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게임을 시작했는데요? (1/11)

@브로콜리

1. 게임을 시작했는데요?

“아, 유우겸. 내 소원이라니까. 한 번만 같이 해주라.”

“싫다니까. 경배야, 현실을 게임만큼 집중해서 살아봐. 그 정도면 너 성공해.”

“아니 너 우진 형이 캡슐도 선물 줬다며.”

제대한 지 이 주가 지난 지금까지 게임 한번 하자며 징징거리는 소꿉친구를 모질게 내치던 어깨가 움칠 떨렸다.

“어떻게 알았어?”

공부만 죽어라 판 덕에 형들과 똑같은 대학에 무리 없이 입학하게 되었지만, 목표를 이루고 나니 공부에 대한 의욕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1년을 겨우 다니다 군대로 가버린 동생이 안쓰러웠는지 작은형이 당분간 쉬면서 취미로 해보라고 사 준 게 그 캡슐이었다.

“택배 오는 거 봤지.”

“어쩐지, 그거 보고 이렇게 징징거리는 거지?”

“아, 딱 일주일만 해 봐. 지금 이벤트로 신규 유저랑 파티해서 들어갈 수 있는 보물섬도 열렸다고.”

거실 소파에 길게 눕자 권경배가 따라와 옆에서 쉼 없이 조잘거렸다.

덩치도 큰 놈이 이렇게 엄마 따라다니는 오리같이 굴 때면 늘 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얘기 지금 10번 넘게 들었는데. 최고 보상이 히든 직업 티켓이라며.”

“어뉴어 진짜 이번 5주년 이벤트에 신규 모집하려고 칼 갈았다니까. 히든 직업 우리나라 서버에도 서른? 정도밖에 없는데 그 티켓 뜬 거 팔면 거짓말 아니고 너 집 한 채 살 수 있다.”

권경배의 집은 바로 윗집이다. 그리고 그 아랫집은 원래 큰형 부부의 신혼집이었으나,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쯤 해외로 나가 빈집이 되었다. 학교랑 거리가 워낙 가까워 이 집에 잠시 살기로 했는데, 큰형이 아예 졸업할 때까지 마음 편히 쓰라고 내어줬다.

“……진짜 딱 일주일만 하는 거다.”

“일주일이 일 년이 되지. 나 그럼 올라간다. 핸드폰 연동해 놨으니까 너도 하고 연락해.”

위층으로 올라간 권경배가 메시지로 쉼 없이 빨리 오라 보채며 쪼아댄 탓에 대충 세팅을 마친 후 캡슐 안으로 몸을 넣었다.

‘환영합니다, 여행자님. 새로운 모험으로 이동을 도와드릴 ‘디유’라고 합니다!’

조막만 한 솜뭉치가 허공에 둥둥 뜬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어깨 위로 올라와 앉았다.

“아, 응. 이제 뭘 하면 돼?”

‘신규 여행자님이시군요! 생체 등록을 시작합니다. 5…4…3…2…1…….’

‘완료되었습니다! 어뉴어에서 불릴 이름을 설정해 주세요.’

갑자기 눈앞으로 투명한 키보드 모양이 떠올랐다. 아이디를 만들라는 거겠지? 가끔 권경배가 이렇게 부탁할 때마다 지었던 이름을 입력했다. 다행히 중복되지 않고 한 번에 만들어졌다.

출시한 지 5년이 지난 ‘Hunter : A New Adventure ’. 줄여서 ‘어뉴어’라고 불리는 이 게임은 출시와 동시에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커다란 세계관 속 자신이 성장하는 대로 직업도 함께 다듬어지는 진짜 성장형 게임으로, 완성도 높은 OST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마저 게임에 접속한다고 했었다.

지겨울 만하면 나오는 히든 스킬과 히든 던전도 모자라다는 듯, 이제는 히든 직업까지 나와 유저들의 마음을 들쑤시는데. 던전에 들어가다 그냥 지나가던 고양이를 쓰다듬다가도 얻을 수 있었기에 공개 초기엔 온갖 해괴한 짓을 하는 유저도 있었다고 했다.

3년 전부터는 현실의 화폐로까지 거래가 활발하게 되어, 게임의 랭커들이 히든 던전만 찾아 희귀 아이템으로 돈을 번다는데 그게 최근엔 꽤 큰돈이 된다고 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입만 열면 어뉴어 얘기를 한 권경배 탓에 쓸데없는 지식만 잔뜩 늘은 것 같다.

아무튼, 스트리머와 영향력 있는 유명 연예인들마저 취미를 물으면 어뉴어라는 말이 10에 8은 나온다니 말 다 했지, 뭐.

어뉴어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가상 현실 게임 중 늘 정점에 서 있었다. 저물어가는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타이틀을 건 신문이 나왔지만, 그것도 어뉴어만은 예외일 만큼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나 뭐라나.

초반엔 제작자와 헌터,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었는데 헌터를 고르자 투명한 색의 여러 가지 문양이 곧이어 떠올랐다.

방패, 검, 지팡이와 십자가 모양이었는데 권경배가 가고 싶다는 보물섬이 어떨지 모르니 일단 무난한 원딜이 좋을 것 같아 지팡이를 골랐다. 그러자 디유가 손도 없는 주제에 박수 소리를 내며 내 어깨 위에서 폴짝거리며 뛰었다.

‘유우 님이시군요! 이제 커스터마이징으로 이동하실 차례예요!’

‘어뉴어는 총 세 가지 종족으로 나뉘는데 인간, 수인, 하늘 종족이 있어요. 하늘 종족은 3차 전직 때 천족과 마족으로 나뉘는데, 유우 님은 어떤 종족이 좋으세요?’

“제일 적은 종족이 뭐야?”

‘적은 종족을 찾으시다니…! 유저들의 선택이 가장 많은 건 하늘 종족인데, 날개가 있어 자유롭게 날 수 있어서 아주 인기 있는 직업이랍니다! 반대로 가장 수가 적은 종족은 수인이며, 그들은 전투 민족답게 전투에 능합니다!’

“그러면 그냥 인간.”

‘네! 헌터님, 외형은 이쪽 바를 사용하셔서 다듬으시면 되세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일부러 중간쯤 되는 종족을 골랐다.

그나저나 이 게임은 시작하기도 전에 할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바로 앞에 백색 튜닉을 입은 나와 똑같이 생긴 캐릭터를 보다, 머리와 눈 색만 바꾸곤 완료를 누르자 커다란 문이 열렸다.

‘헌터님의 새로운 여정을 응원하는 디유였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모험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신기하게도 밖으로 한 걸음 내딛음과 동시에 디유가 사라졌다.

[Hunter : A New Adventure 32번 채널로 입장합니다.]

[환영합니다, 헌터님! 신규 유저 버프로 경험치 획득률이 200% 상승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푸른 하늘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었고, 아래로 난 작은 오솔길엔 질서 없인 피어 있는 꽃들임에도 하나같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초보자 마을 레피넬에서 길란을 찾아가세요.

“어, 유우겸.”

연달아 뜬 알림을 읽는데 옆에서 권경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며 내게 말을 건 사람을 찾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흑발의 긴 머리를 하나로 내려 묶은 큰 남자는 피부까지 검정에 가까울 만큼 어두웠는데 눈은 잿빛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가 입꼬리를 삐죽 올려 웃었다. 입술 사이 뾰족한 송곳니 두 개까지. 저게 마족의 기본 외형인가? 발끝까지 오는 검은 코트 안으로 살짝 보이는 검 두 자루.

낯선 모습에 뒤로 주춤 물러나자, 상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권…경배?”

“야 이 미친놈아. 너 커스텀 안 해?”

“아, 귀찮아서. 그래도 색은 바꿨는데.”

“그게 커스텀이냐고.”

권경배가 왼쪽 허리에 걸린 작은 배낭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저게 인벤토리라고 했지? 내 배낭으로 똑같이 손을 넣자 눈앞으로 네모난 창이 떠올랐다.

오, 이렇게 뜨는구나…

“일단 이거 끼고 다녀.”

권경배의 손에 들린 건 검은색 마스크였다. 이런 건 왜 들고 다니는 거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마스크를 받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야, 어차피 일주일만 할 건데 왜 유난이야.”

“일주일 할지, 일 년을 할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맞는 말이라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건 그렇지. 나도, 권경배도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죽어라 파대는 편이었다. 나는 공부에, 경배는 게임에 빠진 탓에 지금 이 모양이긴 했지만.

녀석의 말처럼 혹시 모를 일이니 얌전히 마스크를 낀 후, 방금 배낭에서 봤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캐스터야?”

“일단은. 보물섬인지 거기부터 갈 거야?”

“아니, 거기 12부터 입장 가능이라. 일단 퀘부터 가자.”

권경배가 퀘스트 내용을 다 안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나저나 흰 튜닉에 검정 마스크라니……. 달고 있는 얼굴이 실제 내 얼굴이라 그런지 조금 부끄러웠지만, 이걸 사실대로 말하려니 자존심이 상해 조용히 발만 움직였다.

“저기 길란 보이지? 가까이만 가도 말 걸 거니까 다녀와.”

‘길란’이라는 이름이 머리 위에 적혀 있는 NPC의 앞으로 다가가자 녀석이 과장된 몸짓으로 내 옷자락을 잡아채며 울먹이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헌터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당장 내일이 결혼식인데 준비한 반지를 남쪽 숲의 솜토끼가 물고 갔지 뭡니까…! 신부가 토끼풀을 좋아해서 그 꽃을 구하러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말입니다!

[길란의 퀘스트 1]

-남쪽 숲 솜토끼들에게 빼앗긴 반지를 되찾아 주세요.

별말 없이 퀘스트 수락을 누르자, 감사하다며 훌쩍임과 함께 떨어진 길란이 다시 제자리로 향했다.

“이거 좀 부담스럽다.”

“넌 좀 그렇겠다.”

섬세한 성격이라 그렇다고 한마디 해주려던 걸 참곤, 왼쪽 위의 지도에서 물음표가 찍힌 곳으로 향했다. 퀘스트 지역에 다다를 때쯤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야, 나 공격 스킬 하나도 없는데?”

“그거 원래 20까지 손으로 때려잡아야 해. 그래도 길란 부탁만 3번 들어주면 15 정도 되니까 빨리 가자.”

…….

권경배는 꼭 저 같은 게임을 하는구나.

얼마쯤 걸었을까, 남쪽 숲은 멀리서 봤을 땐 사람이 많아 보였는데 도착하고 나니 금세 반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 여기 몬스터들이 리젠되는 시간이 빨라 금방금방 잡고 가는 거겠지?

「길란의 결혼반지」

사람 상체만 한 하얀 솜토끼를 다섯 마리 정도 잡으니 퀘스트 아이템이 저절로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맨손으로 때려잡기엔 미안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이름대로 솜이불을 내려치는 폭신한 기분이었다. 나름 재미있어 팡팡하는 소리를 내며 때리다 보니 레벨은 벌써 6을 가리켰다.

