끔거리다 뒤의 발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갑작스런 발소리와 함께 또 몸이 번쩍 들렸다.

놀라면 소리도 안 나온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겨우 정신을 차리니 아까 퀘스트 중일 때 나를 들어 올려 데려가려던 사람이었다.

입만 벙긋거리자 화가 난 듯 눈이 붉어진 나르가 날아오르더니 그대로 큰 남자의 손을 퍽퍽 내리쳤다.

길드 성에서는 공격 스킬 사용이 되지 않아 아 주먹으로 때릴 수 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없는 게 분한지 씩씩거리던 나르가 남자의 손을 크게 깨물었다. 놀란 남자의 손에선 힘이 풀렸고, 바로 바닥으로 착지하자 나르는 기다렸다는 듯 내 앞을 막아섰다.

“그대, 갠차는가?”

입안의 고기를 급하게 씹어 삼킨 나르가 내 등을 탈탈 털어주자 저쪽에서 사탕 누나와 권경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친, 우리 겸이… 보디가드 생겼네?”

“장난 아니라니까. 나르 쟤 진짜 겸이 밖에 몰라요.”

여기서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 건지, 귀가 홧홧해져 이를 드러내자 나르에게 얻어맞은 남자의 뒤로 화환이 걸어왔다.

“손버릇이 나쁘네.”

“아니, 아까 본… 제가 갖고 싶다던 늑대가 여기 왜 있어요?”

“진짜네? 저 고기도 지우가 준 건데.”

“우리 길드원이니까.”

나르가 움찔하더니 잘 먹던 잇자국 난 고기를 들곤 지우라는 사람에게 던지듯 돌려주었다.

얘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지? 다시 내 앞을 막고 선 나르의 등을 코로 툭툭 치자 그제야 나를 돌아본 나르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왜 화내?”

“그대, 저런 파렴치한 자가 준 음식을 잘도 나에게 주어꾼.”

“그게 제일 큰 거라. 많이 먹으라고 준 건데? 그럼 다른 거 줄까?”

배낭을 열어 저번에 길드 연회실에서 챙긴 다과를 한가득 꺼냈다.

“이건 받은 게 아니라 내가 훔, 아니 챙겨둔 거야.”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쿠키 몇 개를 손에 든 나르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왔다. 동시에 주변이 조용해진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자 낯선 두 사람의 눈이 커져 있었다.

“마, 말을 하잖아!”

“동물형 펫은 원래 말 못 한다며.”

“업뎃한 건가?”

“아기야, 저기 늑대야? 쭈쭈 이리와 봐. 고기 줄까?”

화환의 눈치를 보면서도 쪼그려 앉아 고기를 살랑살랑 흔드는 다른 길드원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르가 서둘러 바닥에 놓인 초콜릿을 하나 집더니 내 입 앞에 들이밀었다. 조심스레 받아먹자 나르가 이긴 자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건지 내 몸을 들어 날아오르더니 소파 위로 내려놓았다. 레벨도 높더니 힘도 세네.

“그대는 사람을 너무 믿는 것 가타. 지금부터 내가 나쁜 사람드를 아라볼 쑤 있는 법을 알려주지.”

잔소리 2탄의 시작이었다. 상대 길드원인 지우는 얼어붙었으며 그의 옆의 작은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놀란 얼굴을 하곤 나와 화환을 번갈아 봤다.

“설마, 웨어 울프가?”

“유우 님한테 뿐만 아니라 펫한테도 미움을 받아서 어떡해.”

“그치만…. 수인은 반인반수가 아니었습니까?”

“히든이 평범할 리 없죠.”

얼쩡거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안쪽으로 난 복도로 향했다. 아직 잔소리 중인 나르의 앞에 엎드려 귀를 눕히자 잔소리는 점점 잦아들더니 큰 한숨으로 바뀌었다.

“애 키우는 게 이러케 힘들구나….”

“좀 전에 태어난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대 지금 무슨 마를 한 건가? 내 말을 다 알아 들은 거시 학실한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나르는 콧잔등을 토닥였다. 애늙은이 같은 행동에 어이가 없음도 잠시, 떠오르는 던전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나 이번엔 공원에 생긴 던전 가야 하는데 시간 있어?”

“네, 저 갈게요.”

“나도 너 도와주고 길퀘 깨러 가면 되겠다. 나르는?”

“아기 늑대가 가면 나르도 갈 거시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나르와 함께 파티를 맺곤 페르니아의 던전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파티원이 한 명 더 늘어났다.

“장꾸라는 형이 자기도 끼워 달래. 원래 길퀘 같이 하려고 기다리던 중이었거든.”

길드 채팅 창에 빨리 소환해 달라는 말이 올라왔다. 바로 파티 소환을 하자 길드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해졌네.

“우리 겸이 왜 이렇게 오랜만이지?”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장꾸를 보곤 나르가 번쩍 뛰어올라 앞을 막았다. 그래도 같은 길드원이라 진심으로 치지는 않았는데, 정신 못 차린 장꾸 형이 나르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며 손을 뻗었다.

“뭐야, 누구야? 인형이야? 세상에… 이렇게 귀여워도 돼?”

“무슨 짓인가. 한 번만 더 아기 늑대에게 손을 뻐드면 가만두지 아늘 거시다!”

“아기…. 겸이라고 불러. 아기 느, 늑대 말고 겸이.”

“겨미? 그게 그대의 이름이가?”

“응, 겨미가 아니라 겸이.”

“그래 겨미. 머가 틀린 것이지? 겨미는 깐깐하군.”

혹시 이거 나 먹이는 건가? 악의 한 점 없던 눈이 장꾸 형에게 닿자 곧바로 10년 원수를 보는 눈이 되었다.

“푸핫, 미친. 겨미 깐깐하대 큭, 아 배 아파…!”

“아, 어떡해요. 형 보디가드가 너무 풉, 너무 귀엽잖아.”

던전으로 들어가기도 전, 둘은 신나게 웃느라 힘이 다 빠진 모습이었다. 나르는 아직 장꾸 형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알겠는가. 겨미한테 함부로 손대면 안 대.”

장꾸 형이 너한텐 손을 대도 되는 거냐 물어보다 결국 몇 대 얻어맞고 나서야 겨우 던전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이제 막 들어왔을 뿐인데 몇 시간은 사냥한 것 같았다.

“겨미, 여기 더러운 거시 나올 거니 코를 꼭 막고 이써야 해.”

“응? 더러운 거?”

“지저분한 기운이 느껴진다. 지하에 있던 거시 올라와써.”

