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러고 보니 말을 못 했지.’
몇 번이고 얘기하려 했지만 타이밍이 안 맞았다. 핑계라면 핑계일 텐데 어쨌든 그랬다.
사실 구조된 직후에는 여러 검사를 받았고, 퇴원을 하기 전까지 옆에서 눈물을 보이는 송여환을 달래야 했기에 차마 ‘내 의지로 그런 건 아니지만 다른 놈과 입술 좀 비볐다. 바람은 정말 아닌데 어쨌든 미안하다’라고 할 수 없어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그 녀석과 여환이가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냥 다물까.’
애인으로서 해선 안 될 거짓말이었으나 나름의 하얀 거짓말이라고 둘러대며 나는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물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머지 식사를 이어 가려는데-
“도련님.”
집사장이 찾아왔다. 평소처럼 단정한 복장을 한 그가 송여환과 나를 한 번씩 쳐다보곤 조금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유성 도련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약속 말입니까? 아뇨. 딱히 잡은 게 없는데.”
처음 듣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딱히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는데? 나를 쳐다보며 눈빛으로 ‘누구냐?’ 묻는 송여환을 향해 어깨를 으쓱여 줬다. 나도 모르지, 내가 잡은 약속이 아닌데.
우리가 침묵하자 집사장이 한숨을 내쉬고는 찾아온 이의 이름을 밝혔다. 담담한 어조로 뱉은 이름에 나는 벌떡 일어나 집사장을 제치고 응접실로 달려갔다.
‘미친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소파에 앉아 느긋이 차를 마시고 있는 자얀이 보였다. 꽤 커다란 보스턴백을 옆에 두고 다리를 꼰 채 유유자적 앉아 있는 꼴을 보자 속이 뒤집혔다.
“야.”
‘[나한테 아리아 말고 다른 사람이 생길 거라 했잖아. 그게 너라면 어떨까?]’
고치에 고립되었을 때 녀석이 내게 했던 말들도 있고, 송여환과는 최대한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하지만 내 속을 어지럽게 만들어 놓은 놈은 정작 여유롭게 차나 즐기고 있다.
[으음, 왜 이제 와? 나 아까부터 기다렸는데.]
“너 X발,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나는 녀석에게 바짝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되게 흥분하네? 놀리고 싶게.]
자얀이 고개만 슬쩍 들어 나를 보곤 픽 입꼬리를 올렸다. 장난기를 가득 담은 물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선이었다. 역시 그때 같이 묻어 버렸어야 했나?
“여기 내 집 아니거든?”
[알아. 강아지네잖아. 당분간 신세 좀 지려고 왔어.]
뭐, 뭘 해? 뭐를 져? 신세? 녀석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뭐?”
[뭐야, 귀먹었어?]
“개소리하지 말고.”
[신세 좀 지겠다고. 도련님이야말로 본부 머저리들이랑 얘기 끝난 거 아냐?]
녀석이 옆에 놓인 가방을 툭 치며 말했다.
본부랑 얘기? X발, 무슨 소리야. 나는 들은 게 하나도 없는데. 설마 자기들 멋대로 저 녀석을 나한테 떠넘긴 건가? 하,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있나. 당장 김강민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폰을 찾아 몸을 더듬거리는데, 뒤쪽에서 긴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형!”
송여환이었다.
[오, 안녕 강아지야~]
자얀이 송여환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인사했다. 손까지 흔들흔들하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거지?
“닥쳐.”
나는 송여환과 자얀, 두 사람이 서로를 보지 못하게 몸으로 가로막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하? 왜 지랄이야. 내가 도련님한테 인사했어? 강아지한테 한 거지.]
“그러니까 닥치라고. 애 건들지 말고.”
[으응, 그럴수록 더 건들고 싶은데 어쩌지?]
자얀이 악당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도발했다. 다른 이유로 건드리는 거라면 코웃음 치고 무시했겠지만 송여환이 걸려 있자 눈이 돌았다.
“이 새끼가 진짜.”
멱살을 콱 잡아 일으키니 멀리 있던 송여환이 다급히 뛰어와 나와 자얀을 떼어 냈다.
“형, 형. 일단 손 놔, 내가 미안해.”
“뭐? 네가 왜 사과해.”
“아니…… 그게…….”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내쉰 여환이 나를 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다음 말을 이었다.
“나도 방금 알았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니까 우리 누나랑 형이 저지른 일이더라고. 저 사람, 그러니까 자얀, 씨를…… 앞으로 비즈니스 파트너로 쓰고 싶대.”
“뭐?”
“브랜드 이미지지. 나라를 구한 영웅 중 한 명이잖아. 사실 형한테 먼저 제안하려 한 걸 내 선에서 막았거든. 그래서 다음 타자인 자얀 씨한테 간 거 같아.”
