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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106화 (106/115)

106화

‘아무래도 오늘 결판날 거 같은데…….’

똑같은 하루라고 해도 무언가 다름을 감지하는 사람의 감이라는 게 있지 않나. 바로 그 감이 말하고 있다. 이제 백산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이 끝날 것이라고.

“끝나면 저 녀석에게 지원해 주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두 분이 나라를 지켜 주신 만큼 보답은 해야겠죠. 걱정 마세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리자 여전히 스트레칭 중이던 자얀이 삐뚜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내 보모라도 돼?]

“알아들을 정도 됐으면 너도 이젠 한국말을 쓰지그래.”

[싫어.]

“그래…… 어련하시겠냐.”

녀석과 티격태격하며 나 역시 몸의 감각을 끌어 올렸다. 그러곤 한숨처럼 가 보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예전, ‘알파’라는 녀석과 대치했을 때 느꼈던 그 미묘한 고양감이 똑같이 찾아왔다. 깨도 깨도 클리어라는 단어가 뜨지 않았던 지겨운 싸움을 이번에야말로 끝내고 말겠노라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뿌연 연기가 시야를 덮는다. 아니, 피인가?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반대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아 있냐?”

박살이 난 공간 속에서 여러 잔해에 깔려 있던 자얀이 윽, 소리를 내며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뚜둑, 꺾인 목이 빙글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까스로…….]

머리를 털며 녀석이 답했다. 목소리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끝을 내고 싶은 건 저쪽도 같은가 본데? 평소보다 더 괴팍하잖아. 망할, 도대체 얼마나 때려야 죽는 거야? 바퀴벌레 같기는…….]

“동감이다.”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진 해 봐야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이거 혹시 몰라 가져 왔는데.]

자얀이 품속에서 봉인의 칼을 꺼내 들었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에 네가 꽂을 거냐 물어보니 그건 또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럼 왜 가져 왔냐.”

[흐흐, 부적.]

“또라이 새끼…….”

질린다는 투로 대꾸했지만, 녀석의 장난 아닌 장난으로 굳어 있던 몸이 조금 풀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장에 동료가 있고 없고는 꽤 커다란 차이를 보여 준다. 나는 후, 숨을 뱉으며 다시 한번 능력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난 각오가 됐는데. 너는?”

[아직 한강도 못 가 봤는데 죽을 수야 없지. 무엇보다 난 저 녀석을 갈기갈기 찢어서 그날 밤 아리아에게 네 애인을 처죽여 줬다는 편지를 쓸 거거든. 그럼 지옥에서 피눈물을 질질 흘리겠지? 상상만으로도 꼴좋네!]

“하, 꼭 써 줘라. 맞춤법 틀리면 쪽팔리니까 교정은 받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그런 말 해야 해? 진짜 안 맞아.]

녀석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저 멀리서부터 번쩍하고 날아오는 거대한 힘의 구체를 피해 몸을 굴렸다.

그렇게 다시, 2차전이 시작되었다. 뼈가 부러지고, 주변이 풍비박산되고, 해가 지고, 다시 뜨고, 입안에서 피비린내밖에 나지 않을 때까지…… 스스로를 한계까지 밀어붙여 백산과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

자얀 역시 인간 방패가 되기로 작정을 한 듯 팔다리가 날아가고, 머리통이 반이나 부서져도 실실 웃으며 몸을 재생했다. 아마 자얀과 내 머릿속에는 ‘죽인다’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 거다. 중간부터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에 모든 걸 맡겼다.

다행인 점은 불안정한 몸을 가진 백산이기에 우리보다 한계를 맞이하는 시점이 빨랐다는 거다. 끝없이 반복되는 전투에 몸이 무너지니, 의지는 고치로 향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치고 빠지는 길을 선택했겠지만, 최후를 결심한 만큼 우리는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고치와 맞섰다. 폭격이 시작돼 쑥대밭이 되어도 다치는 건 나와 자얀뿐이었으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하아…… 하, 윽…….”

주저앉으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흥분으로 이성이 마비된 탓이다. 광대한 지진과 울음소리 같은 비명이 고치에서 터져 나왔다. 백산도 단단히 열받은 거겠지.

나는 귀를 터뜨릴 듯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미간을 찡그리며 피비린내 묻어나는 숨을 뱉었다.

“하아…….”

[후으, 하, 맷집 좋네, 도련님.]

뚜두둑, 어깨를 돌린 자얀이 나를 흘끔거려 왔다.

“끈질기게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

아직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이 녀석도 나도 단명할 사주는 아닌가 보다.

[확 그냥 칼 꽂아 버리고 싶네…….]

자얀이 바닥으로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버텨. 버티다 보면 이길 거니까.”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니, 세뇌일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깨부수고 무너질 거 같은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며, 나는 계속해서 내게 외쳤다. 버텨. 버텨라. 이 악물고 싸워.