“어떻게 알았어, 나르야? 여기 하수구에서 사는 몬스터들 나오는 곳인데. 아까 태어났는데도 똑똑하다.”

“나르? 얘가 그 알이야?”

“응, 아까 태어났어요. 귀엽죠? 성격은 보이는 대로 별론데….”

푸름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하수구에 사는 몬스터는 징그러운 모습이라 꼭 예전의 나르처럼 보였다.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라면, 냄새였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자 나르가 의아한 얼굴로 내 옆에 날아왔다.

개과 동물답게 냄새에 예민해졌기 때문인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을 눈만 굴려 올려본 뒤 바닥에 주저앉아 코를 발로 막았다. 그럼에도 풍겨오는 하수구 냄새에 절로 눈이 감겼다. 나르가 푸름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 얼른 겨미를 안아라! 너는 착한 수인이니 허락하는 거시다.”

와중에 하는 말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픽 터졌고, 나르와 친해지고 싶었던 푸름은 서둘러 내 몸을 안아 올려 뒤로 빠졌다. 그사이 나르가 마법을 사용한 건지 강한 바람이 불어와 조금 숨 쉬는 게 편해졌다.

“수인이 냄새에 예민하다지만, 형은 좀 심한 것 같아요.”

“으, 코가 너무 아픈데….”

코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앞을 보자 앞으로 나선 나르가 신기한 스킬을 사용하는 게 보였다.

자그마한 손가락을 움직여 공중에 복잡한 금색의 마법진을 그렸다. 그 속에서 거대한 창이 나오더니 정확하게 몬스터를 뚫어버렸다.

저게 250 펫의 위엄인가? 하지만 나르의 말대로 내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몬스터들의 피가 3분의 2 정도 남은 채 살아 있었다.

구경 중이던 장꾸 형이 활을 쏴 몬스터를 정리하는 걸 확인한 나르가 내게 날아왔다.

“겨미 레벨이 몇이지? 저 몬스터에게 내 공격이 안 먹혔어.”

“나? 이제 54.”

“역시, 겨미 레벨이 너무 낮아 그런 게 맞는군.”

어련하시겠어요…. 250 레벨에선 내 레벨은 까마득하게 낮게 보이겠지.

“오늘, 반드시 75까지 올려야 대.”

“와, 75이면 2차 각성 아닌가?”

“맞을걸. 75, 120, 200, 250이잖아.”

“100까진 금방이지 않나? 사흘 안 걸리던데.”

그건 네가 겜창이라 그런 게 아닐까? 나는 눈으로 욕을 잔뜩 머금고서 권경배만 노려보았다.

클리어는 빨랐다. 아기인 척하는 고인물께서 몬스터의 피를 깎으면, 남은 겜창들이 한 대씩 툭툭 쳐서 눕혔기 때문이다. 아니, 평소보단 늦은 편이었나?

막 던전의 왕인 ‘더럽혀진 악어’를 처리하고 열린 포탈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는데 갑자기 나르가 던전 앞에 멈춰 섰다.

“겨미, 던전의 두 번째 문이 열리어따.”

“응? 두 번째 문?”

“아까보다 더 강한 몬스터나 나올 거시야. 얼른, 드러가야 해.”

“뭐야, 무슨 말이야?”

“착한 수인! 그대 어서 아까 봤던 강한 자를 불러라! 겸이는 야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피료하다!”

눈치 빠른 권경배가 나르와 던전을 한 번씩 보더니 이내 길드 채팅에 등장했다.

[길드]간계밥 : 화환 형, 여기 좀 와주실 수 있어요?

[길드]화환 : 아직.

[길드]민초맛사탕 : 무슨일 있어?

[길드]푸름 : 지금 페르니아 공원 던전인데 막 클리어하고 나왔더니 나르가

[길드]푸름 : 두 번째 문이 열렸다고, 도와줄 사람을 불러야 한 대요.

[길드]장꾸 :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능력도 좋네, 나르는

[길드]간계밥 : 지금 던전 확인해 보니까 최소인원 12명인데, 혹시 시간 되시는 분.

[길드]화환 : 아, 찾지 마 봐. 유우, 유우 노래 부르는 **들한테 우리 애 자랑 좀 하게.

[길드]화환 : 겸아 이따 디시 파장 줄 테니 잠시만 넘겨봐.

화환이 파티를 수락하기 무섭게 파티장을 넘겼다. 사탕 누나와 송금이 형 그리고 수박 누나와 지우, 햇살, 삼촌, 도시락이라는 사람들이 연달아 들어오고 나선 파티장이 다시 넘어왔다.

숨넘어갈 듯 보채는 나르를 어떻게든 한 번 안아보려던 장꾸 형의 얼굴이 잠시 굳어진 건 막 파티원 소환을 했을 때였다.

[길드]장꾸 : 뭐야, 왜 미리내가 여기있어?

[길드]민초맛사탕 : 오빤 아까 얘기 못 들었나? 지금 세계전 때문에 합병하자고 와 있댔잖아.

[길드]장꾸 : 그게 미리내였다고?

[길드]민초맛사탕 : 길마 작년에 바뀌면서 분탕러들 다 물갈이됐어. 모르는 애들도 있는데 화부터 내지 말고 이따 따로 얘기하자.

“장꾸 님, 오랜만이에요.”

머리 위에 햇살이라는 아이디를 단 사람이 장꾸를 보곤 머쓱하게 웃었다. 나르는 어느새 내 앞으로 날아와 섰고, 지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수인, 그대 나쁜 수인이어꾼. 저 파렴치한까지 부르다니!”

“나르랬나, 내가 불렀어. 계속 귀찮게 하길래. 겸이가 얼마나 멋진 늑대인지 보여주려고.”

“저거슨 변태다. 겨미를 주물럭거린단 마리다!”

“나르가 강하니까 겨미를 지켜주면 되지.”

아기 어르고 달래는 데 천재인가? 나르의 곁으로 다가가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는 화환도, 얌전히 머리를 맡기고 생각에 잠긴 나르도 다 이상했다.

“뭘 지켜, 아까 태어난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하지만, 겨미는 아까 태어난 나보다 야카지 아는가.”

나르를 한 번 노려본 뒤 바로 던전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입장하기를 바로 눌렀다. 말로 맞아 마음의 뼈가 부러졌기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혼자만의 시간으로 치료하고 싶었고, 연신 쫑알거리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다.

던전 안은 좀 전보다 훨씬 어두워졌다. 세이브 존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의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수박 누나가 동그랗게 빛이 나는 구슬을 여러 개 띄워 주변을 밝히자 곧 던전의 내부가 보였는데, 동굴처럼 사방을 두른 벽이 모두 검붉은 색이었다.