송여환이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들어 보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여환이의 손윗사람인 둘은 뼛속까지 사업가였다. 어릴 적부터 에스퍼로 활동해 온 송여환과 달리 철저하게 브릭트스컴트의 명예와 부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인간들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현재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자얀을 놓칠 리가 없지. 발 빠르게 움직인 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해가 가는 것과 별개로 자얀을 왜 집에 들였는가에 대한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여기가 내 집은 아니기에 딱히 나한테 허락을 맡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미안해. 우리 형이랑 누나가 멋대로 내린 결정이야. 같은 에스퍼면 다 사이좋게 지내는 줄 알아서 그래, 그 인간들……. 하아, 걱정 마. 형이랑 따로 나가서 살 집 바로 구할 테니까.”
맞다. 이제 둘이서 따로 나가 살기로 했었지. 나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리다 이어지는 말에 눈을 부릅떴다.
“자얀, 씨는 그, 내가 알려 주면 되니까 형은 아무런 걱정 말-”
“잠깐만. 뭐, 뭘 알려 줘?”
인상을 찡그리고 물은 질문에 대답한 건 송여환이 아닌 자얀이었다. 녀석은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선 어처구니없는 말을 뱉어 냈다.
[뭐긴 뭐야. 당연히 이 세계에 적응하는 법들에 대해서지. 도련님은 싫다고 할 게 뻔하니 우리 강아지가 나한테 알려 줘야지?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선생님인데 독학하는 건 너무 외롭잖아.]
“…….”
[으응, 내 관심사가 너한테서 강아지로 옮겨지면 너도 좋은 거 아냐? 아, 뭐부터 하지? 식사 예절부터 하나씩 배워 볼까? 음…… 당분간 강아지는 나랑 밥을 먹어야 하니 외부자는 빠져야겠지? 내가 적응할 때까지 말이야. 그다음에는 문화에 대해 알아야 하니 이곳저곳 함께 좀 돌아다녀 볼까 해.]
“헛소리하지 마, 이 새끼야.”
송여환과 단둘이서 밥을 먹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희롱하며 실실 웃어 대는 자얀을 상상하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들었다. 저런 상스러운 인간 옆에 송여환을 덩그러니 둘 수는 없었다.
[헛소리 아닌데? 앞으로 일하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게 많아. 도련님 말대로 난 이제 이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야 하거든. 누가 날 책임져 주지 않을 거잖아, 맞지?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야.]
웃음기를 거둔 자얀이 흠, 목을 울렸다.
[이 세계는 서블이 존재했던 곳과 달라. 화폐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통하는 세계지.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들어. 처음 보는 것도 많지. 더 많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그러니까 내게는 돈이 필요해.]
“…….”
[겨우 벌레 하나 잡은 건데, 그걸로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내게 다가온 모든 걸 이용해 누구보다 부족함 없이 살아갈 거야. 한풀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녀석답지 않게 솔직했다. 하긴 괴물들의 살덩이를 씹으며 오로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하고 싶은 거야 많겠지. 비유하자면 아메리칸드림 같은 거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이 녀석에 대해 어떤 식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고……. 차라리 저렇게 많은 욕심을 부려 주는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백산처럼 다 죽이겠다며 나대진 않을 테니까.
그래, 자얀이 평범해지면 좋은 건 나였다. 녀석이 사회에 녹아들어 남들과 같은 일생을 살게 된다면 경계할 일도 없고, 더 나아가 싸울 일도 없을 거다. 에스퍼로서의 삶을 더 이상 이어 나갈 생각이 없는 나로선 바라던 바다. 저 녀석이 의지를 불태울 때 옆에서 밀어 주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송여환과 단둘이 둘 수도 없고.
“하아, 그래. 좋아.”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리는 있네. 하지만 너희 둘이 있는 건 안 돼. 그러니까…… 그 역할은 내가 맡는다.”
두 남자의 반응이 갈렸다. 송여환은 차분하던 표정을 집어 던지고 충격받은 것처럼 두 눈을 부릅떴고, 자얀은 휘파람을 불었다. 물빛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나를 담았다. 마치 원하던 일이 성사되어 기쁘다는 듯이.
“혀, 형이 할 필요 없어.”
송여환이 다급히 내 어깨를 잡았다.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파들거리는 손에서 진짜 싫다는 감정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나는 부러 모르는 척했다. 낑낑거리는 게 안쓰러웠지만 나 역시 양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저런 능구렁이 옆에 아기 강아지를 혼자 둘 수야 없지. 암, 그렇고말고.
“너 다른 일도 많잖아.”
“아냐! 당분간 누나가 자얀 씨 적응하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출퇴근하듯이 똑같이 잠깐만 봐 주고 오면 되는 거야.”
그럼 더더욱 안 되는 거잖아. 저 변태 새끼랑 매일, 빠짐없이 만나야 한다는 건데. 그 꼴을 봐야겠냐?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변동 사항은 일절 없다는 뜻을 무언의 압박으로 전달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