“이거 좀 재미있다.”

“신나게 때리는 것 같아 보이긴 하더라. 여기, 두 번째 퀘 아이템. 빨리 다녀와.”

권경배가 준 건 토끼풀 다섯 개였다. 어쩐지 아까 토끼풀 어쩌고 얘기하더라니. 생각보다 뻔한 전개에 고맙단 말을 한 뒤 마을로 향했다.

길란에게 다가가 먼저 반지를 건네자 뛸 듯이 기뻐하더니 이내 조심스레 토끼풀을 구해 달라고 했다. 바로 퀘스트 수락 버튼을 누르고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토끼풀을 건네자 길란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좋지 말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건데요?”

-솜토끼들의 왕이 반짝이는 걸 아주 좋아해 그걸 훔치기 위해 마을로 내려와 곤란하답니다…. 그들의 왕을 처치해 주세요.

솜토끼의 왕이라면 왕솜토끼쯤 되는 건가? 나는 얼른 수락을 누른 뒤, 권경배가 기다리고 있는 숲으로 달려갔다.

“야, 왕을 잡아 달라는데 무슨 토끼가 반짝이는 걸 좋아해?”

“토끼가 아니니까 그렇지.”

“어이없네. 토끼굴에 그럼 누가 사는데?”

“…까마귀.”

어어, 까마귀가 반짝이는 걸 좋아하긴 하지.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권경배의 뒷모습만 보며 걷다, 레벨을 알리는 부분이 반짝이며 11이 되어있는 걸 뒤늦게 확인했다.

“여기 레벨 업 너무 후한 거 아니야? 벌써 11이네.”

“그 말 나중에 후회한다, 너.”

“쪼렙이라 빨리 오른 거? 넌 몇인데?”

“250. 야, 저기 풀숲 우거진 데 검은 애 보이지?”

권경배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솜토끼보다 조금 더 큰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도대체 왜 까마귀가 토끼의 보스인 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흐름에 눈만 깜빡이다 얼른 가까이 가 유일한 무기인 지팡이로 내려쳤다.

솜토끼 때와는 다르게 한 대 맞을 때마다 별 모양 이펙트가 뜨며 99라는 대미지 숫자가 반짝였다.

“유우겸 존나… 잘 팬다. 너 그냥 파이터나 하지.”

멀리서 구경 중인 권경배를 노려보다 날아오르려는 듯 날개를 펼치는 몬스터의 날개 부분을 내려쳤다. 녀석은 듣기 싫은 비명을 끝으로 검게 물들어갔다.

“이건 보고하러 안 가도 되니까 퀘스트 창에서 완료된 거 확인하고 보물섬이나 가자.”

“나 15 맞췄네. 빨리 가보자. 히든인지 뭔지 그거 궁금하니까.”

“겸아, 히든 티켓 하나밖에 없어. 그건 1등 상품이니까 기대하지 말고. 새로 나온 코스튬이나 노리자.”

“보상이 히든 직업 티켓이라며. 근데 그냥 보상이 아니라 1등 보상이라고?”

“응.”

오늘도 건재한 양아치 새끼의 인성에 지팡이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함박웃음을 지은 권경배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가자, 겸아! 나한테 파티 걸고, 왼쪽 위에 지도 안에서 보물섬 눌러서 파티 이동해.”

양심 중동 간 새끼…. 꼬실 땐 당연히 히든 직업을 받는 것처럼 얘기하더니.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보물섬은 한 번 가보고 접고 싶었기에 나는 권경배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도착한 곳은 누가 뭐래도 휴양지였다. 커다란 야자수와 새하얀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중간중간 낮은 건물과 수영복을 입은 NPC들까지.

여기가 정말 보물섬이라고? 권경배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은 건지 눈을 크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손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야, 저기.”

권경배가 가리킨 곳에는 모험가 복장을 한 사람이 난처한 얼굴로 동굴 입구같이 생긴 던전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사람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얌전히 서 있던 사람이 구명줄을 붙잡듯 권경배의 팔을 잡았다.

-헌터님이시죠?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안경 쓴 NPC가 긴장한 듯 잔뜩 언 얼굴로 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 퀘스트를 주는 사람들은 전부 길란 같은 사람만 있네.

“무슨 일이세요?”

-몬스터 때문에 저희 스승님의 보물이 저기 안에 떨어졌지 뭐예요…. 가장 먼저 발견하는 보물은 하나 그냥 드릴 테니 남은 걸 찾아서 와주세요.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보상을 드릴게요!

…진짜 보물섬은 이곳인 것 같은데. NPC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면 오른쪽 위로 ‘60:00’이 떠올랐다. 동시에 풍경이 순식간에 변하는가 싶더니 웬 정글 숲 한가운데였다.

“여기 시간제한 있나 본데?”

“응, 60분.”

권경배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몬스터에 서둘러 무기라 부를 수밖에 없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민들레 홀씨의 확대 버전인 적은 내게 맞기도 전 권경배의 검에 두 조각이 났다.

“여기 초보랑 같이 입장해서 그런지 몬스터가 약하네.”

배낭을 뒤적이던 권경배는 이제 나도 잡을 수 있을 거라며 거래를 걸어 체력 포션 200개 건네주었다. 찢어져서 찾아보다가 30분 뒤에 모이자는 말은 덤이었다.

“혹시 내가 먼저 연락하면 여기로 와, 꼭.”

“알겠다니까.”

권경배를 보내곤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숲을 탐색했다.

보물은 어떻게 생긴 거지? 그냥 아무거나 만져보면 되려나? 안일한 생각과 함께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한 번씩 쓰다듬으며 길을 걸었다.

[삼촌 님께서 보물–신규 유저 환영의 꽃다발을 획득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세계]삼촌 : ** 쓰레기 팝니다.

[세계]빛과송금 : 삽니다. 제시 귓.

[세계]효녀시24시 : 송금님 왜 쓰레기 템만 사요?

[세계]빛과송금 : 영업 비밀^.~

[세계]세신청세신사 : ** 세기말이모티콘아재곱게 늙어야지스트레칭도좀하고바깥세상이랑소통좀하고살아여

[세계]시비충 : ㅆ1ㅂ 님은 띄쓰좀 하고 사세요 누가 누굴 지적함 ㅉㅉ

잡템도 판매가 되는구나. 조금 더 신경 쓰며 주위만 돌고 있는데 익숙한 아이디가 세계 알림에 떴다.

[간계밥 님께서 보물–피서지 세트(치장)을 획득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권경배였다. 아직 6월이라 이른 계절감이 느껴졌지만 어떻게 구한 건지 궁금해 물어보려 할 때 귓속말 채팅 창이 반짝였다.

[귓속말]간계밥 : 아, 망했네. 반짝거리는 거 만져봐. 그게 보물이더라. 너도 찾으면 만나서 보물이나 찾으러 다니자.

[귓속말]유우 : 아니 반짝이는 게 없는데? 나 여태까지 다 만지면서 걸었어.

[귓속말]간계밥 : 앞만 보지 말고 아래도 보고 하늘도 좀 봐 우겸아. 난 방금도 하나 찾았어.

[귓속말]유우 : ㅇㅇㅗ

재수 없는 새끼…. 녀석한테 귓속말로 대답하다 길을 잘못 든 모양인지 시력이 좋아질 만큼 초록 배경만 이어졌고, 나 대신 다른 유저들의 보물을 찾았다는 알림만 연달아 떠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끝나면 쫓겨나려나? 일부러 사람들이 가지 않을 법한, 험하고 으슥한 풀숲을 파고들었을 때였다. 드디어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반짝이는 빛이 하나씩 보였다.

백색과 금색 중 잠시 고민하던 나는 얼른 황금색의 반짝이는 무언가 쪽으로 걸어갔다.

[귓속말]유우 : 너 반짝이는 거 무슨 색이었어?

[귓속말]간계밥 : 반짝이는 게 색이 있나...? 그냥 반짝이.

권경배의 대답이 내 생각에 확신을 주었고, 누가 먼저 잡을까 걱정이 되어 달려가 낚아채자 주변으로 강한 빛이 일었다.

[유우 님께서 보물–히든 직업 카드(랜덤)을 획득하셨습니다! 보물찾기 1등 보상이 갱신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세계 알림은 물론 세계 채팅 창과 내 귓속말이 연달아 울렸다.

[세계]간계밥 : ㅊㅊ

[세계]뱌미 : 삽니다.

[세계]고양이가세계를 : ㄹㅇ 저게 나오는 거였음?

[세계]민초맛사탕 : 피안 길드로 초대합니다.

[세계]숙취엔견디셔 : 악동 길드로 모십니다.

[세계]매난죽순 : 악동 지금 박캇씃한테 개털리는 중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

[세계]천연발효효자 : 니마 안 쓸 거면 저한테 파셈. 돈은 없지만... 충성을 다하겠음.

[세계]6뚱땅이9 : 그거 세계당 하나 나온다는데 ** 개축캐네.

사겠다는 말과 어디냐며 지금 여기로 오겠다는 말들이 읽을 수 없을 만큼 올라왔다. 얼떨떨한 얼굴로 배낭을 열어 아이템을 확인하자 ‘거래 불가’라는 빨간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이렇게 내 집 마련의 꿈이……. 권경배는 양아치가 아니라 개새끼인 걸까? 부모님은 친절하신 분인데 혼자만 멍멍이로 태어날 수 있나.

때아닌 탄생의 신비를 생각하며 바로 연동시켜둔 핸드폰을 열어 권경배와의 메신저 창을 열었다.

[ㄹㅇ 너라고?]

[색깔 물은 게 이것 때문이었냐?]

[미친 너 어디야.]

[아니다, 아까 있던 데로 ㄱㄱ]

[야... 귓속말 거부 어떻게 하냐?]

[개새끼야 그리고 이거 거불이잖아. 나 놀림?]

[ㄹㅇ? 거불인줄 몰랐지 ^^! ㅈㅅㅈㅅ~]

아까 그 장소로 가기 전 얼른 하나 더 남은 보물을 눌러 인벤토리로 넣자 ‘탐험가가 흘린 보물’이라 뜬 반짝이가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보상으로 받지 못한 보물이 이렇게 뜨는구나. 감탄하며 걷는데, 분명 이 길 같았는데. 이상하게 한참을 걸어도 권경배와 헤어졌던 나무가 나타나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걷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가만히 서 권경배를 기다렸다. 걔는 내가 어디에 숨어있든 귀신같이 찾는 친구였으니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경배가 내 눈앞으로 말 그대로 떨어져 내려왔다.

“설정 들어가면 귓속말 설정하는 거 있으니까 일단 친구 귓속말 받기만 켜고, 아이디도 비공개해 얼른.”