꼭 몬스터의 뱃속이라도 되는 듯 징그럽게 보이는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소화되지 않고 썩은 냄새가 나는 음식물 냄새에 토기가 치밀어 욱욱 헛구역질을 하자 나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기는 나태 왕의 던전이다. 겨미 갠차는 거신가?”

치미는 구역감에 눈물까지 찔끔 날 정도로 움찔거렸기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나르가 서둘러 내 머리 위를 날아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건 마력을 많이 쓰는 거시라 오래 유지할 수 없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천장에 구멍이 뚫리며 푸른 하늘이 보였다. 상쾌한 공기에 겨우 숨통이 트였다.

“나르, 포션 마실 수 있어?”

“그러타. 하지만 이걸 유지하기 위해선 내가 겨미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해서 싸울 수 없다.”

“푸름이 겸이랑 나르 안아서 이동하고 일단 최대한 빨리 클리어 하자.”

기다렸던 말이었는지 푸름이 빠르게 들어와 나를 들어올렸다. 그제야 숨을 몰아쉬더니 배낭 안에 있던 포션을 나르에게 건넸다.

“와, 씨 미친. 뭐가 얼마나 상하면 이딴 냄새가 나는 거예요? 다른 분들은 괜찮으세요?”

“수인은 둘뿐이잖아. 참을 만해, 아직까진.”

“다행이군. 아느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한 냄새나 날 거시야. 다들 준비해.”

고개를 들어 겨우 주변을 보자 다들 부러운 눈길로 나르의 마법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너네는 나르 없지? 하는 자랑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그럴 분위기가 아닌지라 얌전히 걸었다.

나르가 내 얼굴을 살피며 옆에서 포션을 들이마셨다.

“겨미, 갠차는가?”

“응, 나르 덕분에.”

“여기는 일곱 죄악 중 나태의 던저니다.”

“나태?”

고개를 끄덕인 나르가 짧은 손을 들어 벽을 가리켰다.

“저기가 입구니 가장 강한 공격을 해야 대! 한 번에 때려 큰 대미지를 줘야 열리는 무니다!”

“그냥 벽 같은데?”

삼촌이라는 대검을 든 수염 난 사람이 툴툴거리며 말을 하자 나르가 푸름의 머리 위에 올라앉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모두 각각의 다른 몬스터로 연결된 통로가이따. 하지만 그대들이 너무 야캐. 그래서 그나마 야칸 곳을 차자 알려주는 게 아닌가.”

“펫 주제에, 누가 약하다고.”

우리만 편하게 간다는 게 불만인 삼촌은 나르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곤 고개를 픽 돌렸다. 그러자 이상하게 조용하던 장꾸 형이 한발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펫 주제라니. 그런 펫도 없는 주제에. 펫이 찾은 던전을 좋다고 따라온 거면서.”

“장꾸님, 착한 척하는 건 그대로시네요.”

싸해진 분위기에 나르의 눈이 붉어졌다. 화가 나면 붉어지는 것 같은데 아마 같은 길드원이고, 아까 같이 던전을 돌아 내적 친밀감이 쌓여 자기도 모르게 편을 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형, 그게 무슨 말이야. 죄송합니다. 냄새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래요. 장꾸 님, 죄송합니다.”

햇살이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했다. 그걸 빤히 보면서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기만 하는 삼촌을 나르가 벌레 보듯 바라보다 내 등 위에 올라왔다.

“겨미, 알겠나? 저렇게 저지르기만 하는 사라미 나쁜 쓰레기다. 아프로 저런 사람과 친구가 된다면 겨미도 쓰레기다.”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푸름에게도 들린 건지 푸름이 어깨를 바들거리며 떨다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싸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을 터뜨린 푸름이 서둘러 입을 가리곤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나르 정말 똑똑하다.”

다시 나르에게로 고개를 돌린 푸름이 한 말이었다.

“나는 뮤첼의 기억을 가지고 500년을 넘게 사라쓰니 이 정도는 당여나다.”

공작마냥 가슴을 부풀리며 뿌듯해하는 나르에게 푸름이 포션 뚜껑을 열어 손에 쥐여 주었다.

“말싸움 끝났으면 준비하죠. 빨리 나가고 싶은 거 아닌가, 다들.”

화환의 말에 사람들이 무기를 꺼내 들곤 화환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도 저 미친놈이 가장 강한 건가? 의문에 화환을 빤히 보자 시선을 느낀 건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미친놈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놀림을 받고 있을 수만은 없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이를 내보이자 뭐가 그렇게 기쁜지 눈꼬리가 다 접히도록 환하게 웃었다.

“셋 하면 궁극기든 각성기든 가장 강한 공격을 쓰겠습니다. 버퍼들은 전부 버프주고.”

셋 하는 소리에 수많은 빛이 나르가 가리키고 있는 벽을 치자 커다란 소음이 터졌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녹아내리는 벽면이 보였다.

와, 진짜 여기 길이 있구나….

연기가 사그라지자 드러난 좁은 길에 몇몇 사람들이 나르를 신기한 눈으로 올려 보았다.

“빨리, 달려라! 안으로 들어가야 댄다. 저것은 자가 회복 스킬을 쓰는 곳이다.”

나르의 말에 내부를 살피던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들어오던 수박 누나의 모자가 끼어 문과 합체되긴 했으나, 다행히 팔다리가 분리된 사람은 없었다.

“씨발! 저게 얼마짜린데!!!!!!!!”

수박 누나는 팔이라도 잃은 듯 발을 구르며 소리쳤고, 사탕 누나가 어깨를 도닥이며 안아주자 거기 기대어 엉엉 우는 시늉까지 했다.

“수박아, 내가 하나 만들어 줄게. 제발…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부끄럽게 그러지… 마….”

송금이 형이 귀까지 붉게 물들인 채 중얼거리자 그걸 또 용케 들은 수박 누나가 배낭에서 다른 색 모자를 꺼내 웃으며 송금이 형 가까이 갔다.

“그럼 옵션 치명으로 맞춰줄 수 있어요?”

“치명 마석만 구해주면….”

[일곱 개의 죄악 제7의 죄 ‘나태’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무사히 클리어 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 던전 페널티 발생. 행운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이속이 소폭 감소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공속이 소폭 감소합나다.

- 던전 페널티 발생. 스킬 쿨타임이 소폭 상승합니다.

- 던전 페널티 발생. 포션사용 쿨타임이 소폭 상승합니다.

