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자나?’
조명만이 켜진 방 안. 송여환은 아까와 달리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기다리겠다 했지만 피곤했나 보다. 샤워라도 빨리 끝내고 나올 걸 그랬다. 매일 밤 간단한 맥주를 마시며 소소한 일과를 공유하곤 했는데, 안 하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걸음 소리를 죽여 조명을 끄고 침대로 다가가 누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송여환은 죽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조심히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커다란 창을 타고 넘어온 달빛 아래, 녀석의 고운 얼굴이 보였다.
‘여우 새끼.’
아무리 봐도 닮았단 말이지. 나는 느슨히 풀어진 채 녀석의 얼굴을 마음껏 감상했다. 속눈썹도 길고, 피부도 깨끗하고, 무엇보다 오밀조밀 잘 모인 이목구비가 참 예뻤다. 저 감긴 눈을 떠 나를 보며 사랑한다고 배시시 웃을 때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보기만 하는 것과 달리 촉감까지 느껴지니 영 죽을 맛이었다.
‘키스하고 싶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고민했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몰래 엉큼한 짓을 하는 건 취향에 맞지 않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입술, 부드럽네.’
고민에 빠져 엄지로 녀석의 입술을 조심조심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안 할 거야?”
흠칫, 입술을 쓸어 내던 손이 굳었다. 안 자고 있던 건가? 너무 놀라 숨까지 잠시 멈춰 버렸다. 뻣뻣이 굳어 눈만 껌뻑거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놀라, 형 거 만진 건데.”
“안, 잤네…….”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송여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해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들렸다. 여전히 긴 침묵이 이어지자, 송여환이 나른히 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눈 안 뜰게. 계속해도 돼.”
“…….”
“해 줘.”
그 말이 꼭 마법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끌리듯 몸을 움직여 망설임 없이 녀석의 부드러운 입술에 내 입술을 살포시 맞대었고, 그대로 천천히 숨결까지 머금었다.
“하아…….”
서로를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던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내며 녀석과 시선을 맞췄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르르 웃음 지었다. 공기마저 달콤하다는 게 이런 걸까?
“꿈은 아니겠지.”
송여환이 내 뺨을 만지작거리며 나른히 속삭였다. 방 안에는 둘뿐이었지만, 녀석도 나도 비밀스러운 놀이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 서로에게 장난을 걸어 댔다.
“또 오버하려고.”
“하긴 꿈일 리가 없지. 겨우 상상 따위로 이렇게 큰 만족감은 느끼지 못할 거야.”
“너 느끼한 거 알아?”
“아직 멀었지. 어디, 사랑을 좀 속삭여 줘?”
“미쳤냐.”
“이리 와, 자기야.”
우리는 그렇게 작은 웃음을 터뜨려 가며 계속해서 서로의 뺨을 쓸고, 또 가끔은 입을 맞추며 놀았다.
* * *
[상당히 역겹네.]
자얀이 뱅그르르, 의자를 돌리며 고개를 젓고선 테이블 위로 서류를 던졌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종이 뭉치에는 백산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의 거친 행동에 회의를 진행하던 김강민과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왜 또 지랄인데?”
[지랄? 내가?]
분위기를 한껏 망쳐 놓고도 되레 제가 뭘 했냐며 뻔뻔히 구는 녀석이 어이가 없었다. 자얀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나를 턱짓했다.
[지랄은 내가 아니라 도련님이 했겠지. 이봐, 어제랑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 네가 욕먹고 시무룩해져서 내가 얼마나 재밌었는데. 도대체 뭘 했기에 하루아침에 단내를 풀풀 풍기며 종일 싱글벙글거리는 거야?]
내가 뭘 싱글벙글거렸다는 건지 모르겠다. 뭐, 확실히 송여환과의 짙은 신체 접촉 이후 쌓여 있던 독이 또 해소되긴 했지만…… 딱히 히죽거리진 않았는데? 컨디션이 좋아져서 그렇게 보이나?
아니지. 저 새끼 말을 내가 왜 신경 써 줘야 해. 내가 좋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아, 재미없어. 됐고. 빨리 저 벌레 새끼나 처죽이러 가고 싶어. 백날 회의해 봐야 뭐 해? 어차피 이 아가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잖아. 애초에 이 자리에는 왜 껴 있는 건데.]
오늘따라 불만도 많다. 자얀은 김강민과 다른 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한껏 이죽거린 후 서툰 한국말을 하며 살살 눈웃음을 쳤다.
“그렇, 죠?”
반짝이는 은발과 꽤 예쁘장한 얼굴 때문인지 겉으론 무해해 보였다. 그 때문인지 다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장단을 맞춰 주고 싶다는 듯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병신들. 뭘 좋다고 웃어?]