“했어. 야, 나 이제 어떡해? 일주일만 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거 키울래?”

“어뉴어는 대리 안 돼, 멍청아.”

“그럼 어쩌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랭커를 노리자.”

“나 혹시 너한테 실수한 거 있냐? 이거 지능적으로 엿 먹이는 거지?”

“설마, 네가 그 보상을 딸 줄 알았나. 일단 20분 정도 남았으니까 얼른 남은 것도 찾고 나가자.”

이번엔 같이 보물을 찾아다녔는데, 이상하게 혼자 있을 땐 보이지 않던 반짝이가 권경배와 걸으니 곳곳에 나타났다.

남은 시간 동안 나는 7개, 권경배는 12개의 보물을 찾아냈을 때, 숲에서 퇴출당해 눈 깜짝할 새 퀘스트를 준 NPC 앞으로 이동되었다.

-이렇게 많이 찾아오신 건가요? 보상으로 두근두근 보물 상자(5등급)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럼, 어뉴어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제 할 말을 마친 NPC는 빠르게 사라졌고, 우리는 권경배의 하우징으로 이동했다.

“야, 일단 그 티켓 써봐.”

“너무 세져서 유명해지면 어쩌지?”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정신 나갔네. 무슨 직업 나올지 모르니까 일단 써봐.”

고개를 끄덕이곤 배낭 안의 티켓을 꺼냈다. 절취선이 있는 곳을 찢자 곧이어 환한 빛이 퍼지며 세상이 흐려졌다.

[축하드립니다! 유우 헌터님께서 히든:수인 웨어 울프를 획득하셨습니다!]

귓가를 울리는 경쾌한 말소리에 눈을 번쩍 뜨자, 권경배의 하우징은 온데간데없고 웬 나무들이 즐비한 숲 한가운데였다. 이거 아까도 겪었던 일인데….

번쩍, 알림을 나타내는 친구 채팅 창을 누르려다 엉덩이 뒤, 살랑이는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고개를 돌리니 눈을 의심케 하는 짙은 남색의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미, 미친…! 수인은 다 이런 걸 달고 다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수리 부근으로 손을 옮기자 있어선 안 될 털 뭉치가 손에 걸렸다.

[귓속말]간계밥 : 수인?

[귓속말]유우 : ㅇ... 야. 여기서 수인이 꼬리랑 귀 달고 다니냐?

[귓속말]간계밥 : 와 ㅅㅂ... 유우겸 존나 극혐인데... 너 커스텀도 안 했잖음

[귓속말]유우 : 나 지금 렙도 1이야. 다 초기화됐네

[귓속말]간계밥 : 일단 ㅇㄷ? 구경 가능? 너 위치 ???로 뜨는데.

왼쪽 위에 뜬 지도를 확인하자 ‘숨겨진 수인 왕국’이라는 글과 조금 떨어진 곳에 퀘스트를 알려주는 느낌표가 보였다. 히든 직업이니 아마 따로 튜토리얼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귓속말]유우 : 몰라. 눈 뜨니까 숲인데? 나 튜토리얼부터 다시 해야 하는 듯.

[귓속말]간계밥 : 다하면 얘기해. 수인 히든 직업은 첨이라 궁금하대.

누가 궁금해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는 답을 해주곤 지도를 따라 걸었다.

느낌표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가자 갑자기 스킬 창이 활성화되었다. 놀란 것도 잠시 반짝이는 스킬 명을 확인했다.

[강림]

- 웨어 울프의 본모습으로 돌아간다. 스킬 해제 시 24시간 이후 사용 가능. 체력 0.5%, 방어력이 0.5%가 상승, 스킬 쿨타임이 2초 감소됩니다. / 히든 특성으로 해제하기 전까지 스킬 사용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아마 웨어 울프 본체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스킬을 활성화하자 귀여운 효과음이 들렸고, 갑자기 시야가 확 낮아졌다.

무심결에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마치 어제 태어난 듯한 조그만 발바닥이 보였다.

다행인 건 아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위가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바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퀘스트를 받는 곳으로 걸었다. 아직 안 봤다. 나는 멋진 늑대일 뿐이다….

-오랜만의 손님이네. 아가, 가까이 오렴.

눈동자가 하얗게 변한 거북이가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큰 몸집도 걸걸한 목소리도 무서웠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편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저 아세요?”

생각보다 불퉁하게 나간 말에 움찔하니, 거북이가 씩 웃으며 제 팔보다 긴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내가 기다리던 마지막 남은 별의 아이지.

히든 클래스를 얘기하는 건가? 가까이 다가가자 약초 향 가득 밴 연기를 내 얼굴로 내뿜었다. 지금 거북이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이렇게 작고 약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껄껄 웃던 거북이 찌푸려지는 내 미간을 펴주기라도 하는 듯 문질렀다. 얼굴만 한 손 탓에 몸은 뒤로 넘어갔고, 그걸 본 거북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나도 이럴 줄 알았나. 그렇다고 작고 약한 제가 바로 앞에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딨어요.”

-벌써 불만인 건가? 오랜만의 손님이니 심부름을 부탁하려 했는데.

“이거 튜토리얼 아니었나? 웬 심부름?”

-요즘 아이들은 얼굴이 너무 두꺼워. 쉬이 얻은 귀한 것은 그 무엇보다 빠르게 사라지는데 말이야. 저기 보이는 언덕에 딜러슨 이라는 인간이 살지. 그 집의 귀한 꿀을 탄 차를 마시고 싶으니 두 시간 안에 다녀오도록 하게.

“도둑질하라고? 그건… 범죄잖아요.”

-이걸 가져가렴. 너를 의심하는 일은 없을 거야.

거북이가 걸고 있던 자신의 목걸이를 내게 걸어주었고, 착용하기 무섭게 지도 아래로 퀘스트 창이 활성화되었다.

적정 레벨이 12인 걸 보니 가면서 부지런히 레벨을 올려야 할 것 같은데, 무려 시간제한도 있었다. 벌써 줄어드는 시간에 하는 수 없이 거북이의 손이 향한 곳으로 달려나갔다.

[귓속말]유우 : 야 수인 튜토리얼 *같네 처음부터 타임 어택 있고 난리야.

권경배의 대답이 도착한 건 이마에 큰 뿔 하나가 박힌 스톤레빗이라는 몬스터 무리를 만난 직후였다.

[귓속말]간계밥 : ㅋㅋㅋ

[귓속말]간계밥 : 수인 튜토리얼인 척하는 퀘 1차, 각성해야 끝난다는데?

[귓속말]유우 : 아니 ** *망직업...

온갖 비웃음은 다 날리는 권경배의 채팅을 무시한 채 달려드는 몬스터를 무작정 쳐보았다.

분명 손으로 친 것 같은데. 때리고 보니 내가 놈들의 귀를 앙앙하고 물어대고 있었다. 해괴한 행동에 주춤하는 순간 열댓 마리의 몬스터가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몬스터의 집중공격을 받아 체력이 반이 넘게 닳아버렸다.

그때, 스킬 창이 열리더니 곧이어 스킬 세 개가 나타나며 연달아 반짝였다.

[프로텍트]

-자신과 파티원 주변에 90초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리커버리]

-타겟팅 한 사람의 체력을 6,000 회복합니다.

[퍼펙트 리커버리]

-모든 파티원의 체력을 4,000 회복합니다.

“뭐 이런 좆같은….”

공격 스킬도 아닌 힐 스킬만 줄줄이 뜬 창을 노려보다 일단 리커버리와 프로텍트를 시전했다.

웨어 울프라며. 공격 스킬 하나 없이 힐러 스킬만 가득 있는 스킬 창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퀘스트는 끝내야 했기에 남은 시간을 알리는 프로텍트가 끝나기 전 무리에서 떨어진 스톤레빗에게 달려가 목덜미를 물었다.

-급소 공격으로 ‘스톤레빗’이 즉사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Lv 달성!

목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몬스터에게서 입을 떼어내자, 배낭 안으로 아이템과 동전이 들어왔음을 알리는 알림이 떴다.

새로운 공격법을 터득했다는 뿌듯함에 자동으로 들어온 아이템만 대충 확인한 후 서둘러 몬스터 무리 쪽으로 달렸다.

급소만 노리고 공격한 결과, 내가 지나온 발자국 위로 검게 물든 스톤레빗의 시체가 한가득했다.

레벨은 벌써 7을 달성한 상태였다. 이렇게 빠르게 오른다면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금방이지 않을까.

쉬지 않고 잡몹들을 잡다, 스산한 기운에 그대로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저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이언레빗 Lv. 10]

-스톤레빗 둥지의 지배자

스톤레빗 둥지의 지배자라는 말에 걸맞게, 아이언레빗은 스톤레빗과 달리 뿔도 두 개, 크기도 훨씬 컸다.

레벨 10이나 된다는 소소한 알림을 무시한 채, 물어뜯을 자세를 취하던 참이었다. 다시 한번 스킬 창이 반짝였다.

[하울링]

-동료들을 불러 적의를 가진 적들 3명에게 8,000의 대미지를 줍니다.

“아우우-!”

처음 나온 공격 스킬이었다. 스킬을 활성화하자 희한한 울음소리와 함께 내 몸의 다섯 배는 큰 늑대 세 마리가 일제히 아이언레빗에게 달려들었다.

늑대들은 아이언레빗의 목덜미와 뒷리를 물곤 고개를 털어냈다. 그림자 형상임에도 흩날리는 갈기가 보일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아이언레빗의 살점을 뜯어버릴 듯 공격하던 늑대들은 그가 비틀거림과 동시에 사라졌다.

내가 공격할 타이밍은 지금밖에 없지 않을까? 늑대들의 공격에 아직 정신을 못 차렸음에도 팔을 휘젓는 모습에 너덜거리는 목덜미를 노려 뛰어올랐다.

-키잉

스킬의 늑대처럼 고개를 흔들 필요도 없었다. 공격과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아이언레빗에 바닥으로 내려와 입에 들어온 털만 뱉어냈다.

[아이언레빗을 처지하였습니다! 레빗굴 소탕 업적 달성! 아이언레빗의 뿔이 지급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1Lv 달성!

보스는 보스였는지 빠르게 레벨이 올랐지만, 시간은 이미 20분이 흘러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선 아이템보단 시간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다시 지도를 확이 하며 딜러슨이 있다는 곳으로 달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기 무섭게 언덕 위로 조그마한 통나무집이 나왔다.

“저리 꺼져! 못된 들짐승 같으니!”

통나무집으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들려온 고함에 발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 든 남자가 빗자루를 들고 제 쪽으로 달려드는 너구리를 내쫓는 것이 보였다.

하필 그 너구리가 내 쪽에 있던 탓에 자연스레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시선이 곧장 ****이 준 목걸이로 향했다.