[칠죄종 던전 발견! 최초 발견자에게 칭호가 지급됩니다.]

“미친, 이게 뭐야…?”

“던전 페널티라니 처음 들어보는 거잖아.”

‘나태’

-칭호 효과로 제작 성공률이 5% 증가합니다. 칠죄종 칭호를 모두 획득 시 칭호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겸아, 앞으로 네 장비는 내가 다 만들어 줄게. 절도 할 수 있어.”

송금이 형이 가까이 걸어오며 눈을 반짝였다. 제작 5퍼 상승이 그렇게 좋은 건가? 나르가 갑자기 마시던 포션 병을 내던지며 내 등을 퍽퍽 쳤다.

“그대는 드워프의 피를 타고나꾼! 절이라는 건 나한테 해야지! 내가 차자주지 않았나! 왜 겨미한테 인사를 하는 거신가!”

가만 보면 나르는 화가 참 많은 성격 같았다. 질투도 많았으며 자기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근데, 그렇다고 나를 때릴 것까진 없지 않을까, 나르야…. 낑! 하고 한 번 울어 보이자 크게 움찔하더니 이내 내 등을 쓰다듬었다.

“맞아, 나르가 찾았지? 멋지네, 나르.”

송금이 형이 어깨를 떨며 웃어대다 나르를 향해 손뼉을 치며 멋있다, 멋있다 노래를 불렀다. 나르의 어깨가 삐죽 솟았다. 쉽다, 쉬워.

한동안 잘난 체하던 나르의 어깨가 다시 내려간 건 포션병을 떨군 탓에 마력이 바닥나 마법진이 어그러질 때였다.

갑작스러운 악취에 숨이 턱 막혔다. 욱욱 헛구역질을 하며 푸름의 팔 안으로 마구 얼굴을 묻으니 놀란 나르가 얼른 포션을 주워 마시고는 마법진을 다시 그렸다.

“…이런 냄새에 다들 괜찮은 거예요?”

속이 뒤집힌 탓에 기운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혀까지 축 내밀자 사탕 누나가 웃으며 다가오다 바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쿠궁 하며 땅이 울리더니 다 녹아내리는 형체의 덩어리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으, 뭐야 이름도 안 뜨는데?”

“베지 마! 베이니까 터지면서 가스 뿌리잖아!”

“캐스터 뭐 해! 태우든 얼리든 하라고!!”

아비규환이었다. 빵빵하게 불어 있는 몬스터들을 베면 회색 연기가 터져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냄새가 더욱 심해지는지 파티원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바로 앞에서 터진 몬스터에 지독한 냄새를 그대로 뒤집어쓴 수박 누나가 웬일로 입 대신 눈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방방 뛰어야 할 사람이 차분하게 있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그쪽을 빤히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읊조리더니 주변으로 불덩어리들을 만들어 냈다.

암담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괴물 중 한 놈을 향해 날아간 불은 몬스터에게 닿기도 전 큰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수박 누나도 놀라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는데, 문제는 그 불길 주변에 있던 파티원들의 체력까지 깎아 사탕 누나가 바빠졌다.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마침 내 가까이 체력이 떨어진 지우가 있어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겨미! 머하는 짓인가!!”

소리치는 나르에게 조금 전 화환이 한 것처럼 눈을 찡긋해 준 뒤, 지우의 체력을 올려주는데 순간 질척한 무언가가 내 등에 닿았다. 놀라기보단 나도 모르게 숨을 내쉰 탓에 역겨운 냄새를 그대로 들이켰다는 게 문제였다.

“멍멍아….”

“욱, 으… 미친. 괜히 구해주러 왔어.”

“겸이 형! 빨리 떨어져요, 이쪽!”

최대한 숨을 참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나르에게 달려갔다. 감동했다며 열심히 싸우겠다고 말한 지우가 몬스터를 막아 무사히 나르가 있는 곳으로 갈 시간을 벌어주었다.

“잘했지?”

“겨미 미쳐따! 저거 자폭이라도 해따간 겨미 그대로 죽은 목숨이어쓸 거시다!!”

“그래도 내가 찾은 던전이잖아. 다른 사람들만 고생하잖아….”

“안 되겠다. 푸름이 잠깐 나와서 실드만 쳐봐, 한꺼번에 태워버리게.”

수박 누나의 말에 송금 형이 배낭 안에서 커다란 대포를 꺼내 앞에 설치한 후,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건 뭐지, 막 힘을 증폭시켜 주고 이런 건가? 불현듯 들려오는 푸름의 한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말 싫은 얼굴로 나를 내려준 푸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모이세요.”

사람들이 얼추 모이자 숨을 크게 들이쉼 푸름이 나르의 마법진 밖으로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가장 천천히 나간 얼굴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희게 질렸고, 코를 막은 채 사람들에게 달려가 실드를 크게 펼쳤다.

“얼마 못 갈 것 같은데. 빨리 정리해야 하니까 이리 모이라고.”

“형, 못 들었어? 오라잖아!”

또 미리내 길드의 삼촌이 문제였다. 모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꿋꿋하게 몬스터를 베며 앞으로 나가는 모습에 같은 길드원들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죽여버리죠, 수박 님. 푸름 님도 오래 못 버티실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수박 누나가 송금 형이 설치한 대포 위로 손을 모으자, 대포가 붉은 빛으로 변했다.

공간 전체를 감쌀 만큼 많은 화살 모양의 불이 공중에 떠올랐고, 송금이 형이 무언가 조작하듯 손을 움직이자 몬스터에게 한 발씩 타깃팅 되는 게 보였다. 합체 기술…?

순식간에 날아간 화살들로 주변은 불바다가 되었다. 비명과 함께 한 마리씩 터지는 몬스터들 사이로 불에 그을려 시체가 된 삼촌이 보였다. 그걸 본 미리내 길드원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사과만 해댔다.

“나르. 이거 더 크겐 못 만들어?”

“마력이… 겨미의 마력을 빌리면 가능하긴 한데 아마 10분이 한계일 거시다.”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 숨 돌릴 틈이라도 주고 싶었다. 나르를 등에 태운 채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의 중앙으로 파고들어 바닥에 앉았다.

“자기야, 혼자 쓸쓸했어?”

또 짖네, 저 미친 길마. 가볍게 무시한 뒤 배낭 안에 있던 마력 포션을 전부 꺼내며 나르를 바라보자 나르가 비장한 얼굴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르가 마법진이 그려진 하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마법진은 그 크기를 더해갔고 당연하게도 내 마력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빠지는 마력에 놀란 것도 잠시, 어중간한 높이에서 나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물론 나르가 가까워질수록 커지던 마법진도 말이다.

