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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112화 (112/115)

112화

아주 갖고 노니 재밌나 보지? 나는 조금의 거리를 두고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곤해. 아, 진짜 피곤해 죽겠다.

“너…… 여환이 있을 때 그 장난 하지 마라.”

마른세수를 하며 이어 말했다.

“걔가 순해 보여도 남한테는 입질 할 줄 아는 성견이거든?”

내 경고에 자얀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웃음을 뚝 멈추곤 싸늘하게 정색하고서 물었다.

“장난 같아?”

“그만해라. 또 뭐가 꼬여서 지랄이야, 새끼야.”

하고 싶다는 거 다해 줬는데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불만이 있으면 차라리 욕을 해라. 이상한 쪽으로 사람 속 긁지 말고…….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을 다다다 쏘아 주려는데, 차가운 표정을 거둔 녀석이 흘리듯 말했다.

“외로워서.”

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얀을 바라봤다. 바짝 언 내 시선에 녀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조적으로 웃는다.

“하하, 이봐. 지금 되게 실례되는 생각 하고 있지?”

아니라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도 그럴 게 저 녀석의 입에서 ‘외롭다’는 말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지금 외계인이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놀라웠다.

“오해하고 있나 본데 아쉽게도 나 역시 사람이거든?”

“…….”

내 속마음을 읽은 듯 녀석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러더니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아니, 어찌 보면 어딘가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아. 이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아. 전에는 하루하루를 생존했어야 하니까.”

서블에 있었을 때를 회상하는 건가? 잠자코 녀석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러다 만난 게 아리아였어. 그녀가 내 전부였지. 새끼 때 만나 구원받았어. ……뭐,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지만.”

녀석의 목소리가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해졌다. 새삼 피도 눈물도 없을 거 같은 이 녀석 역시 모든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하도 미친 짓을 벌이고 다녀서 사사로운 감정 따위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딱히 위로해 주는 성격도 아니고, 하는 법도 모르기에 나는 그저 손바닥을 비비며 송여환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여환이라면 아무리 서먹한 사이여도 꽤 그럴듯한 위로를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가길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는데…….

“이래서 좋아.”

뜻 모를 소리를 뱉은 녀석이 대뜸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다시 능글능글한 얼굴을 만들어 냈다.

“나 안 불쌍했어? 으음, 안 통하나?”

“뭐?”

당황스러움에 되묻자 놈이 특유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들 보면 죄 사연 팔고 울길래 따라 해 봤어.”

그러곤 어깨를 으쓱였다.

“꽤 그럴듯했을 텐데.”

……X발, 그러면 그렇지. 뭔……. 잠깐이라도 진심이라 생각했던 내가 멍청했다.

“미친놈.”

“으응, 설마 나 걱정했어? 천하의 도련님께서어?”

자얀이 실실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여름의 공기를 닮은 후덥지근한 열기가 훅 전해져 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송여환의 체취와는 다른, 낯선 냄새와 함께.

“아하하! 너무 아쉬워 마. 도련님을 아리아 대신으로 여길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말했잖아, 여러모로 살아가는 데 너 같은 녀석이 딱 좋을 거 같다고. 어때? 난 강아지랑 셋이 만나도 좋은데.”

“헛소리 집어치워.”

“먼저 나한테 불 질러 놓은 건 너면서 냉정하네? 키스도 멋대로 한 주제에.”

‘키스’라는 단어가 귀에 콱 박혀 왔다. X발! 이 새끼 안 까먹고 있었어?

“너……!”

텁, 나도 모르게 바싹 다가가 녀석의 입을 막았다.

“그거, 너, 말하기만 해.”

“으음? 으으음~?”

“사고였다는 거 모르지 않잖아.”

말을 하면서도 양심 어딘가가 찔렸다. 확실히 그날, 정신을 놓고 달라붙은 쪽은 나였다. 그걸 아는데…… 어쨌든 사고였다는 변명으로 송여환을 속여 먹으려는 짓을 하는 것 같아 찝찝했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자얀의 시선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혹시나 이상한 말로 송여환과 내 사이를 이간질할 생각만 해 봐라, 어디. 가만 안 둘 테니까.

한창 대치를 하던 중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여환이 보였다.

“괜히 애 속 긁지 마라.”

그제야 나는 경고를 하며 어쩔 수 없이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와, 편의점에 사람 엄청 많더라.”

곁으로 다가온 송여환이 배시시 웃으며 핫 팩을 건넸다. 그러곤 나와 자얀 사이로 끼어들어 엉덩이를 붙여 앉는다. 살랑이는 바람에 익숙한 체향이 섞여 맡아진다. 불편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끼며 송여환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줬다.

“고마워.”