“너는 ****이 보낸 아이구나. 어서 저 도둑을 잡아줘!”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딜러슨의 의뢰 1. 꿀너구리 사냥. 꿀을 훔치는 나쁜 너구리들을 잡아 딜러슨에게 증표를 건네주세요. (꿀너구리의 수염 0/5)

****이 뭐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던 것도 잠시,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건지 꿀너구리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꿀너구리 Lv.12]

비슷한 레벨과 크기… 여기서 눈을 피하면 왠지 지는 기분이라 마주보며 꿀너구리에게 달려갔다. 코앞에 닿은 순간 급소를 노렸지만, 치켜드는 팔을 피하지 못하고 가까운 어깨를 물어뜯었다.

-크르릉.

울음소리에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까지 이쪽을 향했다. 마침 딱 세 명이 되었을 때 ‘으르릉’ 하곤 [하울링]을 사용했다.

녀석들은 단 한 방에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인벤토리에 아이템이 들어가는 알림과 레벨 업 알림이 함께 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2Lv 달성!

(너구리의 수염 2/5)

“한 마리당 하나씩이 아니네….”

이제 남은 것은 세 마리. 최대한 가까이 있는 너구리의 목덜미를 달려가 낚아채자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쓰러졌다. 놀랍게도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너구리들이 너도나도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눈앞의 먹잇감을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내 이동 속도보다 느린 너구리 두 명을 더 공격하자 퀘스트 완료까지 수염 하나가 남았다.

하지만 몸을 숨긴 너구리들 탓에 하염없이 흘러갔다. 주위만 둘러보던 중 반짝이며 스킬 창이 다시 활성화되었다.

[공격 자세]

-수인 기본 스킬로 공격력이 소폭 상승하며 오감이 발달합니다. 숨어있는 적의 기척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히든 클래스 효과로, 자세를 갖추는 것만으로도 활성화가 가능합니다.

패시브 스킬인가? 귀를 뒤로 접은 채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돌무더기 뒤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으로 숨소리마저 죽이며 다가가 떨고 있는 꿀너구리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키잉!

(너구리 수염 5/5, 딜러슨에게 보상을 받으세요!)

-레벨이 올랐습니다. 13Lv 달성!

너구리의 단말마와 함께 반짝이는 퀘스트 알림. 레벨업 알림에 뿌듯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 게임도 잘하는 건가?

“생각보다 빨리 해결했군. 그나저나 지금 찻잎이 똑 떨어졌지 뭐야. 저 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귀한 튜나르가 열리는 밭이 있어, 나는 너구리들이 망가트린 양봉장을 정리해야 하니 찻잎 좀 구해주게.”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딜러슨의 의뢰 2. 튜나르의 꽃잎. 귀한 꽃잎이 상하지 않도록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튜나르의 꽃잎 0/10)

“적정 레벨이 20인데?”

“최근 그곳에 둥지를 튼 몬스터가 생겼지 뭐야. 보상은 섭섭잖게 챙겨줄 테니 그 몬스터를 처치해 줄 수 있겠나? 아, 싫다면 거절해도 되네, 몰래 숨어서 찻잎만 가져다주어도 돼.”

-히든 퀘스트 발생. 숨겨진 딜러슨의 의뢰가 열렸습니다. 500년 전 만들어진 저주받은 키메라가 튜나르의 꽃밭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빼앗긴 딜러슨의 밭을 찾아주세요! (키메라Lv.20 처치 0/1)

[수락] [거절]

시간도 별로 없는데… 포기할까? 싶었지만 연신 밭 방향을 힐끔거리는 딜러슨을 모른 척하기가 힘겨웠다. 끝내 수락을 누르자 딜러슨이 크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딜러슨에게 체력 회복 포션(소) 20개를 획득했습니다.]

[딜러슨에게 마력 회복 포션(소) 20개를 획득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게!”

포션을 받기가 무섭게 뜬 퀘스트 지역을 확인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시간이 이렇게 금방 흘렀나? 하는 의문도 잠시, 온몸에 뚝뚝 흐르는 검은 액체를 두른 채 내가 있는 곳을 노려보는 키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생각 없이 달려왔다. 멀리서 지켜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왔어야 했는데….

내 몸의 열 배는 넘는 크기에 기가 죽었으나, 한발씩 다가오는 키메라를 보고 있으니 본능적으로 공격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른 프로텍트를 써 녀석의 약점을 찾았다.

느낌상 평타는 절대 무리인데…. 주위를 빙빙 둘러보다 프로텍트가 끝나기 전, 크게 울부짖으며 하울링을 사용했다.

“아우-.”

-크아악!

놈의 체력이 겨우 손톱만큼 닳았고, 화가 난 키메라는 곧장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스킬 쿨이 다 돌지 않았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휘둘러 오는 손을 어떻게든 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니, 수인 루트를 탄 유저들은 모두 이런 퀘를 깬 건가? 자기 자신을 혹사하는 퀘를 받을 만큼 할 만한 직업이 맞나 이게?

앞으로 수인족 또라이들과 겸상하지 않을 것이다. 무사히 나가게 되면 이 숲이 있는 방향으로 침도 뱉지 않을 거라 욕을 짓씹다, 키메라의 입에서 나온 가스를 무심코 들이켰다.

“깨갱!”

[유독 가스에 ‘중독’되었습니다. 지속해서 체력이 떨어집니다.]

포션을 마신 후 리커버리로 겨우 체력을 안정시켰지만, 초마다 체력이 깎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겨우 하울링을 써 뒤로 빠질 때였다.

[리무브]

-모든 상태 이상을 해독합니다.

[일루전]

-15초 동안 적에게 환각을 보여줘 체력과 방어력을 소폭 떨어트립니다.

몸으로 배우는 수인 스킬 교실도 아니고. 뼈에 새기듯이 알려주는 하드한 전개에 기가 찰 정도였다. 위험한 상황일 때마다 필요한 스킬이 뜬다니. 튜토리얼답긴 했지만 썩 달갑진 않았다.

“30초면 하울링과 같이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하울링 쿨이 12초 정도 남았고, 스킬 썼을 때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10초 남을 때 써야 하나?”

건 한 시간을 내리 솔플만 한 탓인지 저절로 혼잣말이 느는 느낌이다. 이내 고개를 좌우로 붕붕 젓곤 [일루전]을 사용했다.

잘 걸린 게 맞는 건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프로텍트나 리커버리는 몸 위로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는데 일루전은 마력만 빠져나갈 뿐 아무런 효과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키메라의 눈이 뿌연 막이라도 씌인 듯 탁해져선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바들거리는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서성거렸다.

무슨 환각을 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고통스럽고 힘겨워 보였다. 이윽고 쿨이 다 차 하울링을 쓰자 키메라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키메라의 피는 아직 반이 넘게 남아 있었고, 나를 똑바로 보는 붉은 눈은 화가 난 듯 뾰족했다.

-크아아!!

키메라의 울부짖음에 땅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갈라진 땅에 발이 걸려 넘어졌을 때, 손을 높이 들어 내리찍을 준비를 마친 키메라가 보였다.

[프로텍트]

-콰앙!

-최고 대미지를 초과하여 프로텍트가 해제됩니다.

“씨발!”

빠르게 일어나 공격 사전 거리에서 도망쳤지만, 스치는 것만으로 체력이 3분의 2가량 떨어졌다.

나는 서둘러 힐 스킬과 포션을 사용했다.포션도 권경배에게 받은 게 아닌, 딜러슨에게 받은 제일 낮은 등급을 마셔서 그런지 한 번에 두 개는 마셔야 했는데, 아직 5초 쿨이 남은 데다, 마력까지 부족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평타를 치기엔 괴기한 외형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고민하던 차, 스킬 창이 반짝였다. 게임을 시작한 후 이렇게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할퀴기]

-연속 공격. 한 번에 3번 공격합니다.

지금 이 기분이면 꼬리로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일루전과 하울링 그리고 새로 얻은 할퀴기를 사용했다. 할퀴기는 쿨이 짧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격할 수 있었고, 덕분에 키메라의 피는 빠르게 바닥으로 치달았다.

체력이 손톱만큼 남았을 때, 마지막이 될 것 같은 공격을 하러 힘껏 뛰어오르는데, 그 순간 솟구친 돌무더기에 뒤통수를 정통으로 맞고 튜나르 꽃밭 위로 굴러떨어졌다.

어둡고 스산한 풍경 속에서 연분홍빛 꽃잎들이 떠올라 이상한 장관을 만들어 냈지만, 붉게 물든 체력 바를 올리기 바쁜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키메라는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꽃잎에 시선을 빼앗겼다.

지금이 기회였다. 모아둔 공격 스킬을 마구잡이로 그에게 쏟아붓고, 발톱을 세워 키메라에게 달려갔다. 갑자기 뿌연 연기가 일며 붉게 물든 키메라의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아직 한 대는 더 때려야 하는데! 몬스터가 있는 방향으로 무작정 발을 휘둘렀지만, 아무 반응 없이 연기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그대는 내가 만든 것 중 가장 걸작이야!’

동그란 안경을 낀 너구리 수인 남자가 기쁜 듯 중얼거리며, 순백의 갑옷이 널브러진 바닥을 바라보다 가슴을 열어 주먹만 한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심장처럼 두근두근 뛰는 그걸 가슴에 끼우자, 갑옷은 일제히 자기의 자리를 찾아 조립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고 이건 또 뭐지…? 다행히 시간이 멈춘 모양인지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주위에는 수많은 수인의 시체가 배경처럼 널려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뚫린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욱…!”

치미는 토기에 반사적으로 엎드려 눈을 감았다.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박혀 들어왔다.

‘너를 만드는 건 정말… 너무 힘들었어. 고문에 따르면 수인 열 개의 심장을 융합해야 한다는데, 정확히는 100이 넘는 수의 심장이 필요했으니까…!’

‘크르릉.’

‘역시 말은 못 하는 건가? 시간이 더 있었다면…!’

퍼즐 맞추듯 맞춰진 키메라는 조금 전 나와 싸울 때와는 정반대로 백색 갑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키메라는 앞의 남자를 바라보다 자기 손을 쥐었다 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곧이어 눈이 붉게 물들었다.

‘자, 62번 네가 할 일은 하나야.’

미친 남자가 손을 양옆으로 벌려 천천히 자기의 어깨부터 쓰다듬어 내렸다. 나는 그 변태 같은 행동이 꼴 보기 싫어 시선을 돌려서 키메라 쪽만 응시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이 몸을 지키는 거야. 네 존재의 의미는 그것 하나뿐이란다.’

말을 마친 남자가 키메라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이윽고 키메라의 몸에 흰빛과 함께 몸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졌다.

둘은 한참을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키메라의 손에 손바닥만 한 단검을 쥐여주더니 그 단검을 자신의 왼쪽 가슴에 찔러 넣었다.