“겨미는 마력도 너무 저거.”

나르의 투정이 끝나기 무섭게 사탕 누나의 ‘활력’이라는 스킬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내 마력이 차올랐고, 나르도 확인한 건지 다시 마법진을 키웠다. 그다음으로는 도시락에게서 활력이 들어왔다. 역시 힐러….

두 사람 덕분에 파티원 전체를 감싼 마법진이 겨우 만들어졌다. 이걸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꾸준히 마력이 빠져나갔다.

나르의 말대로 내 레벨이 낮은 탓에 나르가 마음껏 능력을 쓸 수 없는 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제 할 일을 다 마쳐서 뿌듯한 얼굴을 한 나르가 날아왔다.

“와, 이제 좀 살겠다.”

“진짜…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냄새 때문에 죽을 뻔했네.”

“10분 정도 유지할 수 있대요. 숨 좀 돌리시라고….”

“근데 삼촌님은 저렇게 둬도 돼?”

수박 누나가 힐끔거리며 묻자 도시락이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삼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부활을 넣었다. 그래도 챙기는 건 길드원뿐이네.

너무 늦게 부활시켜 파티를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던전을 포기하긴 싫었는지 삼촌은 얌전히 도시락을 따라 마법진 안으로 들어왔다.

한결 편해진 얼굴의 사람들이 편하게 바닥에 주저앉아선 마력 포션을 몇 개씩 내밀었다. 욕심 많은 나르는 품에 한가득 챙겨 내 앞으로 가져오더니, 송금이 형이 건네준 최상급 제작자의 마력 회복 포션의 뚜껑을 열어 내게 양보했다.

어떻게… 이런 생물이 태어날 수 있지?

나도 똑같이 송금 형에게 받은 포션을 내밀자 나르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야, 이리 와봐.”

하, 오늘은 어째 조용하다고 했다. 무시하곤 바닥에 엎어지자 발소리와 익숙한 손이 내려왔다. 이젠 발버둥마저 포기하곤 얌전히 안기는데, 조용한 나르가 이상했다.

“왜 안 말려줘?”

“저 마족은 나만큼 강하니 겨미를 맡길 수 이끼 때무니지.”

“나르가 진짜 똑똑하구나.”

작게 웃던 화환이 손을 올려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시원함에 이쪽저쪽 고개를 틀어가며 손에 맡기자 나르도 쪼르르 날아와 양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화환과 저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려 할 때마다 죽일 듯 노려보았다. 나르는 강한 게 옳다고 생각하는 짐승인 건가?

“똑똑한 나르, 다음 페이즈는 뭐가 나와?”

중요한 본론을 꺼낸 화환이 손가락을 뻗어 나르의 목덜미도 어루만져 주며 물었다. 그 손길이 좋은 건지 고양이 골골송마냥 그르릉거리던 나르가 아무것도 없는 벽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다음 시련은 디버퍼야. 약하긴 하지만 스킬을 사용할 수 업찌.”

“그럼? 가까이 다가가서 때려야 해?”

사탕 누나가 막 활력을 써주며 묻자 나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까이도 못 가. 그 녀석 주위로는 산이 흘러서 겨미가치 야칸 아기는 순식가네 녹아버려.”

이 새끼는 꼭 약하다고 할 때만 내 이름을 들먹여. 이를 내보이자 나르가 이해한다는 듯 내 배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치만 그 산은 바울에게도 위험하지. 주벼네 물건을 이용해서 산을 바울에게 디집어 씌우는 수바께 업서.”

“혹시 미리내 길드원 중에 파이터가 있나요?”

사탕 누나의 물음에 나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햇살이 지우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아, 지우가 근력이 높은 편인데 파이터는 아니에요.”

“우리 계란이도 그렇지 않아? 배낭 안에 크고 무거운 것 중에 필요 없는 거 있으면 계란이랑, 지우 님한테 드려야겠네.”

“나, 이번에 새로 제작한 템이 있는데 그걸 써 봐도 될까?”

송금 형이 손을 들고 중얼거리자 화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형이랑 같이 오는 게 제일 재미있네.”

“겨미! 이제 한계다. 더 이상 크기를 유지하지 모탄다!”

다급한 나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줄어드는 마법진에 화환이 나와 나르를 푸름에게 들려 주었다.

바로 작아진 마법진은 조그마하게 나와 푸름의 하늘 위에만 떴고, 다른 사람들은 이내 배낭을 뒤적여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을 송금이 형과 다른 둘에게 건네기 바빴다.

“마족, 저기 반짝이는 돌을 챙겨라!”

나르의 손짓에 화환이 붉게 빛나는 돌을 들어 올리며 보여주자 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음으로 가는 열쇠다. 벽면에 그거시 들어갈 만한 홈이 있다. 거기에 끼우면 열릴 거시야!”

어디서 이런 똑똑한 게 왔지? 기특함에 나르를 빤히 보자 또 나르의 어깨가 삐죽 솟았다.

얼마 가지 않아 햇살에게서 여기 뭔가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화환이 홈 안으로 돌을 끼워 넣자 공간이 어그러지며 미끈거리는 바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나르의 마법진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코를 때리는 역한 냄새에 눈을 꼭 감곤 푸름의 팔 안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겨미, 여기선 마법을 쓸 수 없다. 조금만 차마라!”

나르가 낑낑거리며 내 품을 파고들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을 뜰 수 없어 귀를 세워 듣고만 있으니 저쪽도 난리인 건지 고함과 불평이 이어졌다.

“미친 던전! 근력 낮아져서 던질 수도 없다고.”

“이 씨발, 미끄러워 뒈지겠네.”

“송금이 형, 아직 멀었어요?”

“기다려, 투척기 조립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됐다며 여기 아까 모아둔 물건을 올리면 된다는 말을 끝으로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키에엑 하며 우는 몬스터의 비명이 들렸다.

이제 끝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다 녹아내려 뼈까지 보이는 징그러운 몬스터가 보였다.

어린아이 정도의 키에 붉은 날개를 단 작은 몬스터가 나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검게 변하더니 곧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나르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르며 마법진을 그렸다.

“겨미, 죽지 않았나?”

“겸이 형 숨 쉬고 있어, 나르야.”

“하지만 계속 끼잉낑거리던걸?”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려 응징하듯 나르의 배에 코를 마구 문지르자 깔깔거리며 넘어가는 나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 던전만 돌면 날로 먹는 것 같은데…. 장꾸 형, 세 번 넘어도 괜찮아요?”