나는 바닥의 바닥까지 긁어내 이제까지의 화염구보다 크고 강렬한 걸 만들어 냈다. 화르르- 사납게 일렁이는 불꽃 꼬리를 단 구체가 곧 고치만큼 덩치를 키웠다. 과거, 알파를 잡았을 적 보았던 그 태양과 같은 모습이었다.

“……질린다. 우리 이제 그만 보자.”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단 한 톨의 힘도 남지 않도록, 눈앞이 하얗게 점멸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갔다.

[하하! 한 방 먹여 버려!]

광기 어린 자얀의 커다란 외침과 함께 망할 고치에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먹여 주었다.

“잘 가라!”

있는 힘껏 박아 넣으며 나 역시 웃었다. 이제 지긋지긋하다. 정말로 안녕이다, 개자식아.

─번쩍!

세상이 뒤집히고…… 콰앙! 키에에엑! 귀를 찢을 것 같은 비명이 터지며 내 의식도 같이 날아갔다.

* * *

[봐…….]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 님, 도…….]

아, 젠장.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느껴진다. 악! 소리를 뱉음과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깜짝이야.]

“뭐야…….”

내뱉는 목소리 한번 끔찍하네. 쇠 맛이 나는 입안을 한번 우물거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죽었으면 좀 나으려나 싶을 만큼 더럽게 아프다.

“X발…….”

[인사 한번 다정하다.]

“살아 있는 거냐, 죽은 거냐.”

[어느 쪽일 거 같아?]

“모르겠다. 존나 아파서.”

[하하하!]

자얀이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세히 보니 안구 한쪽이 없다. 내 몸이 아파 인지가 늦었는데…… 저 녀석의 꼴도 참 안타깝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처참했다.

“윽…… 하아, 여긴…….”

[지옥에 온 걸 축하하지.]

“진짜 지옥 같네.”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모두 고치의 잔재였다.

[이걸 이겼다고 해야 하나. 음, 눈물 젖은 승리?]

“그 말은 백산이…….”

고통도 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녀석이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씨익 웃는다. 정말, 정말로 백산이 죽었다고? 나는 침을 삼키며 마른세수를 했다. 당장 환호성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무언가 얼떨떨했다.

[별로 안 기뻐 보이네?]

“실감이 안 나.”

[하하, 뭐 그럼 대단한 장면이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 봤자 그 녀석도 괴물일 뿐이야. 그것도 불안정한. 도련님이랑 나, 거의 일주일은 치고받고 싸웠을걸?]

“그렇게 오래?”

[정확하진 않지. 나도 기억이 중간중간 날아간 상태니까. 그저 뜯고 부수고 했던 것밖에…….]

말끝을 흐린 녀석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그보다 우리 나갈 수나 있을까?]

“…….”

[뭘 해 보고 싶어도 지금 서 있는 게 힘의 전부야. 도련님도 마찬가지지?]

“구조…… 가 올 거야.”

[하! 퍽이나.]

은발을 탈탈 털며 꽉 막힌 고치 덩어리들을 몸으로 밀던 녀석이 신랄하게 본부 사람들을 비난했다.

[며칠씩이나 쾅쾅쾅 싸워 대던 걸 본 녀석들이야. 도중에 한 번이라도 지원을 온 적이나 있나? 전혀. 이대로 묻어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나는 대꾸 대신 당장에라도 쓰러질 거 같은 몸으로 벽을 같이 밀어댔다. 무언의 동의를 한 셈이다.

“그럼 뭐 X된 거네.”

[힘 좀 남아 있으면 이것들 좀 태워 줘.]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가능했으면 진작 태웠겠지, 너랑 미련하게 이 짓거리 하고 있겠냐?”

[제길. 이게 뭐야. 우리 영웅 맞아? 토사구팽도 아니고.]

“백산이 지옥까지 우리를 데리고 갈 심산인가 본데.”

[이봐, 농담이 나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보는 녀석에게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러곤 피식 웃으며 벽을 꾸욱 밀었다. 하지만 아무리 버둥대 봤자 우리를 가둔 고치의 잔해들은 꼼짝을 안 했다.

[배고파지면 주저 없이 널 잡아먹을 거야.]

주저앉은 녀석이 욕을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런 꼴인데 먹고 싶냐?”

[살아야지.]

“하아…… 됐다. 어차피 지금 우리 힘으로는 안 돼. 구조가 올 때까지 기다려.”

[안 온다니까?]

“와. 본부는 몰라도 그 녀석은 꼭 올 거야. 나를 찾으러.”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내가 왜 이렇게 침착했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자얀의 말대로 본부는 양심 팔아먹은 놈들이라 영 신뢰가 없지만, 내게는 송여환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을 녀석. 만약 내가 죽어도 그 시체까지 찾아내 확인할 녀석. 그래, 믿는 구석이 있으니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왔던 거다. 녀석은 날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찾아낼 테니까.

“올 거야.”

나는 다시 한번 단호히 말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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