‘내 기억을, 내 삶의 이유를 맡겼으니. 큽, 흐윽! 그대는, 이곳에서 나를… 지켜야 해.’

그 뒤론 암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기다림에 지친 키메라는 천천히 문을 열어 밖으로 향했다. 긴 터널이라도 된 듯 한참을 걸어 나간 밖은 동굴이었다.

각종 몬스터가 그득했지만 그 몬스터들은 키메라가 누구인지 아는 건지 모두 양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키메라는 눈이 다 시릴 정도로 새하얀 빛이 나오는 입구를 보곤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너는 누구야?”

“레미, 함부로 다가가지 마!”

“우린 지금 300년 전 이곳에 살았다는 연금술사의 은둔지를 찾는 중인데,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몇몇 사람들이 키메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300년이라니…. 그 너구리가 키메라를 만든 이라면 저 키메라는 연구실을 300년이나 지키고 있었다는 건가?

“말을 못 하는 걸까?”

“이만 돌아가자.”

남자는 어딘가 화가 난 사람처럼 큰 소리를 내며 걸었고, 곁에 있던 여자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키메라의 앞에 꽃 한 송이를 내려둔 뒤 돌아갔다.

키메라는 제 앞의 꽃만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뒤늦게 줍는데,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연약한 꽃잎이 후두둑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저 꽃, 딜러슨의 퀘스트 아이템인 튜나르인데? 이런 먼 과거까지 연관된 아이템이면 엄청 중요한 게 아닐까.

“이름이 뭐야? 나는 레미. 저쪽은 체이슨인데 지금 왕국에 전염병이 돌아서 연금술사의 약초를 찾고 있어. 정말 아는 거 없어?”

입꼬리가 올라간 토끼 수인 레미가 키메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묻자 체이슨도 궁금한지 연신 이쪽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키메라는 두 사람의 눈을 피하며 고개만 저었고,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그 뒤로도 몇 번 그들과 만나는 키메라가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점점 쇠약해지는 둘의 모습이 보였고, 키메라는 곧 무언가 결심한 듯 레미의 옷자락을 끌어 동굴로 이끌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금술사가 세워둔 몬스터들이 전부 키메라를 알아보곤 길을 터 줬기 때문이다.

바들바들 떨던 두 사람은 어색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바로 문 앞까지 닿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열더니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

시간이 멈춘 듯한 내부 탓이었다. 누가 봐도 금지된 연구를 한 것 같아 보이는 내부는 아직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이 즐비했으며, 연구실 중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죽어 있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내부를 더욱 스산하게 만들어주었다.

주춤거리며 발을 뒤로 물리는 체이슨을 레미가 막았다. 겁먹지 말라는 듯 손을 잡더니 함께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갔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들의 앞을 막아섰지만,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을 막을 수는 없었고, 언제나 그렇듯 나쁜 예감은 들어맞기 마련이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은 피를 쏟으며 주저앉았다.

[침입자 발생. 연금술사의 저주가 활성화됩니다.]

“레미! 내가, 쿨럭! 얘기했잖아! 저 괴, 큽…! 물은… 이상하다고.”

체이슨을 미안한 듯 바라보던 레미가 피를 토하며 키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을 도와주려던 키메라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우, 우리를 흡, 속이고… 마을에 전염병을 쿨럭쿨럭! 퍼트린, 게 진짜… 너, 너였어?”

“믿지… 말자고…….”

체이슨이 말을 끝내기도 전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해졌고, 그런 체이슨의 곁에서 무릎을 꿇은 레미가 죽일 듯 키메라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쇳소리의 울림이 들려온 건.

-왜지? 나는… 그대들이 원하는 걸 주고 싶었을 뿐인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둘에게 손을 뻗던 키메라는 곧이어 알리는 알림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멈춘 시간의 계약이 침입자의 방해로 해지되었습니다. 페널티로 불사의 저주가 발생합니다. 계약서 안의 생명은 모두 저주받으며 계약자의 등장 전까지 계약서는 봉인됩니다. 계약서 내의 모든 생명체는 밖으로 강제 퇴출당합니다.]

[저주 효과. 살아있는 시체가 됩니다. 선택받은 자에 의해 불사의 저주가 해제될 수 있습니다.]

왜 몬스터에게 서사를 입히는 건지 알 수 없는 게임이었다. 곧이어 현실로 돌아오듯 몸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고,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무릎을 꿇은 키메라가 보였다. 마지막의 흰 갑옷을 입고 있을 때와 같은 모습에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그저, 그들에게 들려줄 이름이 갖고 싶은 것뿐이었다.

“…….”

-그들이 원하는 걸 가졌을 때, 그때… 부탁할 생각이었지. 내게도 불릴 수 있는 이름을 달라고,

“…….”

-300년 동안… 나는 혼자였어. 내게 먼저 다가와 준 그들이 이름을 지어준다면 무척 기쁘지 않을까 싶었다.

울컥했다. 남들 다 있는 이름 하나 없이 죽지도 못하고 썩어가는 몸으로 세상을 떠돌았을 저 키메라가 안쓰러웠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제 지금의 키메라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먹먹한 마음만이 남았다.

“내가 줘도 될까? 네가 원하는 거.”

키메라가 고개를 들어 붉은 눈을 슴벅였다.

-그대는, 내 말이 들리는 건가?

“응. 내가 지어도 괜찮다면 줄게, 네 이름.”

-…….

잠깐 동안 아무 말 없던 키메라가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꼭 우는 아이 같아 마음이 서글퍼졌다. 나는 키메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땅에 박히듯 놓인 팔을 토닥여 주었다.

-여기, 이 꽃을 아는가? 작은 소녀가 처음으로 준 선물이야. 이 꽃과 비슷한 이름이면 좋겠어.

“튜나르?”

-꽃의 이름이… 튜나르인가?

“응, 튜나르니까, 나르 어때? 앞으로 나르라고 불러줄게. 마음에 들어?”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에 앉은 키메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제삼자의 눈에만 그랬을 뿐, 내겐 키메라와 튜나르의 꽃이 꽤나 잘 어울려 보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주기로 했다. 튜나르에서 튜만 뺀, 급하게 지은 이름을 말이다. 사실 이름 짓기엔 영 소질이 없다. 내 아이디만 봐도 유우겸에서 ‘겸’ 이 한 글자만 뺀 거니까.

-마음에 들어. 나르……. 그 둘에게 가장 먼저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

-그대, 이제 나를 편하게 해 주지 않겠나?

키메라를 토닥이던 손이 움찔 떨렸다. 왜 몬스터에게 서사를 입혀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키메라, 아니 나르는 이미 눈을 감고서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였다.

나르의 체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지만, 망설여졌다. 나르가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맞는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나르의 웃음소리가 한 번 들렸고, 그제야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고맙다. 다음 생이 있다면 꼭 그대와 또 만나고 싶군, 그때가 온다면 나를 꼭 나르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6Lv 달성!

[키메라(나르)를 처치했습니다! 저주받은 생명 업적 달성! ‘나르의 알’이 지급되었습니다. 부화기에 넣어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나르의 알」

-200년 전 저주받은 키메라.

이 게임, 펫도 부화시킬 수 있는 건가? 기쁨도 잠시 촉박한 시간 때문에 얼른 꽃잎을 따 딜러슨에게 달려갔다.

다리를 종종거리며 딜러슨을 쪼아댄 덕에 겨우 찻잎과 꿀을 담은 보따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거북이한테로 가 꿀이 가득한 보따리를 건네는 것뿐이었다.

-이상한 것과 함께 왔군. 그대는 마음이 여린 모양이야.

“하, 뭐래는 거야. 후으… 안 늦었죠? 아직 30초 남았어요!”

-하하, 그래. 어서 이리 주게. 그나저나 왜 이렇게 더러워진 거지? 차를 내릴 동안 저기 아래 강물에서 씻고 오도록 하게.

“참나, 태평하게 앉아만 있어 놓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더한 잔소리를 들을까 얼른 거북이가 가리킨 강물로 향했다. 물에 몸을 담그기 전, 물 위에 비치는 내 모습을 내려다봤다.

암만 봐도 늠름한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위안인 건, 사람 외형에 꼬리와 귀를 달고 있는 것만큼 꼴불견이지 않다는 거지.

“아니, 웨어 울프라며. 이건 그냥 늑대 새끼잖아.”

한숨을 뒤로한 채 몸을 헹궈내곤 밖으로 나오자 거북이는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충 물기를 털어낸 뒤 빈자리로 오르자 내 앞으로 큰 그릇이 놓였다.

이런 쓸데없는 배려는 부탁한 적이 없는데…. 멀쩡한 잔과 내 잔은 번갈아 보며 ‘으르릉’하고 울자 거북이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꿀만 듬뿍 퍼 올렸다.

-다음 심부름은 혼자 하기 힘들 것 같은데. 음, 네 명 정도 도와줄 사람을 부를 수 있겠나?

“…네 명이나요? 여기로 올 수 있긴 한가. 지도에도 안 뜬다는데.”

-파티하고 나를 부르게. 이곳으로 소환할 힘은 있으니.

거북이 주제에 파티도 알아? 의외로 똑똑하네…. 불순한 생각을 알아차린 거북이가 차를 호로록 마시며 눈을 좁혀 내 쪽을 노려봤다.

[귓속말]유우 : ㄱㄱㅂ

[귓속말]간계밥 : 튜토리얼 끝남?

[귓속말]유우 : ㄴㄴ 파티원 네 명 필요하대. 너 시간 있어?

[귓속말]간계밥 : 아, 나 쫌따 각성퀘 지워ㄴ가야 되는데. 잠만 길드에 물어볼게.

[귓속말]유우 : 너 시간 될 때 해도 되는데..

빈말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답게 급한 성격으로, 한시라도 빨리 퀘스트를 깨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답이 없는 채팅 창을 집요하게 바라보다 앞에 놓인 차를 할짝거렸다.

[귓속말]간계밥 : 파티 ㄱ

내내 기다리고 있던 사람답게 권경배에게 파티를 걸자 동시에 민초맛사탕과 푸름, 화환이라는 이름이 파티 창 목록에 채워졌다.

민초맛사탕은 아까 세계 채팅에서 본 이름 같은데….

[파티]민초맛사탕 : 안녕하세여 유우님? 헬퍼 필요하다면서요!!!

[파티]푸름 : 튜토리얼인데 진짜 파티 필요함?

[파티]간계밥 : 아니 근데 넷 모으는 거 친구 없는 사람은 어캄?

[파티]민초맛사탕 : ㅇㅇ 그건 그럼

[파티]민초맛사탕 : ㅍㄹㅇ 도와달라면 넵 하고 달려와야지 말이 많아~

[파티]푸름 : 아니 궁금할 수도 있지...

[파티]민초맛사탕 : 사실 나도 좀 궁금.