“겨미는 내가 이쓰니 갠찮다. 그러치 아는가, 장꾸여.”

나르가 장꾸 형을 힐끔 보곤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입장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장꾸 형이 나르도 마음에 걸렸던 건지, 푸름을 잡아끌어 장꾸 형 가까이 가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우리 나르가 손 한 번 잡아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기운 없이 중얼거리자 나르가 나를 힐끔 보더니 언제 챙겼는지 모를 포션을 바닥에 늘여놓았다.

아마 마법진을 다시 한번 크게 키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바닥에 내려와 포션 뚜껑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바로 내 주위로 모여들었고, 곧 나르가 마법진을 키우자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사탕 누나의 활력이 들어왔다.

“진짜… 던전에 와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어느 정도 마법진의 크기가 커지자 나르가 이쪽으로 날아와 포션 뚜껑을 장꾸 형에게 열어 달라 내밀었다. 윽, 도대체… 저 귀여운 생명체는 뭐지?

이리저리 날아 장꾸 형 주위를 돌며 한참 예쁜 짓을 하던 나르가 조금 뒤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화환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나르를 바라보았다.

“다음 나태의 왕이 궁금한 거신가?”

“응, 우리는 나르보다 약해서 적을 미리 알아둬야 빨리 밖으로 나갈 수 있잖아.”

나르가 큰 눈을 슴벅이다 눈꼬리를 내려 기쁜 듯 웃었다.

“그렇지 겨미가 힘들어하니 얼른 밖으로 나가야 해 우리는.”

고개를 주억이던 나르가 이내 걱정스러운 듯 나를 내려 보았다.

“나태의 왕은 지금까지 우리를 다 지켜보아따. 그래서 가장 나태했던 사람 하나를 데려가지.”

“그게 겸이라는 거지?”

“그러타. 겨미는 안겨 다니기만 해찌 아는가.”

화환이 나를 내려보며 작게 그렇다고 대답하자 나르의 얼굴이 조금 더 흐려졌다.

“나태의 왕을 그대가 빨리 해치워야 해. 겨미가 왕에게 죽임을 당하면 이 던전은 영영 도라올 수 업써.”

“왕은 겸이를 데려가서 어떻게 하는데?”

“흡수할 꺼다. 왕으 심장에.”

“그러니까, 겸이가 흡수되기 전에 왕을 잡아야 하는 거네?”

고개를 끄덕이던 나르가 내 콧잔등을 쿡쿡 찔렀다.

“겨미가 잘 버텨야 하는데 냄새 때무네…. 겨미가 정신을 잃으면 바로 흡수가 시작댄다.”

화환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바닥만 내려 보더니 배낭 안을 뒤적여 이상한 풀을 꺼내고는 바로 송금이 형을 불렀다.

입마개가 어떻고 러츠의 꽃이 어쩌고 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 얌전히 포션만 마시던 때였다. 송금이 형이 웬 테이블 하나를 꺼내 뚝딱이며 무언가를 만들다 내 입 크기를 재어 갔다.

“그래서, 왕의 약점이 뭐야?”

“왕의 이마에 박힌 보서기다. 하지만 그대드른 아직 그걸 깰 만큼 강하지 모태.”

나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화환을 향했다.

“마족, 그대는 숨겨진 히믈 가지고 이찌. 내가 알려주게따. 그걸 사용할 때를.”

놀란 눈으로 나르를 보던 화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겨진 힘은 뭐지? 그냥 미친놈 수치로 길마가 된 게 아닌가? 의문이 들 때쯤 나르가 눈을 뾰족하게 뜨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대드른 죽을 히믈 다해 왕의 부하들을 자바야 한다. 마족의 방해가 된다면 내가 주겨버릴 거다!”

얼른 발을 들어 나르의 몸을 깔아 눕혔다.

“누가 그렇게 나쁜 말 하래, 아기가.”

“겨미! 이게 무슨 짓인가!”

버둥거리는 나르를 온몸으로 깔아 눕히자 깔깔거리며 몸을 좌우로 굴렀다. 그사이 마법진은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다음 페이즈로 갈 시간이라는 거지.

솔직히 나태의 왕에게 흡수된다는 말은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나르는 화환이라면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하는 것 같아 그저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무작정 걷기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그 빛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붉은 던전의 벽과 전혀 다른 실내가 보였는데, 그곳은 우리가 거인국에 온 건가 싶을 만큼 모든 게 크고, 화려했다.

“와… 저기가 나태가 있다는 곳이겠죠?”

“맞다, 수인! 그대는 겨미를 잘 데리고 이써야 한다.”

저 말을 듣고 있으니 혹시 나르가 진짜 내 주인이고 내가 망상에 빠진 펫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꼭 자기 아이를 보살피는 아빠처럼 구는 모습에 나르를 올려 보는데 갑자기 송금이 형이 단단한 플라스틱 형태의 입마개를 씌워주었다.

뭐 하는 거지? 짜증이 덜컥 일어 콧잔등까지 찌푸리며 이를 내보이자 송금이 형이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입마개 끝을 톡 쳤다.

“허브야, 환이가 이러면 좀 더 편할 거래서.”

그러고 보니 입마개 안에서 상쾌한 향이 났다. 코를 킁킁거릴 때였다. 어딘가에서 낮고도 웅장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궁에 온 걸 환영하네, 별의 아이여.

붉은 장막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벽에 서 있던 갑옷들이 우르르 움직이며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아직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압도적인 분위기로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저기 앞이 입구 아니야? 왜 벌써 알아차린 거지?”

“일단… 부탁인데 빨리 가서 죽이면 안 될까요?”

“계란아, 그러지 말고 너도 겸이랑 같이 있을래?”

장막의 근처까지 다다랐을 무렵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장막이 걷혔다.

그 안, 붉은 소파 위로 길게 누운 미형의 남자가 이마에 있는 붉은 뿔을 쓰다듬고 있었다. 보석이 박힌 이마를 두어 번 두드린 뒤 우리가 있는 곳을 내려 보았다.

-그대들은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을 만큼 강한 자인가?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갑옷들에 권경배와 화환이 내 앞을 막고 섰다.

우리를 쭉 둘러보던 나태의 왕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얌전히 안겨 있던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왕의 손바닥 위로 옮겨졌다.

-거울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작군. 그대를 흡수한다고 해서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악취 탓에 켁켁 기침을 하는데 입에 걸린 입마개가 너무 거슬려 앞발로 긁었다. 그러나 아무리 긁어도 떨어지지 않는 입마개에 결국 고개를 손바닥에 파묻고, 코 위를 앞발로 막았다.

