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피안
“뭔가 재미있지 않았냐?”
“전 재미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한 기분이에요. 스킬 금지라니….”
“아, 맞아. 감사합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 인사 뒤로 이어진 1차 각성 축하한다는 말을 들으며 기지개를 켰다. 이 사람들은 이런 걸 매일 하는 걸까? 몸은 피로하고 뻐근했지만 의외로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도 있어 꼬리가 절로 흔들렸다.
“이제 유우 데리고 길드 성으로 갈까?”
“맞아, 나랑 약속했지?”
“근데 길마님만 길드 명 다른데 전부 같은 길드원이에요?”
“응, 쟤 지금 다른 데 용병으로 가 있는 중이라 그래. 곧 돌아올걸?”
[민초맛사탕 님이 ‘피안’ 길드로 초대하셨습니다.]
[수락] [거절]
눈을 들어 화환의 얼굴 확인하자 뭔가 탐탁잖은 표정이었다. 자기가 불러놓고 뭐가 불만이지? 보란 듯이 수락을 눌렀고, 바로 친구 채팅 창 위로 길드 채팅 창과 오른쪽 아래 길드 마크가 새겨진 조그마한 아이콘이 생겨났다.
[길드]빛과송금 : 진짜 수인 히든 우리 길드로 온 거?
[길드]엔젤코코 : 헐! 맞네, 오셨네. 어서오세요!
[길드]수박맛사탕 : 아직 같이 있어?
[길드]유우 : 안녕하세요.
[길드]푸름 : ㅇㅇ 개재미있었어여 히든 1차 지원 썰 푼다. 길드성으러 모여라
[길드]수박맛사탕 : 안녕하세여1 얼른 길드성으로 오세요, 저 달려가는 중!
[길드]간계밥 : ㅋㅋㅋㅋㅋㅋㅋ
[길드]장꾸 : 헐 얼마만의 신입이야 레벨 20이네... 슨배님이 도와주까여??
[길드]옥장판팝니다 : 20이면 1차 각성 겨우 했겠네. 창고에 수인템이 있었나?
[길드]장꾸 : 푸름이 하우징 털면 나오지 않ㅇ음?
[길드]빛과송금 : 너 때문에 푸름이가 하우징 잠그고 다니잖아...
[길드]베르 : 화화니 없는데 욕먹는 거 아냐?
“화화니가 왜 욕을 먹어요?”
“저기 있잖아, 채길마. 같이 다녀온 거 모르는 사람이라 그래 신경쓰지 마.”
[길드]민초맛사탕 : ㄱㅊ 서프라이즈임. 다들 길드성 작은 연회실로 모이세여. 보면 왜 서프라이즈인지 알게됨ㅋ
묘하게 기분 나빠 보이는 민초맛사탕이 배낭을 뒤져 웬 담요 하나를 꺼내더니 나를 둘러쌌다, 얼굴까지 칭칭 감아 묶었다.
답답함에 버둥거리자 눈만 빼꼼 내밀 수 있게 담요를 정리해 준 후 큰 리본을 하나 달아주더니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잠깐만 숨어 있자. 동물 외형인 거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깜짝 놀라게.”
“아, 나는 마을 좀 갔다 갈게요. 일퀘 보고해야 돼요.”
“채길마, 너는 언제 오려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이따 한 번 더 털고, 바로 갈게. 자기야, 다른 사람들이랑 너무 친해지면 안 돼.”
화환이 굳이 좁게 나 있는 틈으로 손을 넣어 턱 아래를 간질이듯 쓰다듬은 뒤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둘 뿐이었는데, 푸름이 민초맛사탕의 손에 들린 나를 받아 들더니 짐짝 옮기듯 옆구리에 끼자 시야가 어두워졌다.
간신히 눈을 뜨고 밖을 빼꼼히 내보자 푸름이 나를 둘러맨 채 웬 성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근데 각성한 것 치곤 별로 안 커졌다. 그치?”
“그대로 아냐? 아예 안 큰 것 같은데?”
“그래? 그래도 신기하네, 성장형이라니 앞으로 이렇게 업뎃하려나?”
“저기요… 저 좀 어지러운데.”
시야가 높아져 울렁임이 심해 진짜 딱 멀미가 나 죽을 것 같았다.
“푸름아 그렇게 드니까 그렇지. 양손으로 아기 안듯 들어봐.”
“내가 아기를 안아 봤어야지…. 이렇게?”
“어, 응. 엉덩이 받치고, 그렇게. 조심조심 걸어 안 흔들리게.”
23살 먹고 이렇게 달랑달랑 들리며 게임을 해도 괜찮은 건가…. 얼굴로 열이 올랐다. 아깐 퀘스트에 정신이 팔려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여기선 달랐다.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아 차라리 눈을 감았다.
“뭐야, 분명히 위치는 길드 성인데? 왜 둘뿐이야?”
“그건 뭐야?”
“설마, 납치해온 건 아니지…?”
“아니 근데 어린앤가 왜 그렇게 작아?”
“커스텀으로도 저렇게 작게는 안 되지 않나?”
[길드]민초맛사탕 :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온 거야?
[길드]간계밥 : 1분만 나 이제 템 정리 중.
[길드]베르 : 나 이제 도착.
“왜 입구를 이렇게 막고 있어? 안 들어가?”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짜증을 가득 머금은 남자의 말에 정적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막 도착해서. 들어가자.”
“서프라이즈라며, 이거?”
등을 아플 만큼 찌르는 손길에 몸을 떨자, 닿았던 손을 제법 거칠게 쳐 내는 소리가 들렸다.
“뭔지 알고 함부로 건드려?”
푸름이 한 발 물러섰고 그 앞으로 누가 다가온 듯했다. 이상하게 흐르는 분위기에 담요에 덮인 머리를 조금 더 안으로 밀어 넣자 푸름이 등 뒤로 작게 속삭였다.
“미안. 누나 눈치 보느라 다른 사람이 손 뻗는 걸 못 봤어요.”
“야.”
“뭐야, 나 마중 나온 거? 감동이네.”
짜증 섞인 목소리 뒤로 분위기 파악이 빠른 권경배가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과장된 말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덕분에 사나워질 뻔하던 분위기가 유해졌고, 빨리 들어가라는 말에 떠밀려 온 곳에서야 바닥에 내려올 수 있었다.
“뭔데, 뭐길래 이렇게 신줏단지 모시듯 고이 받들고 온 거야?”
“신줏단지라니…. 요즘도 그런 말 쓰는 사람이 있네.”
민초맛사탕이랑 누구지…? 곧이어 리본이 풀렸고, 갑작스레 밝아진 시야에 고개를 좌우로 젓다 앞발로 눈을 긁었다.
이상하게 조용한 실내에 반쯤 뜬 눈을 들자 여섯 명의 시선이 내게 일제히 쏟아지는 게 보였다. 물론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사람 또한 내 뒤통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유저가 아니라… 펫이야?”
“그래서, 웨어 울프는?”
“여기 있잖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권경배가 보였다. 이러려고 그렇게 꽁꽁 숨겼구나. 몰려오는 민망함에 엉덩이를 뒤로 빼며 눈을 돌렸다. 권경배는 미친놈처럼 꺽꺽 웃어댔다.
나도 안다고 웃긴 거…. 그래도 군필인 건장한 남자가 늑대 귀와 꼬리를 달고 다니는 모습보다 열 배는 나았다.
“아니, 수인이라도 반인반수 아니야?”
“이렇게 동물로 변할 수 있다고?”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풉, 아 미친. 반응이 다 똑같아. 누나, 얘 저랑 동갑이에요 23살.”
“그럼 우리 막내는 푸름이로 변함이 없네.”
“근데 왜 아기 늑대야? 웨어 울프 아닌가?”
“하아… 겸아. 코코, 푸름이 빼고 전부 형, 누나야.”
“유우겸이라 겸이라고 부르는 거야? 겸이가 더 잘 어울린다. 겸아.”
“아, 응. 네…. 안아보는 건 좀…….”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리자 두 개의 손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발을 딛고 선 테이블 위를 향해 가까이 오는 손을 나도 모르게 발로 밟자 놀란 사람이 서둘러 손을 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쳤다! 밟았어! 밟아줬어! 나 오늘부터 손 안 씻는다…!”
건장한 체구에 그렇지 못한 말을 하며 몸을 배배 꼬더니 밟힌 손을 쥐고 부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순식간에 이곳이 미친놈들의 소굴로 보이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저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나는 그나마 익숙한 민초맛사탕과 푸름 뒤로 황급히 달려갔다.
“뛰는 것 봐. 야, 장꾸 변탠 거 알아보고 도망가잖아!”
마녀 모자처럼 챙이 큰 모자를 쓴 수박맛사탕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어왔다.
“겸아 이리와, 우쭈쭈.”
“내가 진짜 동물인줄 아나….”
아무도 못 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이번엔 배낭 안에서 고기 조각 하나를 꺼내 오쪼쪼 하며 고기를 흔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옆에서 크게 웃던 푸름이 크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누나, 겸이 님 동물 아니라고.”
“아, 나도 모르게…. 겸이 님? 수박맛사탕이에요. 26살. 저기 민초랑 동갑인데.”
“전 장꾸요, 27살!”
“아, 전 빛과 송금이요. 27살 형아 하고 부르면 돼요.”
“와, 형아 라니. 징그럽게……. 전 엔젤코코예요! 23살 동갑이구요! 코코라고 불러요!”
짧은 머리의 여성 캐릭터가 등에 내 몸만 한 총을 두 개나 매단 채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분이 코코였지…?
한꺼번에 쏟아진 정보를 외우던 중, 아까 내 등을 찔렀던 사람이 툴툴거렸다.
“히든이라고 별거 없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펫인 줄 알겠다. 난 28살 베르요.”
“형, 전 푸름이요. 22살.”
“네, 네.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돼요. 23살이요.”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작아? 직업 확인해 보니까 웨어 울프 맞는데?”
“성장형이라던데. 각성하면 커지는 거 아닌가?”
“방금 1차 했잖아. 원래 더 작았어?”
“그건 아니에요. 처음 봤을 때랑 똑같은 것 같은데?”
수박 누나의 물음에 푸름이 대답하며 익숙하게 내 몸을 들어 올려 아까 있던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그, 히든 스킬 해지하고 다시 써야 해서요. 히든 스킬 업 했는데 쿨도 길고, 반인반수화 하기가 좀… 그래서.”
무릎까지 꿇곤 내 앞발을 만지작거리는 장꾸의 손을 내려다보며 대답하자 권경배가 또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옆에 서 있던 베르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권경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얘. 왜 이렇게 웃어?”
