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거대한 혼란이 다가왔다. 나는 식탁을 짚고 서서 식은땀을 흘렸다. 자얀에게 이러쿵저러쿵 잘난 척 말했는데, 정작 미래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건 나였다.
애초에 연애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절대적인 마음을 가지기 어렵다. 상대를 옆에 두고 싶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백산을 잡고, 더 이상 에스퍼가 필요 없는 세상이 왔을 때도 송여환은 낙유성이란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까?
……씨X! 도대체 내 매력이란 게 뭐야.
“아, 씹…… 머리 아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렴풋이 백산을 처치하고 난 후 송여환과 단둘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단둘이’에는 꽤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돈도 돈이지만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송여환의 지속적인 애정 아닌가. 아무것도 없는 내 옆에 녀석이 남아 줄까? 손가락이 식탁 위를 초조하게 톡톡 두드렸다.
‘송여환은 벌써 본인 형, 누나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고 있는데…… 나는, 미래에 뭐 하지?’
따지고 보면 백수였다.
“가, 게라도 해야 하나…….”
패닉에 빠져 중얼중얼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뭐 해?”
“아, 어. 어…….”
“나 배고파. 형이 한 거 먹으려고 후다닥 씻고 나왔어.”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배시시 웃은 녀석이 의자를 빼내 앉았다. 그러더니 차려진 갈비찜을 보곤 우와, 감탄사를 뱉는다. 그거 아주머니가 한 거야. 나는 속마음을 숨기며 녀석의 앞자리에 앉아 같이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어…… 어.”
큼직한 살코기를 집어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녀석이 음? 하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방실거리던 웃음을 지우고 무표정하게 음식물을 씹는다. 뭐야, 저 되게 맛대가리 없는 표정은? 아주머니 음식 맞는데……?
“형.”
꿀꺽, 음식물을 삼킨 녀석이 물컵을 들며 나를 불렀다.
“왜.”
“이거 형이 한 거 아니지?”
시큰둥하게 말한 녀석이 물을 들이켜 입안을 헹구곤 젖은 입술을 닦아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솜씨잖아.”
눈치가 빠른 거야, 입맛이 예민한 거야? 아니…… 하긴, 내가 이렇게까지 맛을 낸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건가. 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뭐야, 형이 한 건 어딨는데. 나 그거 먹으려고 엄청 기대했는데!”
별로 기대한 표정은 아니었는데.
“아, 생각해 보니까…… 아주머니가 해 놓은 음식들이 있는데 굳이 내가 한 맛없는 걸 먹는다는 게…….”
“뭐? 맛없다고 누가 그래.”
“아니. 내 말은-”
“날 위해 한 요리인데 어떤 싸가지 없는 녀석이 그따위로 말을 해?”
인상을 찡그린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가 구석으로 밀어 둔 볶음밥과 계란탕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어차피 안 먹을 거라 생각해서 데워 두지도 않은 탓에 볶음밥이 굳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만들며 간도 안 봤다. 맛을 장담할 수 없으니 먹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도 송여환은 그 차가운 걸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야, 야.”
누가 빼앗아 먹을까 걱정하는 햄스터처럼 양쪽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음식을 욱여넣은 송여환은 한참을 우물거리더니 나를 보곤 씨익 웃음 지었다.
“참 나, 맛만 있구먼.”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녀석을 보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안심시키듯 엄지손가락까지 척 들어 보인다. ……그 정도로 맛있다고? 믿을 수 없어 수저로 볶음밥을 퍼 입안에 넣었다. 평생을 맛있는 음식만 먹고 살아온 녀석이 괜찮다고 할 정도라면―
“윽.”
뭐야? 심각하게 맛이 없는데? 나는 ‘이 녀석 미각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싶은 얼굴로 송여환을 쳐다봤다. 시고, 짜고, 달고…… 아무튼 형용할 수 없는 사차원의 맛이 났다. 이런 걸 엄지까지 들어 보이며 먹는다고?
“야, 먹지 마.”
“왜. 맛있는데.”
송여환은 내가 음식을 가져갈까 봐 그릇째로 들고 와구와구 퍼먹기 시작했다. 이모님들이 해 주신 완벽한 음식들을 두고 왜 저런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려는 건지. 아무리 말려 봐도 녀석은 기어코 그릇을 전부 비워 냈다.
“잘 먹었습니다. 아, 배부르다.”
“야, 너…… 미각이 고장 난 게 틀림없어.”
내 말에 송여환이 작게 웃었다. 그러더니 뺨을 긁적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했다.
“난 진짜 좋았는데.”
“뭐?”
