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손안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려니 자얀이 다가왔다.
“가자. 배고프다.”
“…….”
“어차피 마지막인 거면 밥은 제대로 먹고 헤어지지? 그 징그러운 괴물 살점 말고 맛있는 밥 좀 같이 먹어 보자고.”
그만 튕기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까딱인다. 바람에 휘날리는 코트 자락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먹자. 먹어. 대신 회 말고 탕수육 가자. 그게 당긴다.”
“헛소리야. 바다에서는 회지.”
“물컹해서 싫다고.”
“진짜 도련님이네.”
“넌 내가 진짜 봐주고 있다는 거 알아야 해.”
“퍽이나.”
녀석도 나도 좀 전의 대화를 더 이상 이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전보다는 조금 더 편안해진 태도로 마치 오래도록 만나지 않았던 동창을 대하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나란히 걸었다. 대화 역시 아무런 의미 없는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만 늘어놓았다.
* * *
집으로 돌아올 즈음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갈 때와 달리 퇴근하는 차들로 도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쭈욱 켰다. 오랜만의 외출 탓인지 벌써부터 졸음이 쏟아졌다.
‘체력이 생각보다 많이 떨어졌네. 당분간 운동을 좀 다닐까.’
“운전도 피곤한 거군.”
자얀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든다. 나는 그 모습에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 좋은 건 다 배우네.”
“원래 이국 땅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욕이랑…….”
녀석은 말없이 담뱃갑을 흔들었다.
“……야.”
“갈 거야. 갈 거야.”
연초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느라 녀석이 흐린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잘 놀았다.”
보채지 말라며 눈을 흘기는 녀석에게 나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오늘의 외출이 썩 나쁘지 않았기에 해 줄 수 있는 인사였다.
“잘 살아라.”
그리고 정말 마지막 인사.
자얀은 허공으로 뿌연 연기를 뿜어 내곤 바닥으로 꽁초를 던져 발로 짓이겼다. 타오르던 불씨가 한 번에 꺼졌다.
“그래야지.”
녀석은 한참을 침묵하다 그렇게 말했다.
“도련님도 TV는 보지? 안 보면 이제부터라도 봐, 내가 어떻게 잘 살아가나.”
“그래. 응원할게.”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앞서 조금이라도 과거의 잔재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건 이 녀석에게도 해당된다. 나에게는 자얀이, 자얀에게는 내가…… 함께할 때 발목을 붙잡는 불필요한 감정의 덩어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헤어지는 게 옳은 방향이라 생각한다. 녀석도 나도 스스로 우뚝 서, 자립해야 하므로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멀리서 응원할 수는 있다.
“진심이다.”
덧붙인 내 말에 녀석이 해맑은 아이처럼 티 없는 웃음을 만들어 냈다. 덩달아 나도 웃었다. 잘 살아라, 그건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떠나가는 차를 끝까지 바라보며 배웅하고 난 후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두워야 할 집 안이 환했다. 불을 켜고 갔었나? 아침에 너무 열이 받아 후다닥 뛰쳐나가긴 했었는데…….
씁, 고개를 기울이며 어떻게 나갔었나 생각을 하는 와중 욕실문이 벌컥 열리더니 송여환이 나타났다.
“왔어? 늦었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눈이 커졌다.
“너야말로 언제 왔어? 분명 오늘도 늦는다고 아침에…….”
말을 끄는 내게 송여환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두시간 전에. 생각보다 빨리 정리가 됐어.”
그러더니 젖은 머리 그대로 내 품에 안겨 왔다. 꽉 끌어안는 팔뚝이 이제는 익숙했다. 나는 자연스레 그를 마주 안았다. 커다란 강아지가 예뻐해 달라며 낑낑거리는 것 같아 귀여웠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송여환의 달달하고 시원한 체향이 풍겨 와 뺨으로 열이 몰렸다.
“으으으…… 한계야. 형이 부족해.”
“내가 충전기냐.”
“응. 내 전용 충전기.”
“밥은? 저녁은 챙겼고?”
“대충.”
“대충 먹으면 어떡해.”
타박을 받은 주제에 뭐가 좋은지 송여환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으응, 애교를 부려 왔다. 이 바보가, 누구 속 태우려고 작정을 했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왜 대충 때우고 난리야. 제대로 챙겨 먹지. 나는 속이 상해 인상을 찡그렸다.