“큽, 하아… 쟤 귀랑 꼬리 때문에 반인반수화 안 하는 거예요. 커마 아무것도 안 하고 넘겼거든요.”
다들 조용히 내 얼굴을 보는 중 장꾸가 계속 손을 뻗어왔다. 그걸 피하는 척 대답하지 않자 권경배가 신이 나 떠들어댔다. 별거 없이 그냥 귀찮아서 안 한 것뿐인데….
장꾸가 내 몸을 들어 올려 열 번쯤 둥가둥가를 했을 때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 볼일 보러 간다며 친구 신청만 남기고 떠나갔고, 길드 룸에는 나와 장꾸 형, 사탕 누나 푸름 그리고 권경배만 남았다.
마지막까지 질척이며 붙어오는 장꾸 얼굴에 발자국을 찍어주고 돌아오니 다들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제 메인 퀘 깨러 갈 거야?”
“아니, 보상 뭐 받았는지 확인하고 나가야지. 배고파.”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네. 여기 시간 흐름이 빠르다는 걸 계속 잊어.”
지금 시간을 확인하자 접속 전 현실 시간으로 2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아까 아이디 생성부터 지금까지 날이 바뀔 만큼 오래 한 것 같은데 두 시간 밖에 안 지났다니….
“어, 다들 보상받지 않았어요?”
“맞아 동행자 보상 주머니!”
[파티원 푸름 님께서 동행자 보상 주머니를 열어 ‘수인족 왕국의 특산물 보따리’를 획득하셨습니다.]
[파티원 민초맛사탕 님께서 동행자 보상 주머니를 열어 ‘수인족 왕국의 특산물 보따리’를 획득하셨습니다.]
[파티원 간계밥 님께서 동행자 보상 주머니를 열어 ‘수인족 왕국의 특산물 보따리’를 획득하셨습니다.]
“미친, 특산물이 철이야? 체뻥 쩌는 솔방울도 있는데?”
“내용물은 똑같나 봐요. 대왕 블루베리라니. 얼굴만 한데 이건 60분 동안 체 채워준대요.”
“스톤레빗은 뭐야. 가죽 주는데?”
“뿔 달린 토끼였어. 다른 곳엔 없나?”
“응, 처음 듣는 이름인데.”
[길드]민초맛사탕 : 제 [수인족 특산품 철] 좀 보세요!
[길드]민초맛사탕 : 이거 봐. 겸이 퀘 파티 보상으로 받음!
[길드]수박맛사탕 : 와 뭐야 내구도 안 닳는다고?
[길드]푸름 : 제 [수인족 특산물 대왕 블루베리] 좀 보세요!
[길드]푸름 : 체 채워준대요 ㅋㅋㅋㅋ
[길드]빛과송금 : ...내가 갔어야 했는데... 삽니다! 전부 삽니다1!
연달아 울리는 길드 채팅을 무시한 채 고개를 들자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사람 두 명이 보였다.
“겸이 갖고 싶은 거 없어?”
“겸이 형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상냥하게 물어오는 둘에 갑자기 나르의 알이 생각났다. 얼른 배낭 안으로 손을 넣어 나르의 알을 꺼내 내밀자, 이름만 보고도 이 알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였다.
“이거 부화시키고 싶은데 부화기는 어디서 살 수 있어요?”
낄낄거리며 길드 채팅을 하던 권경배가 내 배 아래로 손을 넣어 들어 올리더니 제 무릎 위에 올려 쓰다듬었다. 역시 강아지를 세 마리 키우는 집이라 퍽 익숙한 손길이었다.
근데 나는 네놈의 강아지가 아니거든. 몸을 떨며 권경배의 손을 발바닥으로 찍어 누른 후 옆자리로 내려가 앉았다.
“부화기는 제작 템인데? 아마 송금 오빠한테 의뢰 넣으면 될 거야. 물어볼게 잠시만.”
귓속말하는 건지 조용한 사탕 누나가 급조용해졌다. 나는 누나를 뒤로한 채 라디아탄의 마지막 선물을 열었다. 그곳엔 자그마한 구슬 5개와 칭호가 하나 나왔다.
[라디아탄의 축복]
-스킬 쿨타임이 5초 감소됩니다. 라디아탄의 축복으로 환각을 제외한 모든 상태이상의 저항이 가능해집니다. 소유자의 체력 이상 공격을 받았을 때 50% 확률로 모든 공격이 1회 무효화됩니다. / 히든 던전을 발견할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귓속말]유우 : 제 [라디아탄의 축복] 칭호 좀 보세요!
[귓속말]유우 : 이거 자랑 안 하는 게 낫겠지?
[귓속말]간계밥 : 히든던전?? 개사긴데? 진짜 장난 아니고 거래 가능한 템이면 차 한 대 값은 우습게 나올 걸... 일단 비밀로 하는 게 낫겠다.
권경배의 말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남을 구슬을 살폈다.
“그거 각성 스킬 구슬 같은데? 1차 각성 거 찾아서 깨봐.”
“각성 스킬 구슬?”
주머니를 뒤집어 백색, 금색, 노랑, 초록 분홍색 중, 렙 제한이 없는 분홍색 구슬을 입에 물고 깨트리자 연분홍 연기가 내 몸을 감쌌다. 곧 흡수되되어 사라지고 웬 알림이 하나 떴다.
[리저렉션]
-타겟팅 한 사람을 부활할 수 있습니다. 시전 시간 15초.
“오, 나 부활 배웠네.”
“힐러야? 육식계 수인은 보통 딜러 많이 잡는데. 푸름이도 딜탱이잖아.”
“겸아, 송금 오빠가 우편 보낸대. 근데 사용 렙 제가 45라는데?”
“아, 진짜요? 업부터 해야겠네. 얼마 드리면 돼요? 전 거진데, 얘가 내줄 거예요.”
저를 가리키는 뭉툭한 앞발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던 권경배가 사탕 누나를 쳐다봤다.
“뇌물이라는데? 대신 2차 각성퀘 데려가 달래.”
내 머리를 쓰다듬던 사탕 누나가 푸름이를 달고 아이템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사라졌다. 웅성이던 실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감정 소모가 큰 탓일까. 게임 시작한 지 현실 시간으로 2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야, 같이 저녁이나 먹자.”
“나 손도 꼼짝하기 싫으니까 네가 내려와.”
“바로 갈 거니까 로그아웃 해놓고 있어라.”
손만 두어 번 저어주곤 로그아웃을 하니 캡슐이 열리며 익숙한 방이 보였다.
뻐근한 어깨에 기지개를 켜서 스트레칭을 한 번 하고, 조금 더운 것 같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중 권경배가 초인종을 눌렀다.
“뭐야 두 시간 사이에 애가 왜 이렇게 늙어버렸지?”
“오자마자 시비야.”
“밥 먹이려고 그러지. 뭐 먹을래?”
“이모님 어제 다녀가셨으니까 시켜 먹지 말고 냉장고 털자.”
“얻어먹지 말고 맛있는 거 사 주고 오라던데?”
말과 행동이 반대인 권경배가 냉장고를 열어 보다 반찬을 덜기 시작했다. 소분해 얼려둔 밥도 세 개나 꺼내며 장난스레 웃었다.
“아, 근데 베르? 그 사람이랑 민초 사탕 누나랑 사이 안 좋아?”
국을 데우며 수저를 챙겨 자리에 앉자 권경배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있는 건 확실하네.
“우리 길드 대규모 업데이트하는 날마다 정모가 있는데, 6월 1일인가? 초에 한 번 모였었거든. 여태 안 오던 베르 형도 참석한다고 해서 창립 멤버 다 모인다고 신나서 나갔는데 그때 베르 형이 길마님이랑 친해지고 싶었나 봐.”
“응, 아까 또라이. 화화니였어? 화환 아니었나.”
“화환. 자기 멋대로 그렇게 부르더라. 근데 길마님이랑 사탕 누나랑 실친이라 둘이서 업뎃 이렇게 될 것 같다면서 1차 내내 얘기하니까 자기가 낄 틈이 없어 보였겠지.”
권경배가 따끈하게 데워진 밥을 식탁 위로 옮기곤 아직 끓지도 않는 국을 가득 퍼서 자리에 앉았다.
“2차에서 우리 길드도 길드원 받아야 하나 하는 말이 나왔거든. 다음 업뎃 중에 서버전 1등 세계전 간다는 내용이 있어서.”
“응, 그런데?”
“근데 그 전에 베르 형이 이상한 애들 데려와서 길마님이 아예 신규 가입을 막아놨어. 듣던 베르 형은 어이가 없는 거지. 자기가 데려온 애들은 다 내쳐놓고 왜 또 길드원 모집하냐고. 그래서 너 오늘 들어왔을 때도 짜증냈을걸.”
“응, 대놓고 싫어하더라. 그런데 이상한 애들? 왜, 길드 들어와서 무슨 짓 했는데.”
“야, 아오 진짜. 이간질에, 길드 창고에 소모품도 다 가져가고…. 데려와도 그런 것만 데려와선. 아무튼, 술이 좀 오르니까 갑자기 사탕 누나한테 시비를 걸었어. 여자니까 좋겠다고 조금만 찡찡거려도 다 도와주지 않냐고. 지금 아이템은 누구한테 뜯은 거냐고.”
“와… 실제로 본 건 처음 아니야?”
“맞지. 그냥 술 핑계로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나오는 대로 지껄인 거지. 사탕 누나 게임 초반에 그런 변태 만나서 사람한테 환멸 난다고 접었다가 환이 형이 다시 데려온 건데. 그래서 둘이 개싸움 하다 그날 모임은 쫑났어. 존나 웃긴 게 업뎃 끝나고 접속하니까 길드 채팅으로 술 취해서 그랬던 것 같다 미안하다 하고 사과하더라.”
“…그걸 받아줘?”
“사과만 받았지. 앞으로 자기한테 어떤 부탁도 하지 말고 웬만한 일 아니면 말도 걸지 말래.”
“멋있네.”
개인 채팅도 아니고 길드 채팅이라니 안 봐도 뻔했다. 보여 주기식의 사과지, 뭐.
“근데 아까 라디… 어쩌고 거북이 장난 아니더라.”
“약간, 그 동네 신이나 아니면 무당이 아닐까?”
“뭔 소리야?”
“속으로 자기 욕하는 건 기가 막히게 잘 알아. 야, 그런데 원래 이렇게 초반부터 몰아치는 게임이야?”
