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최근 송여환의 기분은 바닥을 기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맨티시스트 송여환이 바라는 꿈 같은 신혼 생활이 무참히 박살 났기 때문이다. 그토록 바라던 짝사랑 상대와 생사를 오가는 고난을 딛고 마침내! 한 쌍의 눈물겨운 맺음이 성사되었는데, 정작 그 달콤함을 본인은 전혀 누리고 있지 못했다.
‘X발.’
모든 일의 원흉은 저 은발 양아치였다.
‘거슬려 죽겠네.’
송여환의 크고 고운 두 눈에 질투의 불꽃이 팍 튀어 올랐다. 아무에게도 양보해 주고 싶지 않은 유성의 옆자리를 차지한 도둑고양이.
‘어디 굴러온 돌이……!’
화려한 자얀의 얼굴에 여환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 눈빛만으로 찢어 죽일 만큼 매서운 기세였다.
“으음, 그럼 이건 뭐지?”
“그건…….”
‘하! 순수한 연하 콘셉트 한번 제대로 잡았네! 하지만 유성이 형의 강아지는 오로지 나 한 명뿐이거든?’
“형, 가서 쉬고 있어.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송여환이 두 사람 사이로 쏙 들어갔다.
“어?”
“자얀 씨, 나로 괜찮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송여환이 유성을 숨기듯 제 등 뒤로 감춰 버렸다. 유성은 잠깐 고민하는 듯싶다 성인 남성 세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꼴이 남 보기에 별로라 생각한 건지 알아서 하라며 자리를 피했다.
“그럼 나 먼저 가 있는다.”
“어어! 금방 갈게.”
송여환이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유성을 배웅했다.
형제에게 자얀이라는 남자가 훌륭한 현대 사회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라는 부탁을 받아 이런저런 사회의 룰이나 적응법 같은 걸 알려 주고 있지만 그건 온전히 저 혼자서 하겠거니 싶어 받아들였던 거다. 저렇게 유성과 붙어 있으리란 걸 알았다면 절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한강에 오는 게 왜 사회 적응 중 하나라는 걸까? 그냥 핸드폰, 컴퓨터 따위의 작동법과 주민등록증 및 여권 발급,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기본개념 등등. 필요한 것만 알려 주면 되는 거 아닌가.
‘젠장. 유성이 형이랑 한강 오기가 내 버킷 리스트 서른다섯 번째에 있던 건데, 그 귀한 걸 이런 식으로!’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으음, 나는 도련님께 잘 배우고 있었는데.”
“도련님이 아니라 유성이 형이라고 했잖아. 버릇없이 굴지 마. 외국인.”
“알겠다고, 강아지야.”
“난 유성이 형 강아지거든.”
“스스로 그렇게 말하면 안 부끄러워?”
유창해진 은발 양아치의 말솜씨에 송여환이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통하게 되어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자얀이라는 남자는 상당히 열받는 말투를 사용했다.
‘왜 유성이 형이 항상 화를 냈는지 알겠네.’
한마디를 해도 얄미운 놈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놈이었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놀리는 거 같은데.’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노려보자 자얀이 픽 웃었다.
“실례, 습관이 돼서.”
“……쯧.”
라면 봉지를 북 뜯은 송여환이 한숨을 내쉬며 홀로 앉아 있는 유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날카로운 인상을 부드럽게 푼 채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는 모습이 어째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괜히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요즘 들어 유성은 잔잔한 일상에 약간의 낯섦을 느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새끼가 끼어든 건 싫지만, 그래도 조금 바쁜 게 형한테는 좋은 편일 수도 있나?’
송여환은 둥둥 떠다니는 오리를 주시하는 유성을 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말로는 싸울 일이 없어서 너무 좋다고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니, 평생을 ‘에스퍼’로 살아온 남자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다가온 평화에 쉽게 적응을 할 수가 있을까?
‘으음, 당연히 없겠지.’
물론 자신도 겪은 일이기에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다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어 문제였다.
‘나도 며칠을 고생했지…….’
아닌 척하지만, 많은 에스퍼가 힘을 잃어버린 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어 정신과를 들락날락했다. 지인들이 그랬으며, 자신도 만약 유성이 옆에 없었더라면, 신경을 돌릴 존재가 없었더라면 매우 힘들었을 거다. 지금까지 ‘나’를 만든 거대한 요소 중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셈이니까.
‘내가 더 힘내자.’
송여환은 유성이 그러질 않길 바랐다. 좋은 것만 보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낙유성이 살아가며 에스퍼일 적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옆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이 거머리부터 떼어 놓고. 송여환은 옆에서 보글보글, 라면 끓이는 기계를 보며 신기해하는 자얀을 흘겨봤다.
“응? 안 줄 거야.”
시선을 알아챈 자얀이 능글맞게 웃었다.