“앞으로 뭐 먹는지 식사 시간마다 사진 보내.”
“하하하!”
“야.”
“진짜 내 남자 친구구나.”
송여환이 하아, 숨을 뱉으며 차가운 뺨을 내 목덜미에 비볐다. 그러자 같이 쓰는 샴푸 냄새가 확 났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워.”
내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듯 녀석이 똑같이 중얼거렸다.
“말 돌리지 마.”
괜한 부끄러움에 타박하자 송여환은 끙, 소리를 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나 반성할 게 있어.”
나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어깨로 올라왔다. 그러곤 다정하게 잡아 주욱 밀어내 거리를 벌리더니 고개까지 푹 숙인다.
“뭐야. 왜.”
“그…….”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우물쭈물하는 여환이가 걱정되었다. 천천히 말해 보라며 타이르자 목덜미와 어깨, 귓불까지 차례대로 발갛게 물들인 녀석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웅얼했다.
“낮에 인사도 없이 전화 먼저 끊은 거 미안해. 질투 나서 그랬어…….”
뭐? 지금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부끄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잠시 멍해진 나는 곧 낮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웬일로 먼저 전화를 끊나 했더니, 그게 제 나름의 시위였던 거야? 전혀 몰랐는데?
“하.”
……미친, X발, 너무 귀엽잖아? 나는 손으로 입을 턱 막고 눈만 껌뻑거렸다.
“나 완전 못났지.”
기죽은 채 바들거리는 강아지만 보였다.
“아, 알고 있어. 버릇없었지. 다시는 안 그럴게. 화 풀어. 일 때문에 바빠서 형이랑 데이트도 못 하는데 그 자식이 형이랑 바다를 갔다고 하니까, 눈이 돌아서……. 내가 그럴 자격 없다는 거 알아. 요새 바빠서 옆에도 못 있어 주는…… 형?”
“야.”
“어?”
“한다.”
“뭐, 뭘?”
나는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송여환의 뺨을 양손으로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어엉, 하며 동그랗게 눈을 뜨는 녀석에게 그대로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움이 한계치까지 쌓이다 못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쳤다.
벅차는 마음 그대로 앞뒤 가릴 것 없이 행동하자 송여환은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곧 자연스레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대로 진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하아, 하…….”
누구의 숨소리인지도 모를 거친 호흡이 입술 새를 가르고 흘러나왔다. 공기는 금세 후덥지근해졌다. 싸우다가, 불만을 토로하다가, 눈이 맞아 불타오르는 걸 보니 새삼 커플은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혹시 뭐…… 오늘 생일인가? 어우, 깜짝 선물이 너무 끝내주는데.”
송여환이 촉촉한 입술로 물었다.
“그냥. 귀여워서.”
나는 숨김없이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는 다시 작은 틈도 벌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끌어안고 침대까지 비틀비틀 걸어갔다. 방 불은 켜지 않았고, 늘 그랬듯 서로의 몸에 붉은 자국들을 새겨 넣으며 실없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 * *
“나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당분간 일 좀 쉴까?”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첨벙첨벙, 욕조 속에 마주 본 채 앉아 발 장난을 치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송여환이 대뜸 퇴사 의지를 불태웠다.
“아니, 사실 뭐 적당히 자리 하나 잡아서 형 고생 안 시키고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아 보려 했지. 근데…….”
“근데?”
“막상 그렇게 지내니 이상하더라고. 내가 지금 몰두해야 하는 게 회사가 맞나 싶고. 돈이야 뭐, 에스퍼 생활하며 모아 둔 것만 해도 부족하지 않고.”
“응.”
“뭘 위해 일하고 있는 거지 싶어서. 난 그냥 형이랑 알콩달콩 사는 게 인생의 목표인 놈인데.”
달콤히 속삭이며 송여환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녀석도 그걸 아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제일 소중한 걸 별로 중요치 않은 다른 것 때문에 방치하고 있다는 게…….”
푸념을 늘어놓던 송여환이 슬쩍 상체를 기울이곤 내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쓸어 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형한테만 집중하며 살고 싶어.”
“…….”
“우리 세계 여행이나 떠날까?”
“여행?”