분명 배가 고팠는데 게임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얌전히 듣던 권경배는 밥을 마시듯 입에 쓸어 넣더니 한 그릇을 다 비우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에 수인 히든 푼 것부터가 다음 콘텐츠랑 이어지게 만든 것 같아. 넌 모르겠지만 다른 직업군은 첫 히든 뜰 때 그랬거든. 게다가 3년 내내 한 번도 뜬 적 없던 종족을 이렇게 이벤트로까지 푼 것 보면… 거의 확신이지.”
“그런가? 그냥 좀 마음이 안 좋았어.”
“너무 심하게 과몰입하지 말고. 일단 렙부터 올리자. 나른지 튜난지 깨워야지.”
이른 저녁을 먹곤 커피까지 시켜 마신 뒤, 권경배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러 가지로 드는 복잡한 생각을 접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로그아웃한 위치에서 그대로 접속이 되었다.
[길드성-연회실(소)]
얼마나 크기에 작은 연회실, 큰 연회실이 나뉜 건지…. 곧이어 권경배가 빛무리와 함께 접속 알림을 알리며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접속하는구나.
“일단 메인 퀘부터 밀어. 초반엔 그게 제일 빠르게 업 하는 길이니까. 던전 열리면 나한테 얘기하고, 모르는 거 있어도 물어보고.”
“혹시… 저희 아빠신가요?”
“응, 우겸아 열렙해. 비활성화 한 아이디는 풀지 말고. 너 유명인 다 됐더라.”
“응, 헛소리 그만.”
[초보자의 마을로 이동합니다]
알림 창과 함께 시야가 어그러졌다. 곧이어 도착한 마을에서 퀘스트 길잡이를 따라 사냥을 하자 20레벨임에도 빠르게 레벨이 올랐다.
[초보자의 마을 촌장 ‘척’]
-그대 덕분에 올해 농작물은 아주 튼튼하겠어! 마지막 부탁이 있네. 마을 남쪽 숲에 새로운 던전이 생겼지 뭔가? 일단 앞을 막아두긴 했는데 우리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그 던전을 클리어 해 주게.
[귓속말]유우 : 나 던전 떴는데 이거 혼자 클 가능?
[귓속말]간계밥 : 24네. 너 힐러지 않나? 팟 ㄱㄱ
[간계밥 님께 파티를 요청하였습니다.]
[간계밥 님이 파티에 참여하셨습니다!]
[파티]간계밥 : 장꾸 형 같이 오고 싶대. 길퀘 보고만 하고 온다니까 기다려.
[장꾸 님이 파티에 참여하셨습니다!]
[파티]장꾸 : 끝났음! 파티 소환해 주세요
[파티]간계밥 : 파티창 들어가면 오른쪽 위에 있음
[파티원을 소환합니다 3 2 1]
“와, 초보자 마을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전에 송금이 형 재료 구할 때가 마지막이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던 장꾸 형이 또 나를 번쩍 들어 품에 가두었다. ……빨리 강림 2로 바꿔야 하는데 쿨타임이 하루라 지금 당장 바꿀 수가 없었다.
“나도 겸이라고 불러도 돼? 사탕이가 우리 겸이 복슬복슬하다고 자랑하는 것 보니까 유우보다 겸이다 더 잘 어울리는데.”
“내려주면 불러도 돼요.”
앞발로 턱, 하고 묵직하게 어깨를 밀어내자 시원스레 웃으며 내 다리가 땅에 닿게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었다.
이 사람이 진짜 도움이 되는 건 맞나? 하는 의문에 잠시 주춤거리는데, 또 헛소리 할 듯이 입을 여는 모습에 얼른 던전으로 입장했다.
“여긴 변함없네.”
“아, 송금 형이 여기 온 김에 푸른 광석 캐 달라는데요?”
고개를 끄덕인 장꾸 형이 곧이어 큰 곡괭이를 꺼내 들었다. 이 길드 사람들은 다들 배낭 안에 곡괭이 하나씩은 넣어두는 건가? 사탕 누나도 그렇더니.
[동굴 박쥐 Lv26]
두 사람이 열심히 땅을 파던 중에 첫 몬스터가 나왔다. 만렙인 둘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광물 채집만 했다.
어느 정도 전투에 익숙해진 내가 프로텍트와 공격 자세를 잡아 적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일루전부터 걸었다.
-아우-!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공격력도 강해진 하울링을 쓰자 박쥐 세 마리가 땅에 떨어졌다. 어이없다는 듯 낄낄거리는 권경배의 뒤로,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 장꾸 형이 또 내 배 아래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아! 형, 쟤들 잡아야 한다고요!”
“뭐야 우리 겸이 방금 공격 스킬이야? 그렇게 우는 게?”
“진심 개하찮다….”
앞으로 이 공격은 혼자 있을 때만 사용해야겠다….
품에서 발버둥을 치자 그제야 장꾸 형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발을 땅에 딛자마자 얼른 남아 있는 박쥐들에게 뛰어올라 할퀴기를 썼다.
하울링만큼 한 방에 죽진 않았지만 쿨타임이 거의 없는 덕분에 금방 쓰러트릴 수 있었고, 벽을 딛고 무사히 내려오자 손뼉까지 치며 반겨주는 리액션에 괜히 머쓱해졌다.
“너 공격 스킬도 쓸 만하네.”
“귀여워서 죽은 게 아닐까? 가능성 있지.”
주머니가 두둑하게 광석을 채운 두 사람이 내 뒤를 바짝 따랐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자 징그럽게 생긴 거대한 지네가 벽이며 바닥이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벌레는 질색인지라 얼른 장꾸 형의 뒤로 가 다리에 매달리자 형이 엉덩이를 추어올려 안아주었다.
“얘 봐, 저건 무섭나 본데.”
“겸이가 곱게 자라서 이런 걸 못 보긴 하죠.”
“계란아 저거 독 좀 모아봐. 이번에 활에 발라서 써보게.”
장꾸 형이 웃으며 눈에 흰자가 보일 만큼 세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필 벌레가 나올게 뭐람. 안겨있는데도 여전히 전투중인 권경배 덕분에 경험치와 아이템이 들어오는 알림이 연달아 떴다.
“근데 형이랑 계란이 만렙 아니에요? 왜 경험치가 들어오지?”
“아, 이거. 우리는 레벨에 맞지 않는 사냥터라고 아무것도 못 받고 있거든. 초보 쩔 해주라는 게임사의 큰 그림이지.”
“보통 게임이 아니네.”
“신규 유저가 많아야 게임이 오래가니까 그런 거 아닐까? 게다가 해마다 성인 된 사람들이 신규로 오니까. 그 사람들도 빨리 업해서 재미 붙일 수 있어야지.”
낯설게 정상인처럼 얘기하는 형을 올려 보자 권경배가 가까이 다가와 작은 병 세 개를 장꾸 형에게 건넸다.
“다음이 보스죠? 누구였지?”
“두더지 아니었나? 사람 가죽 입은 100살짜리.”
사람 가죽을 입은… 두더지? 그게 어떻게 100년을 산다는 건지 그 또한 의문이지만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았기에 조용히 가기로 했다.
꽤나 한참을 걸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걸어도 보스의 ‘ㅂ’도 보이지 않았고, 점점 어둡고 좁아지는 길에 장꾸 형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어, 저기 뭐 있다.”
권경배의 말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자, 두더지의 100배는 되어 보이는 몬스터들이 열 마리가 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파티]장꾸 : 한 마리가 아닌데? 업뎃이라도 했나.
[파티]간계밥 : 그러게요, 수가 너무 많은데?
그때 무리 중 유달리 큰 몬스터가 갑자기 우리가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코를 킁킁 거리더니 크게 소리쳤다.
-침입자다! 어서 나를 지켜라!
[여왕 모울의 울음으로 근위대들이 적의를 품고 달려옵니다.]
순식간에 전쟁터가 된 던전에 정신이 다 없었다. 장꾸 형은 화살을 비 오듯 쏟아냈고, 권경배는 짜증을 내며 검을 휘둘렀으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쿨이 도는 대로 스킬을 남발했다.
-내 결혼식을 망치러 오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여왕 모울이 분노로 이성을 잃었습니다. 모울의 연회가 중지되었습니다.]
알림이 끝나기 무섭게 권경배가 스킬을 써 여왕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초보 던전에 만렙을 데려온 덕인지 여기까지 걸어온 시간에 반의반도 안 되는 찰나, 던전 클리어가 완료됐다.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그래도 순식간에 2나 업한 내 레벨을 보니 당장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라 그거 하나는 좋았다.
-고맙네! 자, 이건 약속한 보상. 시간 있을 때 옆 마을 페르니아의 내 사촌 동생 잭에게 방문을 부탁해도 되겠나? 요즘 던전이 늘어 자네 같은 강한 헌터의 도움이 꼭 필요하니 말이야.
레벨이 또 1 업 했다. 보상으로 들어온 돈을 흐뭇하게 내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종종거리며 다시 입구로 달려가는데 거긴 누가 봐도 휴양지에 온 두 사람이 음료를 쭉쭉 빨며 누워 있었다. 저 선베드는 또 어디서 나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지….
“겸아 이리 와~ 왜 형아 옆자리 비워뒀어.”
지나가는 유저마저 힐끔거리며 웅성거렸으나 장꾸 형은 당당하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별로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 페르니아가 있는 방향으로 냅다 달려갔다.
[길드]장꾸 : 겸아... 우리가.. 부끄러운 거니?
[길드]간계밥 : 뛰어봤자 페르니아지.
[길드]푸름 : 그런데 겸이 형 인기인 다 됐더라, 자게에 난리에요. 닉네임 비공개 신의 한수ㅋㅋㅋ
[길드]수박맛사탕 : ㅇㅇ 우리 말곤 겸이를 알아볼 사람이 없지.
[길드]간계밥 : 누가 봐도 펫 이니까...
[길드]장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ㅋ가ㅋ봐ㅋ도ㅋ
이 미친놈들이, 누가 펫이라는 거야. 여기서 발끈하면 둘의 말에 신빙성을 주는 것 같아 어른스럽게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렸다.
[유우 님께서 파티에서 탈퇴하셨습니다.]
[길드]장꾸 : 앗, 겸이! 형아 보고 있었니...?
[길드]간계밥 : 앗, 겸이! 삐졌니...?
[길드]민초맛사탕 : 길마님 10분 안에 온대 다들 길드성 대연회장 ㄱㄱ
[길드]베르 : 사흘 만이네.
[길드]장꾸 : 이번엔 왜 이렇게 길게 간 거래?