“적당히 해.”
[미안. 우리 도련님께서 호구 기가 있다는 걸 또 까먹었지 뭐야.]
“야. 다시 땅속 아래로 처박히고 싶냐?”
[할 수는 있고? 벌레 하나 못 잡는 주제에.]
내 말을 받아치는 녀석의 입가로 즐거운 웃음이 번졌다. 나는 그제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미친 새끼, 할 일도 더럽게 없다.’
원래 정신이 회까닥한 놈이니 굳이 시비를 거는 이유가 궁금하진 않았다. 그냥 심심해서, 아니면 내가 싫어서, 혹은 서열을 잡으려는 걸지도 모른다. 놈과 나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서로에게 호감을 보인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이야 목표가 같으니 어찌어찌 협력 관계를 이어 가고 있지만, 만약 수틀린다면 백산과 대치할 때 녀석도 함께 묻어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이 들었다.
“저기, 두 분이서 왜…….”
나와 녀석이 서로를 응시하며 성난 기운을 만들어 내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김강민이 끼어들어 중재했다. 나는 자얀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른 후 김강민과 다른 이들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 달라 요청했다. 그들은 혹여나 우리가 싸움을 벌일까 걱정되는 눈치를 보이긴 했지만, 순순히 알겠다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야. 잘 들어. 서로 꼴 보기 싫은 건 피차일반 아냐? 그럼 씨X 닥치고 백산만 잡으라고. 그럼 너도, 나도 자유니까. 네가 백산 다음으로 이 세계 사람들 다 처죽이겠다는 뻘짓만 안 하면 우리는 평생 마주 볼 일이 없어. 또…….”
쾅, 테이블을 내려친 나는 짜증스러움이 한가득 담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너도 그 빌어 처먹을 세계보다 여기가 낫다며. 그럼 이용하라고, 병신아. 영웅이 돼서 떵떵거리며 살 만큼의 재력을 쥐면 되잖아. 걱정 마, 백산만 죽이면 네가 싫다 해도 이곳에선 그렇게 될 테니까. 그러니 시비 작작 걸고 하라는 것만 해.”
내 성질에 녀석이 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서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훑는데, 숨소리 하나만 잘못 새어 나와도 바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지던 순간이었다. 등줄기를 사악- 훑고 가는 오싹한 감각. 덜컹, 나 말고 녀석도 반응했다. 우리는 기운을 거두어들이며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은 공동의 적을 잡아야 할 시간이었다.
* * *
자얀과 함께 고치로 잠입했다.
[우리 벌레는 아주 잠꾸러기야. 보고 싶어 혼나는 줄 알았네.]
신이 나서 뚜두둑, 뚜둑 목을 꺾는 녀석에게 조심성 없이 굴지 말라는 경고를 날린 후 조용한 내부를 훑었다. 분명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축적된 에너지가 클 것이다. 물론 이쪽도 새로운 카드를 준비하긴 했지만…….
“손님이 많군.”
깊은 생각을 뚝 끊고 들어온 목소리.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백산이 서 있었다.
“죽지 않았군. 그리움.”
백산의 시선이 내게 또렷하게 꽂혔다.
[으응, 그리움? 너 부른 거야? 아하핫! 별명도 참 많아. 도련님.]
“닥쳐, 좀.”
옆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녀석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놀러 온 줄 아나, 새끼가.
“그런데…… 너는 뭐지?”
백산의 기다란 손가락이 자얀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나를 실컷 놀리던 자얀의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 졌다. 물빛 눈동자에 혐오가 가득 차올랐다. 동시에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이거 참, 알아도 몰라도 열 받으니 어째야 하나.]
“그 언어, 이쪽의 언어가 아닐 텐데……. 혹시 네놈은?”
무언가를 알아챈 듯 백산이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투에서 어째 그립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자얀 또한 느꼈는지 녀석이 더욱 불쾌하다는 티를 풍겼다.
[고향 친구 만나니 되게 반갑나 봐? 하하, 유감스럽게도 난 너 같은 벌레 새끼한테 말해 주고 싶은 건 하나도 없는데. 그냥 네놈을 처죽이러 온 영웅이라 생각하면 편할 거다.]
백산의 말을 뚝 끊어 낸 자얀이 하핫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싫을수록 웃음을 띠는 것 같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로 보자면 나를 싫어하던 것은 애교 수준이었다. 자얀의 말을 가만히 듣던 백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 와 뭐가 중요하겠나. 그저 사라질 부질없는 것들인데.”
[으응, 자기소개하는 시간이야?]
말을 끝냄과 동시에 커다란 힘의 부딪침이 일어났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