“밤에 춥잖아.”

“인간 난로한테 핫 팩 주는 인간은 너뿐일걸.”

“당연히 나밖에 없어야지!”

* * *

뭐가 저렇게 좋은 걸까? 자얀은 한 쌍의 바퀴벌레를 직관하며 삐뚜름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특히나 ‘낙유성’ 저놈이 저런 얼굴을 짓는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데 저 혼자만 새로운 사랑을 만들었다는 게 아니꼬운 건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보는 사람마저 얼어 버릴 듯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을 한 주제에 강아지만 보면 사르르 풀리는 게 별로였다.

‘사근사근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아지는 왜 저런 통나무 같은 놈에게 죽고 못 사는 걸까?’

무슨 매력이라도 있나? 자얀은 송여환과 떠들고 있는 낙유성을 조용히 훑었다. 넓은 어깨와 처진 눈매,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 누가 봐도 ‘남자’로 느끼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하늘하늘한 아리아와는 전혀 다른 인종.

‘썩 구미가 당기지는 않는데…… 흐음?’

자얀의 눈동자가 낙유성의 얼굴에서 몸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훑는 시선이 점점 집요해졌다.

‘허리는 유독 잘록했던 거 같기도…….’

제 눈길이 끈적해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지, 자얀은 아예 턱까지 괴고서 유성을 바라봤다.

‘그래도 별로 끌리진 않는데.’

지선우라는 꼬맹이와 아리아는 작고 아담해 끌어안으면 말캉하고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그런데 저놈은 끌어안으면 품에서 넘치다 못해 오히려 안겨질 거 같은 느낌이다.

‘웩.’

남한테, 그것도 사내새끼한테 안겨 있는 스스로를 생각하자 속이 메슥거렸다.

‘뭐어…… 그래도 놀리는 맛은 있지.’

자얀은 건드리면 바로 이를 세우는 유성을 떠올리며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반응을 돌려주니 멈출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건지. 낙유성은 건드릴 때마다 훌륭한 표정과 리액션을 보여 줬다.

‘생긴 거랑 다르게 놀 때마다 깜짝 놀란단 말이야. 그래도 서블에 있을 때는 지금보다 더 인간답지 않았는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싫어도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지라 자얀은 낙유성이란 인간이 얼마나 강하고 잔인한지 몸으로 배웠다.

‘괴물 주제에 사람처럼 웃고…….’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독기가 보이질 않는다. 어디 나사 하나 빠진 놈처럼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를 짓고서 송여환만을 바라본다.

‘작은 꼬마를 볼 때보다 더 편해 보이는군.’

참 신기한 놈이다. 자얀이 보기에 낙유성은 본인과 동족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랑에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구는 놈이 사실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놈이라는 게…… 상당히 재밌었다.

물론 자신은 덩그러니 혼자인데 낙유성만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 하하, 호호하는 꼴이 약간 배가 아프긴 했다. 그것도 상대가 강아지라니. 전장에서 개고생은 자신도 함께했는데, 이럴 거면 저까지 껴서 셋이 만나는 게 맞지 않나?

도대체 언제 저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자얀은 문득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가질 때 누가 넣는지 상상하다 곧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다 굳이 따지자면 저 성질 더러운 도련님께서 앙앙 우는 꼴이 더 비웃어 주기 좋다는 결론에 도달했…….

‘잠깐만. 나 너무 생각하고 있지 않나?’

으음? 고개를 갸웃거린 자얀은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낙유성을 휘휘 쫓아냈다. 뭔가, 계속 생각하면 안 될 거 같은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모양새였다.

“……?”

자얀은 손으로 입가를 쓸며 불유쾌하게 뛰는 가슴을 느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를 제외한 다른 군식구와의 동거는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식사하는 자리, 산책을 나서는 순간, 하다못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은발 양아치는 해맑은 얼굴로 집요하게 방해해 왔다.

‘뭐 해?’

‘나도 끼워 줘!’

‘아하하하! 같이하자~’

작정한 듯 오붓한 시간을 망치는 녀석 때문에 송여환과 다정한 입맞춤 한 번을 하지 못했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곁에 있는데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 이 끔찍한 기분을 과연 누가 알까.

단단히 열받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송여환 역시 눈에 불을 켜고 자얀과 싸워 댔다. 그야말로 성난 여우와 눈치 X도 없는 늑대의 싸움이었다. 물론 속이 터지는 건 항상 송여환 쪽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노력 아닌 노력이 통한 건지, 자얀은 어느새 독립할 수 있을 만큼 현대 사회에 적응하게 되었고, 나와 송여환은 기다렸다는 듯 녀석을 쫓아내며 우리 역시 얼른 이 집을 나가기로 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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