[파티]간계밥 : 근데 거기 어떻게 가 위치 ??? 인데

[파티]유우 : 아, 안녕하세요. 도와주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티]유우 : 지금 소환해 달라고 할게요. 잠시만요!

얼른 달려가 거북이를 올려 보자 거북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얘… 진짜 NPC 맞는 건가? 왜 모르는 게 없어 보이는 거지?

“다 모았어요. 소환해 주세요!”

-빠르게 모아왔구나.

거북이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크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 거북이의 뒤를 따라 걷자 그 큼직한 발로 내 몸을 뒤로 밀고는 제법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고대의 마법이라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른 마법이 발동해. 가서 마저 차나 마시고 있으렴.

입술을 삐죽이며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자 거북이는 기특하다는 눈으로 나를 한 번 보곤 마저 그림을 그렸다.

고대의 마법은 위험한 건가? 얼마 남지 않은 찻잔의 차를 핥으며 아닌 척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느새 다 그렸는지 거북이가 그 마법진 가운데로 걸어가며 뭐라 중얼거렸다.

거북이의 중얼거림이 멎기 무섭게 마법진 위로 빛이 일더니 네 개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큰 덩치의 곰 귀를 단 갈색 수인 푸름과 백금발의 긴 머리의 민초맛사탕, 권경배와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키 큰 화환이 소환됨과 동시에 빛이 사라졌다.

“와, 뭐야 이거?”

“개신기하네. 유우겸 어디 있냐.”

“아니, 여기가 튜토리얼 장소라고.”

“왜, 너도 여기서 한 거 아니야?”

“응, 나나 다른 수인은 수인 마을1에서 했는데….”

“역시 히든…. 근데 웨어 울프 아니었나? 웬 거북이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몸을 일으켜 거북이의 옆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죠?”

거북이 큼, 하며 몸을 옆으로 비켜 헛기침을 했다. 파티원의 고개가 자동으로 떨어져 내 정수리를 내려 보았다. 그제야 나는 내 몸이 생각보다 작다는 걸 깨달았다.

거북이가 유난히 큰 건 줄 알았는데…. 게다가 딜러슨도 평범한 체구가 아니었나? 머릿속으로 딜러슨의 키를 가늠해 보는 사이, 키가 큰 남자가 나를 불쑥 들어 올려 제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유…우겸?”

“미친, 동물 외형이 가능하다고?”

아무 말 없이 들어 올린 남자 뒤로 놀란 권경배의 얼굴과, 민초맛사탕이라는 아이디를 머리 위에 단 여자가 내 손을 쥐더니 눈을 크게 뜨며 푸름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와, 우리는 반인반수밖에 안 되는데…?”

“웨어 울프가 아니라 강아지 아니야?”

이렇게 쉽게 들리는 것도 그런데 강아지라니…. 하고 동물원의 동물 보는 듯한 말투에 결국 ‘그르릉’ 하며 울음소리를 흘렸다. 눈을 맞추며 웃던 남자가 그제야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네 발로 땅을 딛고 최대한 기분 나쁜 얼굴로 공격 자세를 취하는데, 엉뚱하게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씩 커가며 원래 모습을 찾을 거니 너무 놀리지 말게. 그대들이 별의 아이의 파티원들이지? 나는 이곳을 지키는 다섯 번째 별의 길잡이 ****이네. 이 어린것에게 벌써 이렇게 강한 친구들이 있을 줄이야.

“안녕하세요, 저는 민초맛사탕이에요. 저희 길드원 부탁으로 오게 됐는데 그럼 웨어 울프는 성장형 히든 직업인가요? 그런 직업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민초맛사탕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거북이가 웃음으로 말을 아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런데 저 거북이 이름이 잘 들리는 건가? 물어보려 고개를 들기 무섭게 거북이의 목소리가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어갔다.

-그대, 이번에는 저기 아래의 왕국으로 다녀와 주게. 북쪽 연금술사의 저주가 나날이 강해져, 마을 사람 중 남은 이가 몇 남지 않았어. 상태를 확인하고 와 주게.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의 퀘스트 2 왕국 탐색! 미친 연금술사의 저주 확인. 수인족 왕국의 성문과, 중앙 광장, 공동묘지를 탐험하고 저주의 흔적을 획득하기. (저주 흔적 0/3)

****이 가리킨 곳은 큰 산을 등진 백색의 커다란 왕성이 있는 곳이었다. 말이 저기 아래지 거의 산을 하나 넘고 내려가야 할 정도로 멀었다. 빠르게 달려도 30분은 족히 걸릴 것 같은데….

“꽤 먼데? 쟤는 들고 가고, 푸름인 어떻게 할래?”

“아, 저는 이속 스크롤 있어요.”

내가 짐도 아니고 들고 가긴 뭘 들고 가. 푸름이 권경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 줄 때였다. 갑자기 나를 들어 올렸던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내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

“…미친놈인가?”

“손도 몰라? 이래서 어떻게 귀염받으려고.”

“초면에 죄송한데, 손가락이 하나 필요 없으신 건가요?”

“생긴 거랑 다르게 무섭네. 안 되겠다. 형아가 안아 줄게. 사이좋게 다녀오자.”

뭐지 이 정신 나간 새끼는? 최대한 비웃는 표정을 만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머리부터 천천히 뜯어보았다.

“반했어? 왜 그렇게 뜨겁게 훑어봐, 설레게.”

미친놈은 부끄럽다는 듯 눈을 아래로 깔며 고개를 돌렸다. 저런 부류는 상종하면 안 되지 않을까…. 뒤로 반 발짝 내딛는데, 정신 나간 놈이 빠르게 내 배 아래를 감싸 안으며 등 뒤로 검은 날개를 꺼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뭐, 뭐야. 미친놈아! 이거 안 놔!”

“진짜? 미친놈이 여기서 손 놔도 된다고?”

“그럼 가짜겠냐고! 야!”

발버둥을 치다 곁눈질로 아래를 내려 보자 거북이는 점만큼 작아진 상태였고, 권경배와 민초맛사탕은 깔깔거리며 뒤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여기서 손을 놓지 않겠지? 미친놈의 옷자락을 발톱으로 꽉 쥐려는데 안고 있던 손에 조금씩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만! 죽어, 죽는다고요!”

서둘러 미친놈, 아니 화환에게 매달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커다란 손이 등을 감싸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주었다.

이 새끼는 지금 웃음이 나는 건가? 처음 겪는 수모에 이만 으득거리며 뒤에서 날아오는 권경배를 노려보았다.

쟤는 대체 왜 이런 미친놈을 친구로 둔 거지?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아 커다란 성문에 다다랐다. 물론 체감상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았지만 말이다.

막 날개를 접고 선 화환이 바닥에 내려줬고, 긴장으로 떨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줘 똑바로 서자 같이 날아오던 두 명도 무사히 내려왔다.

“채길마랑 유우 님 이제 친해진 거야?”

“그렇지 않을까요? 사이좋게 부둥켜안고 날아왔는데.”

“다들 눈이 어떻게 된 거예요? 사이좋게? 그게 사이가 좋은 거면 모레는 결혼까지 하겠네.”

“자기야, 그건 너무 빠르지 않아? 결혼이라니…. 아직 손도 안 잡았는데.”

“뭐야, 사이 안 좋다며. 벌써 자기 하는 사이야?”

정신없이 웃는 권경배와 웃음을 참으며 놀려대는 민초맛사탕을 한심하게 보다 등지고, 바닥에 앉아 커다란 성벽만 올려 보았다. 참자, 참아. 말려들면 지는 거다.

“아, 우리 아직 인사도 전이었지? 야, 유우겸 인사해. 우리 길드 길마, 부길마. 아까 본 곰돌이는 푸름이라고 우리보다 두 살 어려.”

“계란이랑 친구면 스물셋이겠네? 유우 님, 민초맛사탕이에요. 스물여섯.”

“자기야, 나는 안 궁금해?”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이거 알아. 개수작 부리는 거지? 연락처는 목걸이로 만들어줘도 될까?”

“언제부터 정신을 놓고 살기 시작한 거예요?”

“뭐야 둘 다 물음표 살인마야? 답은 없고 전부 질문뿐이네.”

“채길마, 애 그만 괴롭혀. 유우 님 저랑 동갑이에요. 저기 푸름이도 오네.”

푸름이 도착하기 무섭게 커다란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 사이로 순간 불쾌한 냄새가 코를 스쳤는데, 퀘스트가 설마 이 냄새를 가져오라는 건 아니겠지?

“와, 씨 개멀어. 계란 형, 돌아갈 땐 저도 데려가주세요.”

“너 하는 거 봐서. 우리 소개하는 중이었어, 겸아 인사해. 푸름이.”

“다들 도와주러 오셔서 감사해요. 인사가 늦었네. 말씀 편하게 하시면 돼요.”

너 말고. 길만지 뭔지 화환의 말간 얼굴을 노려보며 말하자 혼자 또 웃기 시작했다. 의도는 전달된 건가?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챈 푸름이 눈을 굴리며 우리를 둘러보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곰팡이 냄새? 조금 전 맡은 냄새를 떠올리다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한 냄새 안 났어요?”

“냄새?”

다들 모른다는 얼굴이라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여 바닥 냄새를 킁킁댔다. 그러자 자동으로 공격 자세 스킬이 활성화되며 몰랐던 인기척들과 찾고 있던 냄새가 옅게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공기를 가져오라고 하겠어. 냄새가 가장 강하게 나는 곳은 성벽을 크게 두르고 있는 기둥 중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금이 간 곳 아래였다.

“뭐야? 지금 스킬 쓰는 거야?”

“미친. 진짜 동물 같은데?”

“달래 산책시킬 때랑 똑같다. 너 늑대 아니고 개 아니야?”

뒤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기둥 아래의 땅을 파자 코가 아플 만큼 강한 냄새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검은 돌멩이가 나왔다. 아니, 그냥 돌이라기엔 너무 반들거리는 검은 돌이었다.

「저주의 흔적」

-미친 연금술사가 심어둔 저주. 키메라가 밖으로 나오며 흘러나온 불온한 존재에 의해 심어진 저주이다.

아까 키메라 퀘스트와 이어지는 건가? 마지막은 미친 연금술사를 처치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뒤로한 채, 배낭 안의 나르의 알과 최대한 먼 구석에 돌을 집어넣었다.

“됐어요! 이제 광장으로 가야 해요.”

내 뒤를 졸졸 따르는 네 명의 사람들의 앞으로 당당히 걸어 입구를 지나치자 갑자기 뿌연 안개가 일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멈춰 몸만 움찔거리는데 민초맛사탕이 내 몸을 들어 올려 뒤로 크게 물러난 순간 바닥으로 날카로운 도끼가 날아와 박혔다.

“위험했다, 그쵸?”

“아, 네… 네.”