그런 나를 우습다는 듯 왕은 코웃음을 치던 왕이 다시 한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바로 코를 때리던 악취가 사라졌다.

-약하군. 이렇게 옅은 악취에도 힘들어하는 걸 보면.

“뭐래, 미친놈이.”

“겨미를 돌려줘라!”

나르가 날아오르자 그 앞으로 수많은 갑옷들이 나르를 막아서며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마족! 길을 뚫지 말고 바로 앞으로 나가라!”

“겸이를 흡수한다고 하지 않았나?”

“겨미가 약해서 그렇다! 겨미, 내가 레벨을 올리라고 하지 않았나!!”

“윽, 올리려고 여기 온 거잖아!!”

억울함에 나르가 있는 쪽을 향해 소리쳤다. 나태의 왕은 우습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아프게 문질러 입에 걸린 입마개를 바스러트리듯 뜯어냈다.

-그래, 그대는 나와 함께 있지. 혼자서 이렇게 있는 것도 지겨우니.

“뭐래, 이거 놔 이 새끼야!”

-어려서 목소리가 큰 건가? 같이 있으면 심심하진 않겠군.

왕의 손을 벅벅 긁다 위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갑옷들과 싸우기 바빴다.

가장 앞에 선 나르와 화환마저 두 마리의 갑옷에게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숙여 뛰어내리려는데 큰손이 다가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대는 그저 저들이 구하러 올 때까지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면 돼. 내가 죽으면… 가장 가까이서 봐 주어야 하는 아이니.

고개를 돌려 나태의 왕을 빤히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길잡이에게 듣지 못한 건가?

“길잡이?”

왕이 나르를 한 번 바라보곤 다시 내 얼굴을 내려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눈꼬리를 접어 웃던 왕이 작게 속삭였다.

-칠죄종은 그대의 탄생과 함께 생긴 곳이지. 그대만의 길. 나머지는 그대의 작은 길잡이가 알려줄 거야.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눈만 깜빡이자 나태의 왕은 제가 언제 웃었냐는 듯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 하고 크게 바람을 내뱉었다.

다시금 풍기는 악취에 나는 그대로 무너졌다. 나태의 왕의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연거푸 기침만 했다.

“겨미! 입마개는 어쨌나? 정신 이르면 안 댄다! 겨미!!!”

그놈의 겨미, 진짜. 겨우 눈을 뜨곤 나르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손가락 틈 사이로 보이는 나르의 모습에 눈을 꼭 감곤 있는 힘껏 그쪽으로 뛰어내렸다.

뒤집힌 속 때문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결국 어깨부터 떨어졌다. 깨갱! 하는 울음소리에도 두 바퀴는 더 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자기야, 도전은 좋았는데 신호라도 줘야지.”

가장 먼저 달려온 건 놀란 얼굴의 화환이었다. 그동안 속으로 욕한 걸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나? …는 무슨, 주저앉아 놀리듯 앞발을 만지는 손길에 이를 한 번 내보였다. 그제야 안심한 듯 웃던 미친놈이 나를 안아 푸름의 손에 들려주었다.

“미쳐따! 겨미 거기서 그렇게 뛰어내리면 어떠케 하나!”

“나르야, 겨미 형 귀에서 피나겠어.”

나르를 피해 고개를 돌리며 푸름이 쥐여주는 포션을 마셨다. 그때 환한 빛이 터지며 권경배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동시에 갑옷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생각보다 강한 자들이었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나태의 왕은 가슴이 다 드러나도록 흐트러진 붉은 야장을 정리하지도 않고, 머리를 옆으로 내린 채 한 걸음씩 계단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보니 붉은색에 미친 것도 같아 보였다.

다들 숨을 죽이며 나태 왕의 행동만 지켜보던 중, 갑자기 왕이 눈앞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푸름이 벽으로 떠밀리듯 처박혔다.

다시 왕에 잡혀간 나를 허망하게 보던 나르의 눈이 일순간 붉어졌다. 아랑곳하지 않은 나태의 나를 어깨 위에 올리더니 푸름과 비슷하게 작아졌다. 순식간에 좁아진 공간에 흘러내리는 나를 추어올림과 동시에 탕하는 총성이 울렸다.

-재미있는 아이가 있군.

나태 왕이 재빠르게 날아오는 총알을 손으로 막으려다 그대로 뚫려버린 꼴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화환의 일격이 먹힌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나태 왕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르가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까무룩 감기는 눈을 필사적으로 뜨는데 갑자기 등 뒤로 큰 대검이 지나가며 내 허리를 스쳤다.

“저 씨발 새끼가 끝까지!”

분위기를 보아 날아온 대검의 주인은 아마 ‘삼촌’인 듯했다. 화가 난 권경배가 풀쩍 뛰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꾸만 눈꺼풀이 감겼다. 나는 부르르 떨리는 몸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펑펑 터지는 소리, 독한 악취 사이로 타는 냄새와 화약 냄새가 뒤섞여 났다. 모든 게 멍하게 느껴질 때쯤, 나태의 왕의 등에 권경배의 검이 날아와 박혔다.

그러자 바닥이 금빛으로 물들더니 나르의 마법진이 발동되어 나태의 왕의 발을 묶었다. 곧바로 나르의 고함이 들렸다.

“지그미다!”

그 뒤로는 엄청나게 밝은 빛이 일며 탕! 하는 큰 소리가 났다. 총알이 나태의 왕의 이마 정중앙에 닿았다.

머리가 뚫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왕의 무릎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던전 안의 모든 색이 사라졌다.

[나태의 왕 생명의 근원이 파괴되었습니다! 일곱 개의 죄악 제7의 죄 ‘나태’의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숨은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유우 님의 파티 화환, 간계밥, 민초맛사탕, 장꾸, 빛과송금, 푸름, 수박맛사탕, 삼촌, 지우, 햇살, 도시락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76Lv 달성!

[일곱 개의 죄악 제7의 죄 ‘나태’의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파티원의 명성이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최초 보상 나태의 왕 벨페고르의 붉은 보석이 유우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나태의 야장:시선이 모든 파티원에게 지급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나태의 생명의 근원이 화환 님께 귀속되었습니다!

-최초 보상 나태의 안식 버프로 파티원 모두의 디버프를 해제합니다!

7의 죄라니…. 연계된 던전이 더 있는 건가? 숨은 던전은 또 뭐래. 게다가 레벨이 이렇게 많이 오르는 게 말이 되나…? 76?