[길드]민초맛사탕 : 적 길드 턴다고 패배해도 계속 쟁 걸었다는데? 거기 저번 분기 랭킹 3위 였던 곳이라 맛집이래.
[귓속말]민초맛사탕 : 겨마 1차 전직 때 길마가 지원 간 거 비밀로 하기로 했어 모르는 척하면 될 거야..!
[귓속말]유우 : 넵 그런데 왜 비밀이에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귓속말]민초맛사탕 : 어제 베르 하는 꼴 보니까 길드 가입도 전에 길마까지 지원 갔다는 거 알면 뭔 소리를 할지 몰라서. 미안 ㅠ
[귓속말]유우 : 아녜여 금방 갈게요!
사탕 누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길드 성 아이콘을 누르자 멀리 길드 성이 보임과 동시에 번쩍 들리더니 이상한 상자 안으로 옮겨졌다.
“누나, 근데 왜 길마님 오신다고 다 모이는 거예요?”
“이번 달 길드 랭킹 순위권이라 보상 나눠야 하거든.”
“겸이는 다음 달부터 받겠네.”
수박 누나가 배낭에서 육포를 찢어 내 발등 위에 올린 후 짐짓 엄한 얼굴로 ‘기다려-’ 하고 말했다. 으르릉…. 하고 기분 나쁜 티를 내자 깔깔거리며 웃다 내 입 앞으로 밀어주는데, 진짜 내가 강아지인 줄 아는 건가…?
일단 먹는 건 죄가 없으니 한입에 넣고 씹었다. 희한하게 진짜 육포 맛이 나 주는 족족 받아먹으니 수박 누나의 얼굴에 비웃음과 함께 뿌듯함이 걸리기 시작했다.
한참 안으로 들어가다 멈춘 곳은 딱 보기에도 화려한 문 앞이었다. 도대체 길드 하우스가 이렇게 크려면 얼마나 레벨이 높아야 하는 거지?
길드 창을 활성화하자 Lv. Max가 당당히 떠 있었다. 역시 권경배가 들어올 만한 길드였네….
[귓속말]유우 : 나 이렇게 곱게 모시다 어디로 팔려 가는 거 아니지?
[귓속말]간계밥 : 겸이 거기 가서도 밥 잘 먹고... 사냥 열심히 해야 해.
[귓속말]간계밥 : 아. 던전은 나도 끼워줘.
[귓속말]유우 : ***이 또 **이네.
장난 가득한 표정을 무참히 씹어주곤 실내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커다란 테이블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백색 옷을 입은 의자는 사람이 들어온 수에 맞게 늘어났기 때문에 총 9개의 의자가 생겨났는데… 이 게임에서 나를 유일하게 사람으로 생각해주는 것 같아 찔끔 눈물이 나왔다.
“앗, 유우 님이시죠? 옥장판입니다. 아깐 던전 안이라 이제야 뵙네요.”
훤칠한 키의 천족이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내가 든 상자로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네, 안녕하세요? 유우이긴 한데, 다들 겸이라고 불러요. 저기 계란이랑 동갑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옥장판팝니다는 서른여덞의 나이로 길드 최대 연장자라며 머쓱하게 웃었고,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다. 연장자라 피곤한 게 아니라 던전 도느라 피곤한 것 같아 보이는데….
[화환 님께서 피안 길드에 가입하셨습니다.]
[민초맛사탕 님께서 길드 마스터를 화환 님 에게 양도하셨습니다.]
[길드 마스터 화환 님께서 민초맛사탕 님을 부 길드 마스터로 임명하셨습니다.]
[길드]화환 : 나 없는 사이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며?
[길드]수박맛사탕 : 대연회실 오면 같이 재미있을 수 있음.
[길드]엔젤코코 : 길마님 낮에 세계알림 보셨어요? 복덩이가 굴러옴!
사탕 누나가 길마를 넘김과 동시에 자리가 외진 곳으로 옮겨갔다, 다시 부길마로 돌아오자 이번엔 상석의 옆자리에 자리가 주어졌다.
권력의 힘이 이렇게나 대단할 줄이야. 따져보면 내 자리는 아마 가장 끝일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사탕 누나가 당연하게 내가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 오른쪽 의자에 앉았다.
조금 이상한 모양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더니 새 의자가 하나 생겨났다.
“자리가 좀 빈 것 같은데.”
“봄, 겨울 님은 신혼여행 갔고. 나머진 저녁 먹고 천천히 온다는데?”
낮은 목소리와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왠지 안절부절못하게 된 기분이었다.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지만 모르는 척하려니 더욱 긴장이 몰려왔다.
“빈자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꼬리가 절로 말려 내려갔다. 사탕 누나가 슬쩍 무릎 위에 있는 상자를 기울이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자 곧바로 붉은 눈의 마족과 눈이 마주쳤다.
새카만 머리칼이 보기 좋게 어울리는 뽀얀 얼굴과는 다르게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내 목덜미를 쥐고 들어 올렸다.
“깨갱!”
아팠다! 많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울음소리를 냈다는 것도 알지 못할 만큼 말이다! 손에 힘을 얼마나 주고 들어 올렸으면 아까 토끼에게 맞았을 때보다 더 아팠다.
얼굴 근육을 주욱 당기기에 마구 발버둥을 치자, 사탕 누나가 놀라며 내 양팔 아래를 안아들었다. 나는 그제야 난폭한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탕 누나가 테이블 위로 올려 잡힌 목덜미 부근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팠어?”
눈물까지 고일 만큼 아팠기에 화환을 보고 이를 내어 으르릉 거리다 가장 만만한 권경배의 자리로 뛰어갔다. 옆에서 장꾸 형이 서운한 듯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조용히 무시했다.
“겸아, 형아한테 와야지!”
“겸이?”
“너 얘기 못 들었어? 수인 히든 직업 나온 거.”
“그게 저거라고? 수인이라며, 짐승이 아니라.”
“히든 스킬이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이어가던 화환이 굳이 내가 있는 자리까지 걸어와 양손으로 몸을 들어 올린 뒤 제 자리로 향했다.
“그럼 얘가 유저라고?”
끄덕이는 사탕 누나 옆자리에 당연하게 내 몸통을 옆구리에 끼고 앉은 화환은 목덜미 털을 조몰락거리며 쓰다듬었다.
또 못살게 굴까 싶어 발을 굴러 사탕 누나를 향해 뛰려고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큰 손이 배 아래를 받치고 잡아챈 탓에 내 맘대로 도망갈 수가 없었다.
“왜 계속 버둥거리지, 배고픈가?”
“너 싫어서 그래 이리 줘. 겸아, 이리 와.”
“유운가, 그 이름 아니었나. 웬 겸이야?”
“너 오늘 궁금한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신기한 걸 봐서 그런가 보지, 뭐.”
“놓으라고, 아프다고!”
“말도 하네?”
쉼 없이 얼굴을 꼬집는 손길에 말도 제대로 안 나왔는데 용케 알아들은 건지 손에 힘을 조금 빼더니 얼굴을 잡곤 눈을 맞췄다.
꼴도 보기 싫은 얼굴과 마주하고 있자니 억울함을 넘어 약이 바짝 올랐다. 그대로 앞발을 들어 매끈한 볼 위로 발자국이 찍히도록 내리찍었다.
발을 떼자 발갛게 찍힌 발 도장이 만족스럽게 남아 있었다. 주변에서 하나둘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거 구애하는 거야? 자기 힘을 보여줘서 반하게 하는 뭐 그런 거? 아, 어쩌지. 이미 반한 것 같은데.”
“미친놈인가…?”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내 말은 누가 듣기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겸이한테… 미친놈?”
“…누나!”
웃느라 정신없는 사탕 누나를 불쌍한 표정으로 보자 얼른 내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이리. 겸이, 이리 와.”
“어린 게 벌써 여자만 좋아하면 안 돼.”
미친놈은 당연하다는 듯 품 안의 바깥쪽을 향하도록 내 몸을 돌려 안고 배를 쓰다듬었다.
여기서 날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사탕 누나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지만, 힘이 센 미친놈에게 잡혀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에 그냥 얌전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히든 각성퀘 지원 갔다 얻은 거라고?”
“응, 푸름이랑 나랑 계란이 셋 다 내용물은 똑같더라.”
“자기야.”
정신을 빼고 테이블 위 간식거리가 바뀌는 족족 배낭에 챙겨 넣는 중이었는데, 내 손을 쥔 미친놈에게서 언제 들어도 희한한 호칭이 들렸다.
아냐…. 잘못 들은 거겠지 싶어 가만히 있었더니 이젠 내 턱 아래를 톡톡 두드려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거기까지였다. 인내심이 끊겨 미친놈의 손을 이로 꽉 깨물었다.
“매력 어필 그만하고, 우리 겸인 뭐 받았어?”
내가 뭘 받았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묻는 화환의 말에 티를 내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색하게 물고 있던 손을 놓곤 기름칠 안 된 문짝처럼 고개를 삐걱대며 권경배를 보자 곧바로 파티 신청이 걸려왔다.
[파티]간계밥 : 형, 겸이 아이템 효과가 너무 사기라 비밀로 했는데.. 꼭 말씀드려야 될까요?
[파티]화환 : 그러니까 더 궁금하다. 안 뺏을 거니 얘기만 해 봐.
[파티]유우 : 이거 전속 템이라 뺏을 수도 없는데..
[파티]화환 : 우리 자기 이제 말 놓기로 한 거야?
이 미친놈이?
[파티]간계밥 : 그게 알려지면 좋을 거 없는 거라..
[파티]화환 : 나중에라도 알려져서 안 좋은 소리 들을 정도면 나한테만이라도 알려줘. 그래야 옆에서 편들어주지.
머뭇거리는 권경배를 확인한 후 바로 칭호 자랑하기를 파티창으로 돌리자 한동안 채팅 창이 조용했다.
…역시 놀란 건가? 눈을 도로록 굴리는데 주변 사람들까지 조용히 우리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미친놈이 내 쪽을 보며 씩 웃었다.
[파티]화환 : 왜 숨겼는지 알겠네.
[파티]화환 : 앞으로 던전은 길드원이랑 가야겠다, 우리 겸이는.
“와, 씨! 안 늦었다.”
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양 갈래 묶은 머리 위로 뾰족하게 뿔이 난 마족이 들어오고 있었다.
“길마님 펫 키워요? 아기 늑대는 처음 보는데. 발톱 하나만 주실 수 있으세요?”
다다다 달려와 내 손을 잡곤 눈을 반짝이는 탓에 황급히 길마님의 손바닥 아래로 내 손을 숨겼다.
“뭐야, 내 말 알아듣는 건가…?”