벌렁거리는 가슴을 도닥여주던 민초맛사탕이 ‘정화’라는 스킬을 쓰자 검은 안개는 바로 사라졌고, 그 순간 권경배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주변을 둥그렇게 빙 두르고 있던 이들이 다른 종족인 권경배가 달려오는 걸 보곤 얼굴이 희게 질리며 뒤로 물러났다.

“우, 우리 마을은 이제 끝이라고! 그만 괴롭혀!”

“보면 알잖아, 저주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

“…무슨 소리야, 우리가 뭘 어떻게 했다고.”

탱커인 푸름이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우리는 오늘 여기 온 게 처음인데 저게 다 무슨 소리지?

“왕성에서 보낸 사람이 아닌가? 이번 달 공물을… 못 채워서.”

“왕성이요?”

내 물음에 세 명의 수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아픈 몸으로 침입자를 막으러 나온 모양인데…. 자세히 보니 모두 손과 발, 심지어는 뺨까지 검게 그을린 듯 얼룩져 있었고, 며칠을 굶었는지 비쩍 마른 몸은 무기조차 양손으로 들기 버거워 보였다.

“저기 산 중턱에 있는 거북이의 부탁으로 왔어요. 저주 때문에 전염병이 도는 것 같다고, 살펴보고 오라셔서.”

민초맛사탕의 품에서 뛰어내린 후 바닥에 앉은 수인의 앞으로 다가가려는데 화환이 내 앞을 막았다.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다.”

“맞아, 전염병이잖아. 일단 퀘스트가 먼저야.”

냉정한 말에 내가 너무 과몰입하는 건가 싶어 지도를 살펴 광장으로 향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또 알 수 없는 ****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우리 뒤를 힐끔거렸고, 불안한 건지 푸름이 하늘색 실드를 두르며 발길을 재촉했다.

도착한 광장 중앙 분수의 물은 이미 썩어 악취가 나고 있었다. 녹색 이끼들과 쓰레기들이 뒤섞였으며 가까이 가기 꺼려질 정도로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한 가운데서 저주의 흔적인지 뭔지 하는 기분 나쁜 냄새가 가장 강하게 났다.

아, 진짜 싫은데…. 발만 구르며 분수대 주변을 돌자 또 미친놈이 나를 들어 올려 가장자리 돌 위로 내려놓았다. 어쩐지 잠잠하다 했다.

“자기야. 내가 저기 있는 거 가져올 수 있게 해주면 뭐 해줄래?”

“지금 저 엄청 봐주는 중인데. 그걸로 퉁치면 안 돼요?”

“내 얼굴 봐주는 거 말고.”

“무슨 오해와 착각을 이렇게 한 번에 해? 누가 길마님 얼굴 봐준대요?”

“그럼?”

내 입으로 말을 해야 하는 건가? 막상 말하려니 민망한데.

“자…기라고 부르는 것도 봐주는 중이잖아요.”

“응? 부끄러워서 모르는 척이 아니라 봐주는 중이야?”

“…그냥 제가 혼자 들어갔다 나올게요.”

“여기 탈출하면 우리 길드 들어오는 걸로 봐줄게. 어때요?”

미친놈이 있는 길드면 권경배도 같이 있는 곳인가? 그러고 보니 길드명이 다른 것 같은데…….

둘만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보던 권경배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안심이 된 내가 따라 끄덕이자 화환이 다시 나을 들어 올려 푸름에게 다가갔다.

“푸름아, 저번에 3차 끝나고 송금이 형이 만든 구슬 아직 있지?”

“아… 파란 구슬이요? 있어요.”

“물에 한 번 넣어볼래?”

푸름이 배낭 안을 뒤적이다 파란 구슬을 꺼내 물 안에 넣자 순식간에 물이 맑게 변했다. 무슨 아이템인지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더러운 물로 목욕할 뻔한 걸 구해준 게 고마워 꼬리가 춤을 췄다.

“와, 뭐예요? 푸름 님 대단하다.”

“아뇨, 이거 전에 3차 퀘 때문에 부탁한 건데…. 늦게 만들어 져서 쓸모도 없었는데요, 뭐.”

근데 이 미친놈은 남의 아이템으로 생색을 낸 건가? 한마디 해주려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뒷다리부터 물에 빠져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미친놈의 짓이었다.

“말은, 하고 빠트려야죠.”

“나 방금 자기 마음을 읽은 것 같아서. 욕하려고 했지? 잔말 말고 다녀와.”

재수 없는 새끼. 다행이 물은 턱 아래까지 오는 깊이였다. 수영하는 것처럼 발과 손을 버둥거리다 보니 분수대의 중앙에 금방 도착했다.

이쯤이었지? 얼굴을 물속에 넣고 잠수해 돌을 물고 밖으로 나오자 민초맛사탕과 푸름 두 사람이 금의환향하는 사람 보듯 나를 보며 반겨주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뿌듯하지. 꼬리를 흔들며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흔적을 배낭에 넣은 후 화환의 발아래로 걸어가 물기를 털어냈다.

마지막 남은 돌의 위치는 공동묘지였는데 설마 모르는 사람의 묘를 파야 하는 건가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저주의 흔적은 공동묘지 중앙에 박힌 큰 조형물의 아래에 있었는데, 문제는 흙을 팔 수 없게 콘크리트로 막혀 있었다.

굴하지 않고 두어 번 앞발로 긁어대다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니, 보고 있던 민초맛사탕이 배낭에 있는 곡괭이로 한 번에 폭신한 흙까지 뚫어주었고, 덕분에 또 쉽게 꺼낼 수 있었다.

아마 혼자 했으면 게임을 종료하고 심신의 안정을 찾은 며칠 뒤에 접속해야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의 도움으로 예상보다 빠르게 깰 수 있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얌전히 화환의 품에 안겨 거북이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빨리 구해온 것인가? 역시 친구들이 강한 덕이군.

혼잣말하던 거북이가 등껍질 안으로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내 목에 걸린 목걸이와 바꿔 걸어주더니 손을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

뭐지? 손 위로 발바닥을 올리자 민초맛사탕과 권경배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흔적을 주게. 그대가 가지고 있기엔 위험해.

“그럼 말로 하지 사람 헷갈리게…….”

손바닥 위로 저주의 흔적을 건네자 내 레벨이 순식간에 20이 되었다. 플레이 타임에 비해 업이 늦는 편이 아닌가?

-이번엔 나도 같이 가지, 아무래도 끝을 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으니.

“…저, 날아갔다 왔는데요?”

-걱정 말게, 오래전 그들과 거래한 적이 있어 공간을 접어두었단다. 이번엔 그대가 구해 준 그의 흔적까지 있으니 가야 하는 길로 갈 수 있을 것이야.

양아치 같은 놈이….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꺼내주지 왜 이제야 인심 쓰는 척이지?

거북이가 팔을 들어 아무것도 없는 곳을 세로로 길게 그어 보이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바로 방금 돌아온 왕국의 성문이 보였다. 이렇게 빠르게 올 수 있는 길을 두고 미친놈한테 안겨서 날아오게 하다니….

힘껏 거북이를 노려보다 가장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는데, 거긴 조금 전 다녀온 곳과는 또 다르게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상한데?”

“누나도? 스킬 사용이 안 돼.”

이상한 것 그뿐만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말에 일단 스킬 창을 확인하자 내 건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내 퀘스트라 그러나?

“저는 괜찮은데 전부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너무 강한 친구들이라 여기는 어울리지 않아 막힌 거란다. 이곳은 아까 네가 다녀간 곳과 같지만 다른 공간이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스킬은 누가 막은 거예요?”

-이곳의 주인이지. 500년 전의 연금술사 ‘뮤첼’에게 말이야. 그대가 구해온 흔적을 뿌린 장본인.

“500년 전 연금술사면… 나르를 만들고 죽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 키메라의 이름이 ‘나르’라면 그렇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은 그가 다시 돌아올 걸 예상했지만, 저지른 죄가 너무 커 죽어서도 이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어. 하지만, 200년 전, 그의 키메라가 밖으로 나온 덕에 그의 움직임이 더 자유로워졌지.

움찔거리며 모르는 척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좀 전에 다녀갔던 마을보다 더 엉망인 광경이 펼쳐졌다.

멀쩡한 걸물도 없었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쌓인 돌무덤에 발을 내딛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가 아까 그 왕국이라고?”

-그대들이 다녀온 곳은 뮤첼이 왕국을 망가트리기 전의 시간이란다. 즉 200년 전의 왕국이지. 흔적을 찾기 위해 내가 그리로 보낸 것이야.

“딱 보니 뮤첼인지 무첸인지를 잡아야 될 것 같은데…. 우리 스킬이 다 막혔는데 어떻게 해?”

“일단 무기나 들어봐. 안 되면 때리기라도 해야지.”

“예전에 송금이 형 물약 실수했을 때 생각나지 않아요? 엄청 고생했는데….”

조용히 공동묘지로 향하는 거북이의 뒤를 따르며 사람들의 말을 듣자 괜히 어깨가 무거워졌다. 여기서 싸울 수 있는 건 나뿐인가? 그럼…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거지?

걱정이 덕지덕지 묻은 무거운 발을 옮기자, 바로 앞에 검은 그림자와 함께 흰 가운을 걸친 안경 쓴 너구리 수인이 나타났다.

역시, 나르를 만든 사람이 뮤첼이었다.

[미치광이 연금술사 뮤첼 Lv.??]

-불로불사의 연구가 막바지를 향하던 중, 죽음의 자락에서 그 마지막 연구를 끝낼 수 있다는 소문에 자신의 육체를 지킬 키메라를 만든 후 죽음을 택한 연금술사.

-그대를 잡아두기엔 내가 너무 늙었군.

-하하, 나약한 거북이 주제에 나를 잡아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우르릉.

거북이와 삭막한 인사를 끝낸 뮤첼이 눈을 치켜뜬 순간, 땅이 갈라지며 수많은 수인족의 시체가 일어나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르도 비슷한 공격을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땅만 갈라질 뿐 좀비들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서둘러 다른 사람들에게 프로텍트를 둘러주자 갑작스런 스킬에 놀란 듯 내 쪽을 힐끔거리곤 무기를 들어 시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몸을 낮춘 후 몬스터들이 몰린 쪽으로 스킬을 사용하려는데, 보여선 안 될 사람들이 보였다.

아까 우리를 공격했던 마을 사람들의 뒤로 나르의 기억 속 환히 웃던 레미와, 체이슨이 입 밖으로 검은 무언가를 토하며 비척비척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너무하잖아.

-그래, 너도 있었지. 나의 소중한 아이를 돌려주지 않겠나? 그럼 그대만은 무사히 보내주지.

멍하니 두 수인을 살피던 중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못된 악당 주제에 이제 알이 된 나르까지 노려?

뾰족한 이를 내보이며 그르렁거리자, 거북이가 나를 대신해 공격해주었다. 비식 미소 지은 뮤첼이 놀란 척 뒤로 물러나 나를 위아래로 짧게 훑어보았다.