왕의 죽음과 사라진 악취에 겨우 고개를 들자 나르가 울먹이며 송금이 형을 협박해 체력 회복 포션을 가득 받아 들곤 내게로 날아왔다.

“저노미다. 저노미 겨미에게 칼을 던저따. 내가 훌쩍, 두 눈으로 똑또키 보았다.”

커다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던 나르가 중얼거리더니 삼촌 쪽으로 손가락을 뻗어 보이곤 서둘러 포션을 내 등에 들이부었다.

영악한 펫이 누구의 포션이 가장 효과가 좋은지 알아보곤 협박까지 해 뜯어내는 걸 보니 얘 혼자서 밖에 내보내면 절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삼촌에겐 우리 길드원이 가서 따질 필요도 없었다. 삼촌을 향해 패악을 부리는 지우를 수박 누나가 목덜미를 잡고 끌고 왔다.

체력이 겨우 1밖에 남지 않았던 화환이 힐을 받고 포션을 마신 뒤,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죽은 나태의 어깨에 걸려 있던 축 늘어진 몸을 제 물건처럼 번쩍 올려 안았다.

“파장 넘겨줘, 겸아.”

피곤한 듯 낮아진 목소리에 서둘러 파티장을 넘겨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화환이 한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지. 던전 입구로 나가면 길드 성으로 초대할 테니까.”

말을 마치기 무섭게 포탈을 타고 나간 화환의 뒤로 남은 사람들도 따라서 발을 옮겼다. 나도 겁나는데 너네는 어떻겠니.

[귓속말]유우 : 길마님..

[귓속말]화환 : 자기야, 우리 같이 전장을 뒹굴면서 생과 사를 넘나들었는데 아직 길마님이야?

그가 장난기 가득 담은 눈을 요사스럽게 좁히더니 입 모양만으로 왜, 하고 물었다.

채팅 창에 적어둔 수많은 된소리를 빠르게 지워내곤, 아까 나태의 왕이 해주었던 칠죄종이며, 길잡이 나르의 얘기를 해주자 화환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귓속말]화환 : 일단 이건 나중에 나르한테 물어보자. 지금은 따로 정리해야 할 사람이 있잖아.

화환은 느지막이 걸어 나오는 삼촌까지 확인한 뒤 길드성으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대연회실이었다. 12명의 사람이 들어가자 곧바로 의자와 다과가 차려졌다. 가장 먼저 의자에 앉은 화환이 나를 위해 테이블 쪽 다과를 당겨준 뒤 바로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어마어마한 신입이 들어와서. 합병 제의가 하루에 두 번씩은 들어오는데, 그쪽 분들이 거신 조건이 마음에 들어 불렀더니 이런 식으로 던전에서 뒤통수를 치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그쪽을 받아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버둥거리며 쿠키 껍질을 까려는 나를 내려보던 화환이 조그마한 앞접시를 가져와 그 위에 까 얹어주며 대답했다.

아마 내 등을 스친 칼의 주인인 삼촌이 일부러 나를 노리고 공격한 거라는 말인데….

와앙- 쿠키를 한입에 넣으려 입을 열자, 화환이 쿠키를 가져가더니 반을 뚝 갈라 뒤의 나르와 내게 차례대로 건네주었다.

“그런고로, 미리내의 합병 제안은 거절하는 바입니다. 아, 혹시 피안으로 오고 싶으신 분들은 넘어와도 되고. 저희가 지금 신입 모집 중이라.”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유우 님의 외형에 관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송금 형이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 늘 사람 좋게 웃던 얼굴에 웃음기가 빠지자 낯선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마침 얘기를 꺼낸 형에게 서둘러 던전에서 나온 보상을 차곡차곡 우편함에 넣어 보냈다.

구울의 심장, 구울의 진액, 구울의 어쩌고부터 나태의 손톱, 나태의 왕의 악취까지. 갖고 있기도 싫었기에 모두 첨부를 해 보내자 언제 확인한 건지 송금 형이 내 쪽을 보더니 살포시 웃었다.

“비싼 돈 주고 우리가 용병을 좀 구해놨거든요. 우리 쪽 삐딱한 어른 하나랑 오늘 던전 도신 네 분에게 붙여 뒀으니 입 조심하는 게… 서로 편할 것 같아요, 그쵸?”

“양심이 있으면 닥치고 있겠지. 누구 덕에 칭호도 공짜로 먹었는데.”

권경배가 기분 나쁘다는 듯 삼촌을 바라보며 얘기하자 지우가 맞장구를 치더니 미리내를 탈퇴하곤 피안에 들어오겠다, 갖은 주접을 다 떨었다.

“원래 저희가 제시한 조건이 그거지 않습니까. 미리내는 피안에 흡수된다고. 그럼 언제까지 이동하면 될까요?”

“합병은 거부라고 말씀 드렸는데… 저희 애를 함부로 공격한 사람을 같은 길드에 두긴 좀. 꼴이 이래도 곱게 키우는 중이거든, 지금.”

“듣자 듣자 하니, 씨발. 뭔 좆같은 소리야.”

삼촌이 벌떡 일어나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게, 내 꼴이 어떻다고… 혹시 몰라 티 나지 않게 손이며 가슴팍을 킁킁거렸다.

“말조심하지, 아까 태어난 아기도 있는데.”

“어린놈의 새끼가 감투 쓰고 설치는 꼴은 내가 또 못 보지. 새끼야, 떠들고 다니면 어쩔 건데, 네가.”

“드림소울에서 200억, 현금 150 사기. 이터널슈가에서 넷카마로 2,000 명품 백 뜯어내고…. 삼촌 님 조금만 캐도 이 정도 나오던데. 24시간 숨 막히시게 진심으로 따라다녀 볼까요?”

“여기서도 대단하시던데. 신규 유저 등쳐 먹고 아이템 뺏어서 팔아먹고, 그걸로 아들 오토바이 뽑아준 거야?”

[귓속말]유우 : 뭐야, 뒷조사야? 나 잠수타면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와??

[귓속말]간계밥 : 조사야, 조사. 길마님이랑 사탕 누나 예전에 그런 거로 유명한 길드 있었거든…. 아마 샀다는 비싼 용병이 하늘 길드일걸.

하얗게 질린 삼촌이 서둘러 길드 밖으로 나갔다. 이내 길드까지 탈퇴했다는 알림이 떴다.

길드 창고는 애초에 피안과 합병할 목적이었기에 미리 다 비워뒀다며 햇살이 말했지만, 굳어진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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