“응. 이 집도 신혼집이라 생각하고 산 거니까, 그에 맞게 신혼여행을 가는 거지.”
언제 돌아오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일본, 베트남, 스위스, 뭐 발길 닿는 대로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는 거지. 평생을 살아온 동네처럼 느긋하게 지내다가 또 어느 날은 관광객처럼 바쁘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비가 오면 숙소에서, 날이 좋으면 공원에서, 그냥 골목에서, 언제나 손을 잡고 다니자.
말을 끝낸 여환이 배시시 웃으며 내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애교가 듬뿍 섞인 입맞춤에 나 역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 끌리는 제안이었다.
“그래, 그러자.”
나는 현실을 걱정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미래를 보고 현재를 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 언제나 내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한 이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 먼 훗날 올 좋은 날을 기다리기보단 당장 함께할 수 있을 때 되도록 많이, 오래, 사랑을 나누어 가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도 길바닥 노숙은 싫어.”
“왜 이래? 내가 누군데.”
물을 뿌리며 장난스레 말하자 녀석은 재벌 3세 놀이 좀 해 보겠다며 으스댔다.
“평생 먹고 놀아도 괜찮게 해 줄게. 형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그래, 애인 잘 둔 덕을 좀 보자. 어디부터 갈까.”
“어디가 좋아?”
“따뜻한 곳으로 가자.”
“응. 형이 원한다면.”
근데 내 품보다 따뜻한 곳은 없을걸? 능글맞게 말하며 바투 다가와 나를 껴안는 녀석이 좋았다.
그리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 계절이 한 번 바뀐 어느 날.
[탑모델 ‘자얀’. 한국 이름으로 개명해…….]
나는 공항에 마련된 커다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연예 뉴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어떻게 잘 살아가나 꼭 챙겨 보라던 누군가의 모습이 당당히 담겨 있었다. 어쩐지 즐거움이 담긴 듯한 물빛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멋지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열심히 걸어가는 지금. 나 역시 내 짝과 함께할 평생의 둥지를 찾아 쉬지 않고 걸어가는 중이다.
“형! 오래 기다렸지. 수속은 끝났어.”
송여환이 여권을 흔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고생했어.”
흐트러진 녀석의 머리카락을 자연스레 정리해 줬다. 이제는 꽤 커플 티가 나는 우리였다.
“여행하면서 싸워도 나 버리지 않기다, 자기야?”
나는 송여환의 손을 꽉 잡으며 싱긋 웃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안 돼. 주머니에 넣고 다녀 줘.”
“너무 커.”
사소한 담소를 나누며 나와 송여환은 걸음을 맞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갔다.
“형, 다른 나라에도 에스퍼는 아예 없는 걸까?”
“있으면 양아치지. 내가 그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모른 척했다는 건데. X발.”
“씁, 신혼 길에 욕 금지.”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근데 진짜 있으면 어떡해?”
“뭐, 에스퍼?”
“응. 나 또 형이 다른 에스퍼랑 막…… 가까워 지는 거 싫은데.”
송여환이 찡그리듯 웃었다. 이 새끼, 아무리 봐도 자얀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약간 억울해졌다. 진심으로 송여환 말고는 알 바 아니니까. 거기다 가깝긴 개뿔, 내가 언제?
“개소리야. 내가 누구랑 가까웠는데? 가까운 사람 너밖에 없거든? 그리고…… 만약 에스퍼가 존재한다 해도.”
“해도……?”
꼴깍, 송여환이 마른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귀여운 새끼, 대체 뭘로 질투를 하고 있는 거야?
“진짜 존나 상관없는데. 오히려 괜히 엮여서 일 만들지 않게 피해 가야지. 아, 그리고 그 시간에 너랑 X스를 한 번 더 하는 게 낫겠다.”
나는 진심으로 심드렁했다. 왜냐하면 정말 그랬으니까. 에스퍼고 나발이고, 능력을 숨긴 놈이 있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란 말인가. 난 송여환을 어떻게 발라 먹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인간인데.
“오~ 이젠 쿵, 하면 짝인데?”
그동안 꽤 사랑받아 그런지 내 대꾸에 송여환은 짓궂게 웃었다. 그러곤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쪽쪽 입을 맞춰 왔다.
“사랑해.”
언제 들어도 행복한 고백과 함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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