-이 별의 아이는 생각보다 멍청한데? ****도 보는 눈이 많아 낮아졌군.

-육체도 없이 떠돌아다니느라 눈이 많이 나빠졌군, 그래.

거북이가 웃으며 맞받아치자 뮤첼의 눈이 싸늘해졌고, 곧바로 사방이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미치광이 연금술사의 금지된 안개에 ‘중독’되었습니다. 눈이 멀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입니다. 지속해서 체력이 떨어집니다.]

[리무브]

빠르게 스킬을 사용하며 뒤로 뛰어올랐지만 곧이어 소환된 좀비에 부딪히며 체력이 떨어졌다.

이번엔 실수 없이 권경배에게 받은 포션을 마시는데, 강한 바람이 불어와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힐을 사용해 겨우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커다란 삽을 공중으로 치켜든 좀비가 보였다.

여기서… 죽는 건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눈을 꼭 감고 다가올 시간을 걱정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프거나 죽었다는 알림이 뜨지 않았다.

“자기야, 뽀뽀라도 해야 눈 뜨는 거야?”

무슨 헛소리지? 살며시 눈을 뜨자 앞에서 화환이 손바닥을 눈앞으로 휘휘 저으며 장난치고 있었고, 바닥엔 쓰러진 좀비가 꾸물거리며 일어나려 애쓰는 중이었다.

“뭐야, 스킬 써지는 거예요?”

“아니, 아직. 이건 기본 공격. 거북이가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더라. 정신 바짝 차려.”

어울리지 않게 정상적인 말을 마친 화환이 널브러진 좀비를 발로 걷어낸 뒤 뮤첼을 향해 총을 쏘며 달려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조금 전 상태 이상이 해제된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평타로 몬스터들을 쓰러트리고 있었고, 그걸 본 뮤첼의 얼굴이 굳어졌다.

-초대받지 못한 이들은 전부 싸울 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상하군. 역시 몸을 잃은 탓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뮤첼이 푸름에게 달려가 손을 뻗어 어깻죽지를 뚫었다. 단말마와 함께 주저앉은 푸름이 서둘러 포션을 마셨지만, 독이 있는 공격인지 뚫린 부위의 살점이 거멓게 죽어갔다.

놀란 듯 제 어깨만 보던 푸름의 목덜미를 잡아 시체들의 공격 범위에서 떨어트린 권경배가 정신 차리라며 푸름에게 크게 소리쳤다.

-아가, 목에 있는 구슬 중 녹색을 깨보렴.

언제 다가온 건지 거북이가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얼른 목에 걸린 주머니를 내려 보는데, 그걸 가만히 둘 리 없는 뮤첼이 거북이와 내 쪽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아우우-.”

그림자들의 도움으로 잠시 시간을 번 덕에 빛나는 구슬 중 녹색의 구슬을 꺼내 이로 물어 깨트릴 수 있었다. 녹색 빛이 주변으로 빠르게 한 번 빛나며 사라졌다.

“어?”

“으, 씨발, 이거 진짜 튜토리얼 맞아? 포션을 들이부어도 안 낫는데?”

“이사탕, 이제 스킬 써진다. 치료부터.”

만초맛사탕이 푸름의 환부에 손을 올린 채 스킬을 사용하자 썩어 들어가던 살이 완벽하게 나으며, 떨어진 체력도 풀로 채워졌다. 민초맛사탕은 힐러였나? 힐러면서… 힘이 그렇게 세다고?

힐러의 기준을 다잡는 순간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강한 친구라는 말이 사실인지 상처가 치료된 푸름이 미친 듯이 날뛰었고, 그를 보호하듯 뒤에 딱 붙은 민초맛사탕이 상태 이상이나 떨어지는 체력을 마구 채워주며 주변의 몬스터들을 차례차례 쓰러트렸다.

권경배와 화환은 뮤첼 쪽으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공격 스킬이 닿기도 전 모두 사라졌다.

-****!!!!! 내 연구실에 더러운 발을 들였구나!!

내가 깨트린 구슬이 저 연금술사가 만든 아이템이었을까. 뮤첼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하늘이 어두워졌다.

눈동자까지 빨개진 뮤첼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발을 구르며 손을 하늘로 올렸다.

-천벌.

뮤첼의 손이 바닥으로 내려오기 무섭게 어두워진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검은 번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뮤첼이 지배하는 공간이라 그런지 하늘이 뮤첼의 기분을 대변하듯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수많은 번개를 땅으로 내려쳤다.

비틀거리며 겨우 한 번을 피한 나와 다르게 권경배는 빠르게 뮤첼에게 달려갔고, 민초맛사탕은 나를 안아 올려 쏟아지는 번개를 능수능란하게 피했다.

뮤첼의 공격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던 거북이가 손을 올려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지팡이가 거북이의 손에 들린 순간부터 하늘 곳곳에서 밝은 빛줄기가 뮤첼이 만든 어둠을 정화하듯 밝혀갔다. 순식간에 내몰린 어둠은 뮤첼의 주변에서 주변에서만 일렁일 뿐이었다.

우리 거북이… 강한 친구였구나.

-그대는 구원을 받을 자격조차 없군. 여태껏 두 손 놓고 지켜본 내가 한심할 정도야, 뮤첼.

나무로 된 지팡이를 바닥에 두 번 두드리자 밝은 빛이 내리며 뮤첼과 거북이를 감쌌다.

너무나 강렬한 빛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기에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는 뮤첼의 목소리만 들으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빛이 어느 정도 사그라졌을 때쯤 실눈을 뜨고 거북이를 찾는데, 거북이는 어느새 뮤첼의 가까이 올라 있었다.

손 뻗으면 닿을 만큼 뮤첼의 가까이에 다가간 거북이가 순간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더니 내 목에 걸린 주머니를 가리켰다.

-귀한 나의 마지막 아이야, 나는 나의 첫 아이와 함께 가야 할 시간이란다. 그것이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되겠구나.

거북이가 이다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이미 구원받을 자격조차 잃었다는 망령과 함께 사라질 생각인 거지? 나의 첫 아이라니…. 그럼 거북이에게 첫 히든 직업을 받은 사람이 저 너구리라는 건가?

-나의 업보, 나의 아이야. 그대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나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 안심하게, 그대의 죄는 내가 나누어 받아줄 테니.

뮤첼을 감싼 빛은 어느새 감옥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안에 갇힌 뮤첼의 핏발 선 눈에서는 검은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 나의 신. 그대가, 그대가 알려주었지 않습니까. 소생의 방법이 쓰인 책이 죽음의 문턱에 있다고!

-그리 말하면 그대가 포기할 줄 알았지. 얌전히 그대의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줄 알았으며,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모든 진실을 알아차리도록 말이야.

거북이가 단숨에 뛰어오르며 뮤첼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올랐다. 뮤첼은 그런 거북이를 보지 않고 부들부들 떨며 입술만 짓씹다 갑자기 하늘을 한 번 노려보았다.

뮤첼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검은 연기가 일었다. 그게 우리가 있는 곳으로 불어오려 하자 바로 밝은 빛이 터지며 세상이 멈추었다.

끝없이 일어나 달려들던 시체들도, 간간이 불던 바람에 대답하듯 굴러다니던 먼지 한 톨까지 그 자리 그대로 말이다.

-드디어 그대에게 내 이름을 떳떳하게 알려줄 수 있겠구나. 모든 시작과 끝을 향하는 라디아탄. 그게 나의 이름이지. 그대의 시작엔 축복이 가득하길….

라디아탄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고, 그 울림이 미처 끝나기도 전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이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라디아탄의 퀘스트 완료! 1차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각종 능력치가 올랐습니다! 스킬 레벨 업!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포탈이 열렸습니다! 외부로 돌아가 널리 이름을 알리는 헌터가 되어 보세요.]

눈앞에 뜨는 알림이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가장자리부터 바스러지는 공간과 몬스터들이 사라지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단둘만 빼고, 말이다.

“사탕 님 저 이제 좀 내려주세요.”

“아, 폭신해서 나도 모르게….”

민초맛사탕의 품에서 벗어나 아직 손을 잡고서 서 있는 레미와 체이슨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 그거 몬스터 맞아? 체력 바도 없고 공격도 안 되던데?”

“아니, 마을 주민일걸? 그래서 공격이 안 됐나 봐.”

힘껏 달려 하울링을 사용하자 두 사람은 언제 살아 있는 시체였냐는 듯 원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내 두 사람이 시선을 내려 나와 눈을 맞추는데, 나르가 보던 얼굴이 이런 얼굴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입만 벙긋거리던 둘이 환하게 웃으며 점점 사라지는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다.

“기다려!! 200년 전 너희를 연금술사의 집까지 안내한, 갑옷 입은 애는 너희를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어! 원하는 걸 주고 싶었다고…!”

두 수인의 눈이 커지며 다시 입을 벙긋거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서로의 시간이 다른 탓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크게 소리쳤다.

“그 갑옷 입은 애 이름은 ‘나르’야! 너희 둘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싶어 했어!”

레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울렁이는 물이 차올랐고 알고 있다는 듯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자 저절로 깨달은 게 있었다. 200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떠돌던 나르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이들이었다는 걸 말이다.

괜히 나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무서운 것과 긴장되는 것 둘 다 좋아하는 편인데 유독 슬픈 걸 못 보는 사람인지라, 흐려지는 풍경을 애써 무시한 채 사라지는 둘을 등지고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숨겨진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명성을 대신한 최고의 보상, 레미와 체이슨이 영혼의 안식을 되찾았습니다.]

[‘나르’의 죄책감이 사라졌습니다. 부화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유우’에게 전해집니다.]

“와, 나 소름 돋았어.”

“이거 뭐야 진짜?”

“나르가 백색 갑옷이에요?”

“네. 지금 알인데 이거 부화할 수 있어요?”

“응, 그거 제작 아이템.”

돈은 권경배가 주겠지, 뭐. 포탈로 발을 옮기는데 민초맛사탕이 무릎을 굽혀 앉으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양손으로 다리부터 얼굴까지 잡히는 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어떻게 이렇게 변하지? 혹시 반인반수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녜에. 히든 스킬 효과로, 이렇게 변하는 거예여.”

“누나, 일단 나가서 마저 얘기하자. 이제 여기 없어지겠어.”

푸름인 진짜 동생이 맞을까? 덩치부터 눈치까지 모든 게 다 나보다 더 어른 같은데. 두어 번 포탈 쪽으로 몸을 돌려 걷자 느긋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뒤를 따라왔고, 이 세계가 가장자리부터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작별 인사 따위 하지 않았다. 이곳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꼭꼭 묻어둘, 라디아탄과의 추억의 장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바스러지는 공간을 한 번 둘러보곤 포탈 안으로 들어가자 모르는 초원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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