“형이 해 준 음식인데 맛이 없을 리가 없잖아. 사실, 아까 형이 밥해 놨다고 했을 때 너무 기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심장이 너무 뛰어서 참느라 애 좀 먹었어. 아마 완전 바보 같은 표정 짓고 있었을걸.”
그럼 떨떠름하던 게…… 싫어서가 아니라 좋아서 고장 난 거였어?
“형?”
마주 본 채 눈을 껌뻑거리는 녀석을 보자니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가 일렁거렸다. 저 맛없는 걸 뭘 그렇게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먹고…….
“…….”
문득 녀석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동시에 아까까지 날 불안하게 하던 모든 고민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백수가 되든, 요리를 못 하든, 매력이 없든 송여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녀석은 평생을 사랑하겠다는, 그 어려운 걸 해내고 말 것이다.
“야.”
“어?”
“키스해도 되냐.”
“콜록, 콜록! 뭐, 뭐?”
“그냥, 사랑스러워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나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럽기보단 그저 전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많이, 굉장히, 사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뭐지…… 오늘 내 생일이야?”
“너 생일이냐?”
“그건 또 그거대로 상처.”
“농담이야.”
“그럼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자꾸 꼬투리 잡으면 안 하고.”
“나 완전 준비됐는데. 이제부터 합죽이 할게.”
합! 입을 다물고 조용히 눈을 감는 녀석이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옅은 색소의 머리카락도 좋고, 기다란 속눈썹도 좋고, 복숭앗빛 뺨도 참 예쁘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가만히 웃다 송여환에게 다가가 조용히 입을 맞췄다. 분명 맛대가리 하나 없는 볶음밥을 먹은 입술일 텐데 왜 달기만 할까.
알콩달콩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함께 침대에 누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시간이었다. 송여환은 늘 그렇듯 내 다리를 주무르며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라든지 ‘내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든지, 사람 마음 살살 녹이는 말을 쏟아부어 다리가 아닌 마음까지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좋으신가요. 고객님.”
“……회원 등록하고 갈게요.”
“하하, 이젠 받아치네?”
“응. 근데 안마사 선생님 손이 점점 불손해지고 있어.”
“어허, 씁- 프로 정신이라고 말해 주실래요? 원래 안마라는 게 안쪽까지 해 줘야 피로가 쫙 풀리는 겁니다, 고객님.”
송여환이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허벅지 안쪽까지 스르륵 손을 넣어 야무지게도 눌러 댔다. 내 피로를 풀어 주는 것보단 본인 흑심 채우는 거 같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타인이 몸에 닿는 건 싫은데 송여환처럼 예쁜 놈이 닿는 건 뭐, 나름 좋았고.
“어? 고객님 표정도 점점 저랑 같아지는데요?”
“착각 아닐걸요.”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녀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허벅지 안쪽을 지분거리던 손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송여환이 내게로 슬쩍 몸을 붙였다.
“착각 아니면 나 되게 곤란해지는데…….”
“어떻게 곤란해지는데?”
“우리 형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녀석이 내 귓불을 살짝 물었다 놓곤 뺨에 쪽, 입을 맞췄다.
“나도 되게 좋아해.”
능글맞은 녀석의 말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혹 한번 끝내주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똑같네’라며 대꾸를 해 주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원래 행복은 짧고 불행은 길다고. 송여환과의 달콤했던 밤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다시 위험천만한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자얀과 함께 중무장을 한 채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누에고치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지겨운 싸움의 끝을 내 봅시다.”
김강민이 무전기를 든 채 다가와 말했다. 누가 보면 본인이 싸우러 나가는 줄 알 정도의 결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싸움의 종결을 가장 원하는 건 나인데.
“낙유성 에스퍼. 시민들은 미리 경계 지역 밖으로 이동했습니다. 또 보시다시피 저희 쪽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방어벽을 설치했습니다만…… 백산의 공격이 시작되면 어찌 될지 모르겠군요.”
“피해가 안 가게 해 보겠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강민이 응원을 하듯 무심히 내 어깨를 툭 두드렸다. 손길은 투박했으나 내뱉는 목소리는 아주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이들 역시 많이 버틴 거다.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겠지.
“항상 말씀드리지만,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으나…… 그게 어렵다는 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잘 버텨 주었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니 미리 말씀드립니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본 김강민이 얕은 한숨을 뱉다 아주 천천히 내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그러니 최후까지 꼭 목숨 부지하여 돌아오십시오.”
꽤 공손히 꾸벅 인사한 그에게 나는 픽 입꼬리를 올린 채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희생될 생각은 없으니까.”
“낙유성 에스퍼다운 말이군요.”
그러곤 옆에서 쭉쭉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자얀을 흘긋 바라보았다. 녀석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마치 사냥을 시작하기 전의 짐승과 같이.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