못 알아듣는 척하며 슬그머니 귀를 접자 길마님께서 몸을 뒤로 물려 숨겨주었다. 이렇게 배려심이 깊은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인사해. 신입 겸이래.”
큰 눈을 슴벅이던 마족이 놀란 듯 숨을 크게 삼키곤 사탕 누나를 쳐다보았다. 얘는 길마면서 이렇게 신뢰가 없어.
속으로 자기 욕을 하는 걸 알아차린 건지 화환이 얌전히 내려둔 내 양손을 들어 만세 자세를 만들며 킥킥댔다.
“맞아, 이번에 새로 들어온 수인.”
“어뉴어 업뎃했어요? 원래 수인 반인반수잖아.”
“히든이야 웨어 울프.”
“이렇게 쪼그만데?”
오늘 처음 시작했으니 이제 커질 거라고! 한소리 하려는데 미친 길마가 진정하라는 듯 내 배를 이리저리 문질렀다.
아니 이 미친놈은 왜 이렇게 주물럭거리는 거야. 뒷발로 발길질하며 닿는 곳 아무 곳이나 걷어차자 아무런 반응 없던 몸이 움찔하는 게 아닌가.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더니 곧 귓가로 숨소리가 닿았다.
“자기야 지금 어딜 밟는 거야?”
“…에?”
눈만 굴려 발바닥이 닿은 곳을 힐끔거리다 조심스레 다리를 들어 올리곤 몸에 힘을 뺐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얌전히 안겨 있자 작게 웃던 화환이 무언가 조작하듯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명성치에 맞춰서 배분했는데 틀린 것 같으면 찾아오고. 접속 안 한 길드원한테는 우편으로 보냈으니 나중에 확인 부탁한다고 전해주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신입 받자는 얘기가 나왔어. 그래서 우리도 이제 면접 보고 가입시키는 방향으로 하면 어떨까 싶은데…. 푸름, 계란, 수박 셋이서 맡는 거 어때?”
“넷카마, 부캐만 걸러내?”
“음… 보고 나중에 말 나올 것 같은 행동 하는 사람도 거르면 좋고.”
수박 누나의 물음에 사탕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걔는?”
엉뚱한 방향에서 나를 지칭하는 듯한 말이 들렸다. 당연하게도 베르 님이었고,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자 연회장은 조용해졌다.
“얘는 곱게 키워야지.”
“내가 데려온 애들은 전부 내보냈잖아. 설마 히든 직업이라고 벌써 편들어?”
싸해진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숨 막히는 대화에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꼬리가 안쪽으로 말려들었다.
화환의 큰 손이 내 발바닥을 주물럭거리며 고저 없이 말을 뱉어냈다.
“형이 데리고 온 사람들, 전부 편 가르기에 길드 창고만 거덜 내지 않았나? 겸이는 들어오기도 전에 우리 애들한테 선물까지 뿌렸는데, 비교할 이유가 없잖아.”
그 말에 화가 난 듯 씩씩거리던 베르가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길드 성을 벗어났다.
왜 저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더 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데려와서 그래. 저 사람, 나 싫어하거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사탕 누나가 기분 나빠하며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물론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들었고, 결코 미움받을 행동을 했을 리 없을 사탕 누나였기에 아까 테이블 위에 뜬 음식 중 몰래 꿍쳐둔 사탕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힘내라는 의미였는데. 사탕 누나는 내 손에 들린 사탕 껍질을 까 다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아, 누나 이게 아니라…….
얼른 마지막 남은 사탕을 꺼내 다시 내밀자 사탕 누나가 환하게 웃으며 받아 들었다.
“까달라는 게 아니라 나한테 주는 거야?”
입 안에 든 사탕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고맙다며 마찬가지로 껍질을 까 입에 넣는 게 보였다. 단 걸 먹으면 누나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이제 좀 놔요, 나 퀘스트 하러 가야 돼요.”
“어디로?”
“페르니아 잭 찾으러 가야 하는데요?”
“왜 서먹하게 존댓말이야? 아까는 미친놈이라더니. 나 서운해.”
“반말하면 친해 보이잖아요.”
“친한 사이 아니었나, 우리?”
“설마, 그럴 리가….”
“그럼 친해지게 같이 가야겠다.”
“시간이… 참 많으신가 보네.”
“많아졌지, 이번에.”
미친놈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법이지. 권경배와 장꾸 형이 아쉽게 바라보다 자리를 뜨며 파티가 해산되었고, 곧이어 새 파티 초대와 친구 신청이 걸려왔다.
[화환 님께서 파티 신청을 하셨습니다.]
[수락][거절]
수락한 뒤 길드 성 밖으로 이동하자 조금 전 페르니아로 이동하던 길이었다. 마침 파티장도 넘어왔기에 파티원 소환을 하자 바로 빛이 일렁이며 화환이 나타났다. 조금 미친놈이지만 그래도 길마니 잘 싸워주겠지.
[파티]화환 : 겸이는 다리가 그렇게 짧은데 왜 이렇게 잘 뛰지?
무시하자. 무시해야 이기는 거다.
잭에게 받은 첫 번째 퀘스트는 마을 입구 근처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 처리였다.
목이 두 개가 달린 강아지였는데 속도가 빠른 것 말곤 잡는 데 딱히 어렵지 않았고, 연신 신경을 긁어대는 미친놈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에도 딱이었다.
[파티]화환 : 우리 겸이는 언제 스킬에 나오는 늑대만큼 커지는 거야?
[파티]화환 : 아, 작은 것도 귀엽긴 하니까 속상해하지 말고.
[파티]화환 : 그런데 게임에서 그렇게 네 발로 걷다 보면.. 현실에서 위화감 같은 건 안 드나? 설마 밖에서도 네 발로 걷는 건 아니지?
막 20마리를 잡고 퀘스트 창을 확인할 때였다. 그늘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던 화환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참다 참다 결국 터진 나는 채팅 창으로 얼른 손을 가져갔다.
[파티]유우 : 네 사족보행 해요, 짐승이라.
[파티]화환 : 이제 대답해 주는 거야? 근데 짐승이라니.. 어쩐지 발길질을 해도 꼭 알고 밟는 것처럼 밟더니, 본능이었구나 자기야.
[파티]유우 : 죄송한데, 여기 길마님 자기가 어디 계실까요?
[파티]화환 : 다시 부끄러워하는 거야? 아깐 여기저기 내 몸 더듬어놓고. 이렇게 모른 척한다고?
[파티]유우 : 왜 미친 소리만 골라 하지? 아니 원래 길마는 바쁜 거 아녜요? 왜 여기서 사람 속을 긁어?
[파티]화환 : 내가 자기를 두고 어딜 가.
[파티]화환 : 퀘 갱신된 것 같은데 얼른 다음 퀘 받고 던전 가보자.
힘껏 화환이 있는 곳을 노려보곤 마을로 달렸다. 갱신된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세 번을 연달아 퀘스트를 받아서인지 레벨은 어느새 30이 되어 있었다. 역시 레벨이 오르니 업 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헌터님 덕분에 마을이 더욱 안전해졌어요.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으니 계속해서 몬스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 보상을 크게 드릴 테니 마을 입구 던전 클리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파티]유우 : 길마님. 설마 던전 둘이서만 가는 건 아니죠?
[파티]화환 : 던전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런 걸 물어?
[파티]유우 : ...음, 혹시 어렸을 때 머리를 크게 다친 적 있으세요? 망상이 막 현실 같고 그런 거요.
[파티]화환 : 없죠, 당연히.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랐는데 혹시 이거 내 유년시절이 궁금해서 떠보는 건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 쓰이는 말이었구나. 오늘도 게임에서 여러 가지를 배워가는 것 같다. ‘미친놈은 피하자’라는 세상 교훈 같은 것 말이다.
[간계밥 님께서 파티에 참여하셨습니다!]
[민초맛사탕 님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장꾸 님께서 파티에 참여하셨습니다!]
[파티]장꾸 : 겸아, 형아 준비 돼써.
[파티]간계밥 : 솬 ㄱㄱ
[파티]민초맛사탕 : 아니 초보 던전 멤버가 너무 호화로운데.
[파티]민초맛사탕 : 이게 그건가? 팔불출?
차마 뒷말은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파티 소환을 하자 던전 앞으로 파티원들이 한 명씩 나타났다.
“좀 호화로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무언가 눈치챈 듯 사탕 누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화환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칭호 효과라고 해도 히든 던전이 그렇게 쉽게 뜨겠냐고… 소폭 상승인데.
다들 기대하는 눈치에 미친놈의 바짓단이라도 물어뜯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던전에 입장했다.
[리자드 둥지로 입장합니다.]
이번 몬스터는 불 속성 도마뱀인지 입장하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사방에서 붉은 도마뱀들이 벽을 타고 기어 내려왔다.
진짜 한여름 같은 더위에 털옷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 헥헥 숨을 몰아쉬자 내 몸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겸이랑 상극이 불인가? 애가 맥을 못 추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박 누나도 부를 걸 그랬나 봐요.”
권경배가 차근차근 몬스터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지는 온도에 발바닥이 너무 뜨거워 결국 장꾸 형에게 들려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도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 게임에서마저 같을 건 또 뭐냐.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는데 옆에서 무언가 뒤적이던 화환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형, 이거 같이 들고 안아.”
“어? 이거 송금이가 찾던 재료 아니야? 얼음 골렘 핵.”
“응, 마침 악동 길드 창고에 있길래 슬쩍 했는데 이렇게 쓰이네.”
장꾸 형이 화환에게 건네받은 돌을 내 배 위에 얹어주었다. 시원한 기분에 발갛게 익은 발바닥부터 얹자 그 모습이 우스운지 장꾸 형이 어깨를 떨며 웃어댔다.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알 게 뭐야.
“겸이 익기 전에 빨리 클리어 하고 나가죠.”
역시 호화 멤버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닌지 스치기만 해도 픽픽 쓰러지는 몬스터를 눈으로 좇다 보니 어느새 보스만 남아 있었다.
근데… 이렇게 편하게 클리어 해도 되는 건가? 갑작스레 찔려오는 양심에 살며시 채팅 창을 열었다.
[파티]유우 : 저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는 거예요?
“원래 뉴비는 날로 먹어도 세 번은 용서 가능이지.”
사탕 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뜨겁게만 느껴지던 공기가 조금 시원해진 기분이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중 화환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등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좀 서늘해지지 않았나?”
화환의 의미심장한 말에 장꾸 형이 주위를 경계하며 둘러보았고, 살 만해진 나도 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불꽃이 일던 풍경이 갑자기 어두운 동굴로 변했다.
