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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108화 (108/115)

108화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사람이 참아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 모른 척 넘어갈 수 있으나 송여환을 가지고 조롱을, 그것도 성적인 조롱을 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마.”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얀이 바닥을 뒹굴었다.

[아야, 아파……. 어우, 그럴 만한 힘이 있으면 탈출이나 좀 시켜 주지그래?]

“널 아예 묻어 버릴까 고민 중이니 입 다물지.”

[팔불출.]

퉤, 바닥으로 피 섞인 침을 걸쭉히 뱉어 내는 놈을 흘기고 있을 때였다. 드드득! 드드드드득! 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설마 무너지려는 걸까? 긴장으로 침을 삼키고 있자 소리가 더욱 커져 갔다.

드드득! 머리 위로 잔해들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따로 몸을 피할 공간도 없기에 긴급한 상황이 되기 전 능력을 사용해 뚫고 나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찰나, 희미한 사람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있습…….”

“……감지…… 두 명…….”

나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핥아 올리며 차분히 귀를 기울였다. 감각을 집중하자 소리가 또렷해졌다.

“안쪽으로 공간이 있는 거 같습니다!”

역시나 사람의 소리가 맞았다.

‘착각한 게 아니구나.’

구조대가 확실했다.

‘찾으러 올 줄 알았어.’

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그들이 더욱 빠르게 우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소리를 내질렀다. 능력으로 뚫고 나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한 방법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으로 굳었던 몸에서 힘이 주욱 빠졌다.

‘정말 모든 게 끝이 났구나.’

트드득, 꽉 막혀 있던 천장이 뚫리고 미세한 빛이 보인 순간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팍 튀어 올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 의미 모를 허무함, 기어코 해냈다는 벅참 등등의 감정들이었다.

‘……지켜냈어.’

주먹을 쥔 손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에스퍼 낙유성’으로서의 마지막을 잘 장식한 것 같아 큰 만족감이 들었다. 더 이상 누군가와 싸울 일 없는, 평범한 나로 살아갈 수 있겠지.

‘여환이, 송여환이 너무 보고 싶어.’

생각의 끝은 결국 너였다.

당장 달려가서 벅찬 내 마음을 모두 전하고 꽉 끌어안아 그의 체취를 마음껏 즐기며 웃고만 싶었다. 형이 해냈다고, 이제는 네 옆에서 사랑만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너무 설레서 숨이 흡, 들이켜졌다. 떨어지는 먼지와 잔해들조차 반짝거리며 아름답게 보였다.

그렇게 혼자 행복에 젖어 있을 때.

“형! 유성이 형, 거기 있어?!”

작게 뚫린 구멍 사이로 넘어온, 누구보다 다급히 나를 찾는 목소리. 상상이 아닌 진짜 송여환이 나타났다.

“형! 들려? 있는 거지!”

구멍이 점점 커졌다.

“……여…….”

잠깐 목이 메었다. 나는 침인지, 감정인지 모를 무언가를 꿀꺽 삼키며 빛보다 더욱 빛나는 존재를 향해 소리쳤다.

“여환아!”

기쁨에 젖은 큰 소리가 나왔다. 생전 이토록 즐거운 적은 처음이었다. 싸움의 여파로 인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건지, 아니면 여태 승리에 취해 있는 건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모든 게 다 좋았다. 그래서 피와 먼지 범벅인 꼴로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형! 그, 금방 구해 줄게! 어서요! 빨리 파 주세요! 사람이 미쳐 가나 봐!”

송여환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빨리 구조해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 라디오 듣듯 들으며 나는 미소 지었다.

“다녀왔어.”

* * *

나는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송여환을 슬쩍 흘겨봤다.

“이제 좀 떨어져도 되지 않냐.”

“안 돼.”

찰거머리도 아니고……. 건강검진도 받았고, 회복도 다 되었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녀석은 구조된 후부터 내게서 단 1㎜도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야 좋았는데 계속 이러니 조금 짜증이 났다. 옷 갈아입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심지어 밥 한 숟갈조차 내 손으로 떠먹지 못하게 했다.

극진히 보살펴 주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아니, 내가 무슨 백 살 노인이나 갓난아기도 아니고. 당연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지만 내 몸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 건강하다 못해 튼튼하단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괜찮다 호소해 봐도 이 극성 돌봄은 끝이 나지 않았다. 백산보다 질긴 새끼 같으니라고…….

“야, 덥다고.”

“형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너 때문에 없던 병도 생길 거 같아. 나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숨을 고르며 속마음을 삼켰다. 후…… 때리지 말자.