“안 먹어!”
* * *
‘쟤네 사이좋은 거 같은데?’
의자에 앉아 물에 둥둥 떠다니는 오리들을 보는 척 송여환과 자얀 쪽을 연신 흘깃거렸다. 무어라 떠드는지 알 수는 없지만 거리낌 없이 딱 붙은 어깨가 거슬렸다. 거기다 평소에는 기민한 주제에 지금은 어디 골목 식당에서 눈치를 말아 먹고 왔는지, 송여환은 제게 몰린 시선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다 죽여 버리고 싶다.’
원체 소유욕이 심한 편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오늘따라 유독 감정이 들쑥날쑥했다. 송여환을 눈에 담는 모든 인물이 싫었다.
‘유치한 질투심.’
나는 괜히 심드렁한 체하며 짧게 혀를 찼다. 왜 이렇게 불쾌한지 어렴풋이 알고 있어서다.
“욕구불만…….”
중얼거리던 나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애초에 타인이 호감 섞인 시선을 애인에게 보내는데 좋아할 머저리가 어디 있을까? 나는 뚱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얀 저 녀석도 눈치가 있다면 적당히 자리를 빠져 줘야 하는 거 아냐?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곁에 붙어 있을 셈이지? 순간 송여환의 형제들이 미워졌다. 빌붙어 사는 주제에 이러면 안 되지만…….
“개같네.”
“어? 뭔 일 있어?”
“아, 어. 아니…….”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진짜. 언제 다가왔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송여환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어 줬다.
“신경 쓰지 마.”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잇고선 그가 건네주는 콜라를 받아 들었다.
“피곤하지.”
“괜찮아.”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봐서 열받았다는 말은 못 하겠다. 너무 없어 보이잖아. 속마음을 숨긴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신 후 여환의 뺨을 살살 쓸어내렸다. 옆에서 후루룩 라면을 먹으며 나와 여환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은 무시한 채였다.
“먹다 체하겠네.”
비웃음인지 뭔지, 자얀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아, 세상 참 재밌군.”
어느샌가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자얀이 한숨처럼 말했다. 인생의 반 이상을 손해 봤다며 고개를 젓는 모습에 그렇게까지 재밌는 건가 싶었다. 그저 강을 보고, 라면을 먹고, 자전거를 타는 것뿐인데. 뭐…… 하긴, 이 녀석한테는 신기할 수도 있겠지.
“도련님은 내내 뚱한 얼-!”
나도 모르게 자얀의 이마를 날려 버렸다. 자꾸 도련님, 도련님 하니까 알게 모르게 약이 올랐나 보다.
“……뭐 한 거야?”
딱밤을 맞고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얼굴이 꽤 재밌었다.
“건방 떨지 말고 선배나 형으로 불러.”
“혀엉? 이봐, 내가 너한테 그런 호칭을 붙이는 건 너무 역겹지 않아?”
“호칭에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한테 겨우 호칭 하나로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여환이뿐이다. 밤이 춥다고, 핫 팩을 사 오겠다며 편의점으로 뛰어간 내 강아지 말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어두울수록 더욱 반짝거리는 물빛 눈동자. 자얀이 짓궂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불안한 기운에 사고 칠 생각 말라는 경고를 전하려던 순간, 녀석의 얄팍한 입술이 벌어지고 충격적인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알겠어. 자기야.”
삐끗!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자세가 무너졌다. ……X발, 뭐라고?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솜털이 바짝 솟아오르며 기분 나쁜 소름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까 라면에 누가 독이라도 탔나? 이 새끼 왜 이래.
“아하하, 표정 죽이네. 진작 그렇게 부를 걸 그랬어.”
“아무래도 내 귀가 먹었나 봐.”
나는 마치 부정을 털어 내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야. 자기 귀가 왜 먹어.”
“X발!”
“반응 봐. 나 지금 되게 뿌듯해.”
“야. 너 그거 금지야, 하지 마.”
“응. 자기야.”
“미쳤어?”
벌떡 일어나 자얀을 노려봤다. 이 새끼가 돌았나. 감히 얻다 대고 자기야?
“호칭에 무슨 의미가 있냐며. 그럼 내 마음대로 불러도 되는 거 아냐?”
“개소리 마. 그게 그거랑 같냐?”
“이거 되게 서운하네. 난 도련님 아쉬울까 봐 해 주는 거야. 강아지도 ‘자기야’라고 안 하잖아. 그래서 내가 대신 그렇게 부르는 건데,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해도 걔가 해야지, 네가 왜 해?”
내 사나운 일갈에 계속 실실거리던 녀석이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으응, 너무 싫어하니까 점점 오기 생기네?”
자얀이 기지개를 켜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꼭 배부른 사자처럼 나른해 보였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