[히든:몬스터 페스티벌에 입장하셨습니다. 5번의 웨이브를 무사히 클리어 하시고 명성을 널리 퍼트리세요.]
알림과 동시에 상단에 60이라는 수가 떴다.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수가 57을 알릴 때쯤 화환과 눈이 마주쳤다.
[귓속말]화환 : 혹시나 했는데 진짜 히든이 뜨네.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왔지.
어디겠냐, 미친놈아. 라고 대답하면 또 좋아할 게 분명해 그냥 고개를 픽 돌리곤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빈손이 된 장꾸 형이 아쉽다는 듯 손에 들린 시원한 돌을 다시 화환에게 돌려줬다. 사탕 누나의 버프가 둘러짐과 동시에 우리가 서 있는 곳 사방으로 몬스터가 나왔다.
[리자드 Lv. 45]
초보 던전답게 제대로 된 스킬 하나 써 보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마 혼자 왔으면 안쓰러운 건 몬스터가 아니라 내가 되었겠지….
끔찍한 상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피했다. 전투에 집중하며 하울링과 할퀴기를 연타해 겨우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레벨이 10이 넘게 차이 나는 몬스터를 이렇게 잡을 수 있다니. 아무리 히든 직업이라고 해도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나 강해졌나 봐.”
“사탕 누나 버프 덕분이지 않을까?”
권경배가 마지막 남은 리자드의 가슴에 검을 꽂으며 대답했다. 저 새끼는 꼭 저렇게 초를 치지…. 터벅터벅 걸어 길드원들을 향해 걸어가는데 화환이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사탕이 버프가 좋긴 하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의미로 이를 내보였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내려 보던 장꾸가 이를 확인한 건지 껄껄 웃어댔다. 사탕 누나만이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강하다고 위로해 주었지만…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웨이브도 쉽게 클리어 하고 남은 건 두 번의 웨이브뿐이었다. 점점 많아지는 몬스터 수에 일반인인 나는 지쳐갔지만 네 명의 겜창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던전을 누볐다.
[해츨링 Lv. ??]
“미친, 다음이 드래곤 아니지?”
“어째 파충류만 나온다 했다.”
사탕 누나와 권경배가 다 마신 포션 병을 집어 던지며 얘기했다.
만렙이 되면 저렇게 무슨 몬스터가 나올지 예상 가능한 거였나? 지금까지의 몬스터와 비교할 수조차 없이 강해 보이는 외형에 나르가 생각났다. 우리 나르도 저만큼 크게 태어나면 데리고 다니기 힘들 텐데….
첫 공격은 장꾸 형이었다. 저번 던전에서 얻은 독을 꺼내더니 화살에 들이붓듯 바른 후 활시위를 당겼다. 일부러 천천히 공격한 건지 활은 누가 봐도 느리게 날아갔다. 당연하게도 해츨링은 활을 쳐냈는데, 활이 닿은 부위가 검게 타들었다.
“오… 나중에 가서 더 구해둬야겠다.”
던전에서 구한 아이템을 저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구나…! 감탄하며 독이 묻은 화살을 보자 내 시선을 알아차린 장꾸 형이 고개를 돌려 슬쩍 윙크했다. 이 길드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저 모양인지 알 수가 없네, 진짜.
장꾸 형은 노리다시피 독에 당한 적의 팔만 집요하게 공격했다. 얼마 안 가 결국 그 팔을 사용하지 못했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권경배가 뛰어올라 몬스터의 왼쪽 어깨부터 허리까지 베어냈다.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해츨링은 마지막 발악처럼 마구 불을 뿜어댔다. 작게 한숨 쉰 화환이 해츨링의 심장 쪽으로 총을 망설임 없이 총을 쐈다.
커다란 유리창에 못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해츨링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드래곤 하트를 노려야지.”
“한 방에 베기엔 저거 껍질이 너무 두껍잖아요….”
“너 광폭화 안 썼잖아.”
“초보 던전에 광폭화라니, 양심이 있지.”
껄껄 웃어대며 얘기하는 두 사람의 앞으로 갑자기 굉음이 터지더니 벽이 무너져 내렸다. 다음 웨이브까지 약 50초 가량 남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버석한 모래와 돌무더기가 내려앉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화가 난 듯 뾰족한 눈을 뜬 채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몬스터가 보였다.
[레드 드래곤 Lv. ??]
“레드가 왜 여기 있지?”
“겸이 부자 되는 소리 들리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지?”
마지막 웨이브에서는 예상대로 드래곤이 나타났다. 해츨링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나타난 드래곤은 딱 보기에도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브레스를 쏘아댔다.
뒤로 빠지는 나와 다르게 권경배와 화환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양손에 총을 쥔 화환이 드래곤의 머리로 총을 쏴 시선을 빼앗은 틈을 타 권경배가 공격하자, 일반 몬스터와 다르게 베이지 않고 검이 튕겨져 나왔다.
그렇다고 탱자탱자 놀면서 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계속해서 일루전을 걸며 드래곤의 공격을 피해 달리는데 장꾸 형이 내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겸이 발바닥에 땀나겠다.”
장꾸 형이 여유롭게 뛰어오르며 중얼거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몸집이 컸다면… 저렇게 피했겠지.
이제 양심이고 뭐고 없다. 재빨리 사탕 누나가 있는 뒤쪽으로 달려가 자리를 잡으니 그걸 본 장꾸 형이 이제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드래곤 지척으로 달려갔다.
와… 이러라고 놀린 건가? 전혀 반갑지 않은 배려였으나,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입꼬리가 눈치 없이 올라갔다.
한동안 드래곤의 움직임만 살피던 화환이 권경배를 불렀다. 저들끼리 잠시 붙어서 얘기하던 중 고개를 끄덕이고 떨어진 권경배가 갑자기 무기를 바꿔 들었다.
아까는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을 든 상태였는데 이번엔 손잡이가 너덜거리는 초라한 장검을 들고 섰고, 무기를 바꾸자마자 그의 몸 근처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계란이 양심이 종잇장이다. 그치, 겸아.”
“그런 편이긴 하죠. 어렸을 때 낮잠 자다 이불에 쉬해놓곤 저한테 뒤집어씌운 적도 있어요.”
사탕 누나가 눈을 크게 뜨더니 권경배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생각 없이 뱉은 불알친구의 흑역사를 모르는 척하고 권경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 경배야….
붉은 아지랑이를 뒤로한 채 힘껏 뛰어오른 권경배가 드래곤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반쯤 박힌 검을 든 권경배가 몸부림치는 드래곤 탓에 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화환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정확히 손잡이에 명중하며 드래곤을 관통해 벽에 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매캐한 화약 냄새, 동굴이 울릴 만큼 큰 비명소리. 그걸 끝으로 드래곤은 움직임을 멈췄다.
[드래곤하트가 파괴되었습니다! 히든:몬스터 페스티벌이 종료되었습니다! 유우 님께서 히든 던전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히든:몬스터 페스티벌-유우. 다른 헌터님의 던전 입장 시 입장료가 발생합니다.]
주인은 뭐고 입장료는 또 뭐지? 설마 여기가 내 하우징이 되는 건 아니지? 어색하게 사람들을 올려 보자 다들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숨겨진 히든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유우님의 파티 화환, 간계밥, 민초맛사탕, 장꾸 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집니다.]
[페르니아 입구 던전이 히든 던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히든 던전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클리어 해 보세요!]
-레벨이 올랐습니다. 42Lv 달성!
연이어 울리는 알림 창에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던 화환이 쪼그려 앉아 내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겸이 부자 돼도 형아 잊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또 헛소리네. 그런데 주인은 뭐고 입장료는 왜 받는다는 거예요?”
“히든 던전은 처음 발견하는 사람이 소유권을 갖거든.”
“입장료는 다음에 이 던전으로 들어오는 유저들이 내는 건데 꽤 쏠쏠해.”
“맞아. 기본 입장료가 현실 돈 만원 좀 넘지 않나? 입장료 때문에 히든 던전만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으니까.”
내 캐는 축캐가 분명했다. 우연히 찾은 히든 직업이 이렇게 사기급으로 운이 좋은 직업일 줄 몰랐으니 말이다. 그동안 착하게 살았기에 상을 주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들었다.
화환도 몇 개 가지고 있다며 아이템이 무자비하게 시장에 풀리지 않게 비활성화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 던전, 비활성화……. 처음 갖는 던전에 기뻐 차마 확인하지 못했던 채팅 창을 열자 세계, 길드 채팅이 엄청나게 와 있었다.
[세계]qwerty : 유우 겜사 직원아님?
[세계]해달병 : 킹리적 갓심.
[세계]시비충 : ↑이딴 소리하는 놈들 때문에 랭커가 피곤한 거임
[세계]해달병 :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계]qwerty : 궁금할 수 도 있지 왜 시비야 **아
[세계]시비충 : 분조장 오지죠? 맞는 말 한건데 혼자 급발진~
[세계]수족냉증 : 캐삭하고 다시 만든 거? 피안이랑 다니네.
[세계]인사 : 나 지금 초보마을 순회 도는 중인데 왜 한 번을 못 보지?
귓속말도 던전 몹이 뭐였냐, 같이 키우자며 추근거리는 사람들과 자기네 길드로 오라는 회유가 적절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아이디들이 물밀듯 눈에 들어왔고, 다 읽을 수 없을 만큼의 채팅이 쌓여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조용히 친구 외 귓속말 차단만 눌렀다.
[길드]수박맛사탕 : 눈이 나빠졌나. 왜 헛게 보이지?
[길드]푸름 : 아닌데 나도 보이는데..?
[길드]엔젤코코 :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장꾸 오빠 이름이 왜 보이는 거지?
[길드]빛과송금 : @@@히든 던전 템 비@싸@게@ 삽니다@@@
[길드]베르 : 초보 버스파티면 주인이 유우겠네. 보스는 뭐야?
[길드]수박맛사탕 : 초보 던전이잖아. 웜 아니면 모울이지.
[길드]장꾸 : 레드 드래곤이야...
길드 채팅 창이 얼어붙었다.
[세계]베르 : 히든 던전 보스가 레드 드래곤이라고?
[세계]베르 : 아, 실수요.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사탕 누나의 얼굴이 굳었고, 장꾸 형과 권경배가 작게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와, 씨발. 엿을 아주 제대로 먹이네?”
“베르 새끼 계속 저렇게 둘 거야?”
장꾸 형의 말 뒤로 사탕 누나가 굳은 얼굴로 화환에게 묻자 화환은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곧 포탈이 열렸으나, 그 누구도 던전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엄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좆 됐음을 말이다.