“절대!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내가 때리면 얘는 죽는다.

“나 요새 가슴 떨려서 잠을 못 자. 형이 아직도 그 구덩이 안에 있는 거 같다니까?”

아기라고 생각하자.

“꼬옥 붙어 있자. 내가 다 해 줄게.”

손대면 안 돼. 참아. 참아라.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막는다. 극한의 인내심 테스트였다. 나는 몸을 부들거리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러자 송여환이 헉 소리를 내며 갑작스레 나를 둘러업었다.

“봐! 아직 몸이 안 좋은 거야! 형 숨이 막 떨려! 의, 의사 부를까?”

시야가 휙 들리고 몸이 붕 뜨는 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가 펑 터지고 말았다. 나는 고함을 내지르며 녀석의 멱살을 잡아 집어 던졌다.

“야 이 X발, 좀 떨어져!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징글맞은 새끼야!”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끔뻑거리는 송여환을 구석으로 내몰곤 더욱 압박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환자는 내가 아니라 너다, 나가서 일이나 해라 등등. 성질, 아니, 지랄을 한껏 부려 댔다.

‘……젠장, 저질렀다.’

참았던 분노를 전부 쏟고 나니 후회가 들었다. 구석에서 훌쩍훌쩍 눈물을 찍어 내는 녀석이 너무 작고 여리게 보였다. 송여환은 축축이 젖은 얼굴로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곤 시무룩이 방을 나섰다. 마지막에 흘끔 돌아보고 ‘미워’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X발, 귀여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송여환을 따라 방을 나섰다.

“야, 같이 가. 뭘 또 혼자 삐쳐.”

따라붙으며 붙잡자 못 이기는 척 잡히는 주제에 됐다며 놓으라고 앙탈을 부린다. 조금 귀찮기는 해도 퍽 원하던 일상이었다.

알콩달콩 한참을 다투다 송여환과 저녁을 먹으며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자얀과 내 앞으로 여러 표창과 보상이 내려졌으나, 내가 받기 거절한 일화를 언급하며 아쉽지 않으냐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오리고기를 으적으적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단 0.01%도 아쉽지 않았다. 내가 목숨을 걸고 백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이유에는 오로지 송여환과 부모님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것뿐, 다른 건 없었으므로.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으로 각인 되는 게 싫었다. 그렇게 욕을 해 대던 다수의 익명이 이번에는 장하다 박수를 치는 게 솔직히 아니꼬웠다. 내가 표창을 하나라도 받고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면, 꼭 그들을 위해 헌신했노라 하는 뜻으로 비추어질까 봐 어느 공적인 자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완벽한 손절을 알리고 싶기도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제 ‘에스퍼 낙유성’은 이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나는 송여환과 여생을 조용히, 또 알콩달콩하며 보내고 싶었다. 더 이상 후회도, 미련도, 죄책감도 없이.

그나마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선우 형의 부모님인데…… 많은 고민을 하다 에스퍼일 적 모아 두었던 재산 전부를 그들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이걸로 빚을 청산할 수야 없겠지만, 다시 선우 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살고 싶지는 않기에 내린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송여환은 애인이 거지가 되었는데도 별걱정이 안 되는 건지 그저 잘했다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줄 뿐이었다.

‘나 이제 너 커피 한잔도 못 사 줘.’

녀석이 무슨 생각일까 궁금해 찔러 보자 어깨를 으쓱인 송여환이 내게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로 사 줘. 참고로 한도는 없다?’

‘네 돈으로 사는 거잖아.’

‘형이 결제하는 거면 형이 사는 거지. 아니면 아파트 하나 분양해 줄까?’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에 애인 하나 잘 둬서 길거리 노숙은 피하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앞으로 둘이서 살 집, 여행, 내 미래에 대해 쉴 새 없이 의견을 나누며 떠들던 중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자얀.’

그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음…….”

나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고민에 빠졌다. 무작정 모른 척을 하기에는 불안했다.

한때 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하던 녀석이 과연 21세기에 적응하여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이런 걱정은 ‘자얀’이라는 인간에 한한 것이 아닌, 그 녀석이 혹시라도 일으킬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제일 최악은 그가 제2의 백산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슨 고민 있어?”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걱정 어린 목소리에 내려놓았던 수저를 다시 잡았다.

“아냐.”

굳이 얘기를 꺼내서 송여환까지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얀을 떠올리면 고치의 잔해에 고립되었을 당시 했던 그 입맞춤이 떠올라 괜히 양심이 찔렸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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