“겸이는 나가자마자 나한테 붙어서 잭한테 가고, 나머지는 알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
심각한 분위기에 다들 눈치만 살폈으며,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나도 화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안, 또라이 때문에 네가 고생이네.”
사탕 누나가 작게 속삭이기에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곧 다른 사람들이 파티를 나갔다는 알림이 울렸다.
[길드]유우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드]장꾸 : 형안데, 이정도로 뭘.
그놈의 형아…. 배낭을 확인하니 돈과 레드 드래곤의 핵, 가죽이며 각종 아이템이 새롭게 들어와 있었다.
부화기 답례라며 송금이 형에게 우편으로 보내곤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온 우편을 전부 되돌려 보낸 뒤, 우편도 거부해 놓았을 때였다.
갑작스레 덜렁 들린 다리에 놀라 버둥거리자 화환이 내 몸을 들어 품 안에 숨겨 잭에게 가고 있었다.
“길마님.”
“형이라고 해. 형아도 좋고.”
“둘 다 싫은데, 길마님. 예고 좀 하고 들어 올려요. 놀랐잖아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천천히 걸으래?”
“제가 지금 이렇게 작고 여리지만, 현실은 건장한 남자거든요?”
“그래봤자 180도 안 되는 아기 아닌가?”
이 새끼가?
“아뇨, 넘는 어른인데 사과하세요.”
“내 사과 비싼데. 진짜 180 넘는 거 보여주면 할게.”
“인바디라도 재서 보내라는 거야, 뭐야.”
“계란이가 얘기 한 해? 우리 정기 점검마다 정모하는데. 그때 나오면 되지 굳이 수고스럽게 인바디는 무슨.”
한참 투닥거리다 도착한 잭에게 퀘스트를 보고하자 이번엔 마을 남쪽에 있는 공원의 던전을 정리해 달라는 퀘스트가 들어왔다.
물론 던전 전에 공원을 더럽히는 새들을 정리해 달라는 게 먼저였다. 화환이 느긋한 걸음으로 공원으로 향했다.
“무릎 꿇을 준비나 해요, 꼭 나갈 거니까.”
“어떡하지. 설레서 잠도 못 자겠다, 자기야.”
“남은 시간 내내 밤잠 설치던가.”
“다다음 주 토요일인 거 알지?”
말문이 막혔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분명히 6월 초에 모였다고 했으니…. 아, 오늘이 20일이구나.
슥 눈을 피하는데 화환 놈의 손이 내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이제 와서 안 간다고 하기엔 자존심 상하겠지…?
“아, 자기야. 이번 퀘 못 하겠는데?”
화환의 시선이 닿은 쪽을 바라보자 사람으로 가득한 공원이 보였다.
“뭐야, 여기 신규 유입이 저렇게 많다고요?”
“그럴 리가. 일단 길드 성으로 갈까?”
하는 수 없이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원인 화환을 데리고 길드 성으로 이동했다. 길드의 연회실로 향했고, 연회실에는 푸름과 권경배 사탕, 수박 누나와 송금, 장꾸 형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겸이 퀘 안 하고 왜 여기 왔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그냥 앉아 있지.”
반짝이며 존재를 알리는 거래 창을 확인하곤 수락하자 송금이 형이 물건을 와르르 올리기 시작했다. 체, 마 회복 포션부터 내 레벨에 맞는 장비까지….
“송금이 형 이게 다 뭐예요?”
“선물. 그거 제작 템이라 던전에서 구하는 것보다 좋을 거야.”
진짜 받아도 되는 건지 몰라 거래 완료를 누르지 않고 주춤거리자 송금이 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편 확인했는데 부화기 보상이라기엔 너무 귀한 것들이라.”
맞아, 좋은 거라긴 했지. 거래 완료를 한 뒤 배낭으로 들어온 장비들을 착용했다. 순식간에 올라가는 체력과 마력에 놀라 꼬리가 절로 흔들렸다.
화환의 팔을 퍽퍽 때려 바닥에 내려온 뒤 송금이 형에게 달려갔다.
“장비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체력이랑 마력이랑 엄청 많이 올라요.”
발치에서 왔다 갔다 쉼 없이 얘기하자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래 신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 버튼을 눌렀다.
장비도, 포션도 빵빵했고. 또… 왠지 나중에 갚아야 할 것만 같아 모르는 척 귀만 벅벅 긁었다.
“겸아, 던전 더 안 돌아?”
수박 누나가 육포를 흔들며 물었다. 히든 던전이 돼서 좋긴 한데, 보스까지 가는 동안의 뜨거운 열기가 너무 힘들어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거기 다시 가도 초반에 리자드 나오죠? 그럼 거기 더워서 힘들어요, 누나.”
“내가 아이스 실드 쳐줄게. 이거 아무나 써주는 거 아닌데, 우리 겸이니까 해준다.”
“그럼 나는 업어줄게요, 형.”
푸름이 귀를 쫑긋거리다 내 앞으로 다가와 바닥에 앉으며 눈을 반짝였다. 던전 비활성로 나와 같이 가는 게 아니라면 입장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여섯 명을 채울 수 있나 확인하는데 베르가 들어왔다.
“다들 여기 있었네.”
“오셨어요.”
“여기서 뭐 해? 신입 도와주러 간다며.”
베르가 화환에게 다가가며 묻자 사탕 누나가 픽 하고 웃었다. 자기 때문에 퀘스트도 못 하고 여기 모여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저러는 게 퍽 우스운 모양이다.
“형 덕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쉬고 있잖아.”
“그럼 다들 할 거 없는 거지? 잘됐다. 나 가름의 요새 세 번만 돌아줘.”
저 정도면 미움받는 걸 즐기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귓속말]간계밥 : 아마 저 형 던전 돌아주러 갈 것 같은데 넌 혼자 뭐할래?
[귓속말]유우 : 전부 다 간다고? 나 오늘 메인 퀘 더는 못 밀 것 같은데..
[귓속말]간계밥 : 한명만 편애한다고 말 나오면 귀찮아서. 잠시만.
“한 시간 반짜리 던전을 세 번이나?”
“내일 일요일이잖아.”
“일요일을 굳이 형 때문에 피곤하게 시작해야 할 이유가… 있나?”
오… 권경배. 그래도 할 말은 다 하는데?
“아, 난 제작 의뢰 왔다. 잘 다녀와. 겸이 다음에 보자.”
“아, 네, 형, 장비 잘 쓸게요!”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송금이 형이 먼저 자리를 떴고, 조용히 있던 화환이 내 앞으로 다가와 거래 신청을 걸었다.
“자기야 거래 받아봐.”
수락하게 무섭게 경험치 던전 티켓(24시)이 올라왔고, 곧이어 내 배낭 안으로 넘어왔다.
“캐시템이라 저렙 땐 아까워서 안 쓰는 건데, 거기 가서 놀고 있어.”
“24시간 내내 사냥만 하라고요?”
“아, 오토 되니까 접종하고 놀다 와도 돼.”
“야, 너 어차피 히든 스킬 쿨이 24시간이라며. 거기 1인 던전이니까, 그거 갱신하고 더 커서 오면 되겠네.”
권경배는 천재인가? 근데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알려줄 것이지…. 게임 첫날 자본주의의 맛을 알아버린 것 같이 마음이 쓰렸지만, 가만히 티켓을 바라보았다. 24시간이면 현실 시간으로 거의 두 시간이지?
“여기 제일 으슥한 방이 어디예요?”
“설마, 고맙다고 뽀뽀라도 해주려고 그래? 그건 좀 부끄럽다.”
“또 미친 소리네… 오토 돌리고 내일 올 건데 재접 했다가 다른 사람이랑 마주치기 싫어서 그래요.”
대화 내용을 들은 건지 근처에 있던 베르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길마랑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건 얘기 들었는데 그냥 친해지는 게 아니라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하고 싶은 건가?
권경배가 또 커마 안 한 내 캐릭터를 설명하는 동안 베르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 예상한 대로 베르는 화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왠지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알아차린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권경배의 얘기를 들으며 킥킥대던 화환이 길드 마스터의 룸으로 초대해 주었다. 몇 번씩 뒤를 돌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바로 티켓을 찢자 초보 던전에서 보이던 몬스터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히든 스킬을 해제한 뒤 로그아웃한 후 밖으로 나왔다.
캡슐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오랜 시간 게임을 한 것 같았는데 현실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 탓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피곤이 밀려왔다.
꽤 오래 샤워를 했음에도 노곤함이 가시지 않았다. 물기 있는 머리를 말리곤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내일은 헬스장 등록하고, 가볍게 땀 좀 빼고 들어와야지.
생각보다 늦잠을 잔 탓에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온 시간도 많이 늦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을 줄이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권경배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사람이 놀라 까무러치는데도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뭐라고 한소리 하려던 찰나에 종이 가방이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뭐야, 미친놈아. 놀랬잖아.”
“너 다다음 주 정모 나온다며.”
“어…떻게 알았어?”
현관문을 열며 대답하자 권경배가 손에 든 종이 가방을 달랑거리며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런 건 형한테 먼저 말해야지, 볼 건 얼굴이랑 돈밖에 없는 주제에.”
“그거면 다 된 거 아닌가?”
“까까머리로 나갈 생각을 했다고? 야, 남자는 머리빨이라고.”
“모자 쓰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건 뭔데?”
“패스트 샴푸. 어젯밤에 시켜서 방금 받았지. 형아가 후기까지 잘 보고 고른 거니까 오늘부터 두 번씩 감아.”
“너도 또라이야?”
“됐고 나 이제 올라갈 거니까 점심 먹고 바로 접속해.”
[길드]수박맛사탕 : 겸이왔다! 겸이!
[길드]푸름 : 겸이 형 왜 이렇게 늦었어요. 우리 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점심까지 느긋하게 먹고서 게임에 접속하자 길드 채팅이 우르르 올라왔다. 어디 있냐며 찾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얼른 히든 스킬을 사용했다.
크긴 했나? 시야가 좀 높아진 것도 같고…? 확인해 보니 레벨이 그새 52나 되어 있었다. 24시간 내내 돌린 덕인지 생각보다 레벨이 더 높았다. 발걸음 가볍게 밖으로 달리다 길드 홀 소파 위에 누워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애초에 여기서 기다린 듯한 둘의 모습에 웃음이 먼저 났다.
“여기 있었어요?”
반가운 마음에 마구 달리자 두 사람이 주춤하며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착각인가? 왜 낯설지?”
“우리 애… 좀 큰 것 같지 않아?”
“그쵸? 한 반 뼘?”
푸름이 맞장구를 치자 수박 누나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원래는 손바닥만 했다며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진짜….
“스킬 업해서 큰 거예요.”
“우리 자기는 커도 귀엽네.”
고개를 돌리자 화환이 막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참자, 미친놈에게 대꾸해 봤자 같은 미친놈이다….
후다닥 소파 위로 뛰어오른 뒤, 배낭 안에 모셔뒀던 나르의 알과 부화기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형, 거기 중간에 알 넣는 거예요.”
푸름을 보곤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부회기 안으로 나르의 알을 넣었다. 곧바로 4시간 뒤 부화한다는 알림이 떴다.
[길드]빛과송금 : 겸이 할 거 없으면 던전 갈래?
기대 그득한 눈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도대체 레드 드래곤이 뭐길래 이렇게 다들 못 가서 안달이지?
“레드 드래곤이 그렇게 찾기 힘들어요?”
“드래곤은 레이드밖에 안 나오는데 거기도 원소 드래곤이 나올 확률이 극악이라 그래.”
“레이드?”
“응, 기본 30인 팟부터 갈 수 있는데, 레이드 티켓이 캐시템이라.”
그냥 귀하다는 거지? 무슨 말 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바로 푸름, 수박 누나와 송금이 형에게 파티를 걸었다.
[길드]유우 : 던전 도실 분 (4/6)
[길드]화환 : ㅅ
[길드]옥장판팝니다 : 손
[길드]민초맛사탕 : 앗, 우리 겸이 버프 줘야 강해지는데...!
[갈드]빛과송금 : 사탕아, 나 대신 갈래? 템만 팔아주면 양보할게.
“이렇게 파티해서 가면 아이템은 어떻게 해요?”
“원래 같으면 겸이가 받았겠는데…. 주인은 템 파밍이 안 돼.”
“맞아, 그래서 같이 가는 사람이랑 조율해서 가지.”
“아….”
길드 채팅을 보자 그냥 내게 버프를 주고 싶은 거라며, 템은 당연히 피안 길드의 빛과 소금! 송금 님에게 드릴 생각이었다고 사탕발림을 하는 사탕 누나가 보였다.
파티는 나 화환, 푸름, 수박, 사탕, 옥장판 님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화환의 도움을 받아 히든 던전으로 입장했다.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게 아이스 실드 덕을 좀 봐 쌩쌩하게 네 발로 걸어 이동할 수 있었다.
호화 멤버로 꾸려진 파티라 드래곤이 있는 곳까지는 금방이었다. 푸름이 드래곤의 공격을 막으면 수박 누나와 옥장판 님이 신이 나서 공격했다. 어느새 던전의 최종 보스인 드래곤의 피가 거의 바닥을 향해갔다.
던전 클리어 후, 다시 길드 성에 도착한 우리는 재미있었다며 한참을 종알거리다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옥장판 님은 다른 던전을 더 돈다며 나갔고, 대신 권경배가 들어오더니 나르의 알을 넣어둔 부화기를 확인했다. 누가 보면 자기 알인 줄 알겠네.
권경배는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다며 펫 먹이를 부화기 주변에 빙 둘러놓은 뒤, 설레는 눈으로 부화기만 살폈다. 가만히 있던 푸름이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그 옆으로 달려갔다.
조용히 앉아 있던 사탕 누나가 송금 형에게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을 보내고 무언갈 생각하는 듯 잠잠히 있다 입을 열었다.
“겸아, 저 던전 열거면 입장료 좀 올려야겠어.”
“누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탕 누나의 말에 청력 좋은 권경배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새끼인 양 부화기를 소중하게 양손에 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응. 솔직히 2배는 올려도 될 것 같은데.”
“2배면 한 번에 2만원이요? 그건… 너무 비싸지 않나?”
“너 레이드 티켓 그거, 캐시샵에서 얼마에 팔리는지 알아?”
“몰라.”
“3개 묶음에 39,000원. 이 가격인데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드래곤 드랍 템 얻으러 가는 게 가장 커.”
하긴, 드래곤 처치 보상을 송금이 형이 웃돈을 얹어가며 구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 그게 얼마나 귀한 아이템인진 알 것 같았다.
“그런 몬스터가 꼭 보스로 나와, 게다가 아이템도 뿌려. 그걸 팔면 기본 5-6만원 인데 해츨링 가죽도 이번 이벤트 코스튬 재료라 비싸거든.”
“맞아. 그런 것까지 따져서 어중이떠중이 걸러낸다 생각하면 2억에 열어도 될 것 같아.”
두 사람의 말을 듣곤 대답을 구하는 것처럼 화환을 올려보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이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뭘 놀래…. 히든 던전도 갖고 있대서 진짜 2만원이나 입장료를 받아도 되는 건지 확인한 건데.
“그럼 일단 한 시간만 열어둬 볼게요. 들어가는 사람이 없으면 입장료 낮추는 것도 생각해 보고.”
“그럼 내가 일등으로 겸이한테 용돈 줘야지.”
수박 누나가 순식간에 말을 끝내곤 사라졌다. 아마 던전에 입장하기 위해서 페르니아로 간 것 같았기에 웃음이 났다.
얼른 설정을 열어 내 던전 관리에 들어가 압장료를 조정했다. 던전 오픈을 하자 바로 수박맛사탕님이 입장료를 냈다는 알림이 왔다.
뭔가 놀고먹는 백수에게 들어오는 용돈 같아 기분이 조금 묘했다. 10분 정도 흐르자 다시 한번 다른 누군가가 던전에 입장했다는 알림이 떴다.
“와, F3412가 던전에 입장했대요. 어떻게 알았지?”
“딱 보니까 매크로네.”
“아, 나 그거 아는데… 랄라세일 펫 아니야? 송금이 경쟁사.”
“겸아, 던전 비활성화 해. 얼른.”
권경배의 말에 빠르게 비활성화를 했을 때였다.
[세계]랄라세일 : 유우님 던전 갑자기 비활성화 하시면 어캐여... 제 펫 쪼렙이라 깨지도 못하는데 ㅜㅜ
[세계]테라먹는하마 : 랄라님 던전 열렸음? 제일 먼저 알려주신다면서요.
[세계]테라먹는하마 : 1억 돌러주셈.
[세계]랄라세일 : ** 꼭 어중이떠중이 새1끼들이 인내심 *도 없이 **이지 ** 님 차단!
“와, 돈 받고 던전 알림이도 해주나 봐요.”
세계 채팅을 확인한 화환이 내 몸을 안아 올려 소파 위에 앉은 뒤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이번만… 참는 거다. 경험치 던전 티켓 줬으니까.
“입장료 잘 올렸네. 알림만 하는데 1억이라는 거 보니.”
“그런데 펫도 던전에 혼자 입장 가능해요?”
“랄라 펫이 꼭두각시라 가능할걸.”
“엄청 좋은 펫이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들어온 2억의 돈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이게 현실 돈으로 2만원 이라는 거지?
살랑살랑 꼬리가 흔들리자 얌전히 머리를 쓸어주던 화환이 내 꼬리를 잡아 주물주물했다. 돈이 들어오니 마음까지 풍족해진 기분이었다. 그냥 두었더니 화환의 손이 천천히 등허리로 올라왔다.
“길마님 저리 좀 가요, 귀찮게 하지 말고.”
“우리 겸이가 하지 말라니까 더 귀찮게 하고 싶은데.”
“와, 성격 나쁘다는 말 많이 듣죠?”
“아니.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어. 예의 바르다, 성격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
얼굴에 철판을 몇 겹이나 깐 건지. 자기 입으로 본인 칭찬을 저렇게 하는 걸 보니 아마 스스로를 되게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사탕 누나가 들으란 듯이 픽 웃었지만, 자기애에 심취한 화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기애가 넘치네.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러워요?”
“자기도 이제 인정하는구나. 내가 겸이 자기인 거.”
“아, 또 헛소리야.”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바닥으로 착지한 후 털을 곤두세웠다. 어제 못한 메인 퀘나 밀어야지.
권경배에게 나르가 부화하면 알려 달라고 한 뒤 페르니아 남쪽 숲으로 향했다.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나를 진짜 펫으로 착각한 건지 이상하게 계속 먹을 걸 건네줬다. 배낭 안이 음식으로 가득 찬 것만 빼면 괜찮은 시작이었다.
이번 퀘스트는 잭의 고양이를 찾는 것이었다. 공원에 성격 나쁜 쥐들이 있어 겁을 먹고 숨어있을 것이라며 무사히 데리고 와달라고 했는데, 이건 고양이 찾기가 아니라 쥐잡기가 옳지 않나 싶을 만큼 쥐가 많았다.
헥헥거리며 사냥을 마치자 어디선가 야옹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무 위를 올려보자 얇은 가지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는 하얀 고양이가 보였다.
쥐가 무서워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불쌍해 보여 얼른 남은 쥐를 잡은 뒤, 아까 그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겨우 바닥을 딛고 내려온 고양이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역시 고양이는 옳구나…. 잭에게 무사히 고양이를 데려다준 뒤 받은 두 번째 퀘스트는 공원 아래 있는 하수구 몬스터 처리였다.
이제는 이런 더러운 일까지 시키는 건가? 체념과 함께 터벅터벅 길을 따라 걷는데 모르는 사람 두 명이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섰다.
“봐, 진짜 있잖아! 늑대.”
“미친. 펫으로 만들려면 호감도 올려야 되죠? 이거 비싸게 주고 산건데….”
“근데 얘 아무것도 안 뜨는데? 이름이나 레벨도.”
“왜? 그럼 안 돼요?”
“어, 주인 있는 펫일걸. 주인이 비공개로 설정해둔 거지.”
뭔 소리야. 한 명이 내 앞에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았다. 그걸 슬쩍 챙겨 서둘러 공원으로 가려는데, 둘 중 키가 큰 남자가 내 배를 손으로 감싸 안아 올리더니 바로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그냥 데려가면….”
“안 되지, 그러다 괜히 싸움 난다. 놔 줘. 얘도 싫어서 버둥거리잖아.”
데려가다니 말로만 듣던 납치인가? 싶어 있는 힘껏 몸을 비틀다 결국 고개를 숙여 남자의 손을 물어버렸다. 놀란 듯 화들짝 나를 털어낸 덕에 무사히 땅에 착지할 수 있었고, 발바닥이 땅에 닿자마자 달려 둘에게서 멀어졌다.
앞으로 조심해서 다녀야겠다. 매번 달랑달랑 들리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갇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