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됐고. 나 오늘은 공부하기 싫어.]
노려보고 있자니 놈이 몸에 힘을 주욱 빼며 흐느적거렸다. 아주 놀러 왔지?
“그게 아니라 전략 회의라고.”
[어쨌든.]
“하아…… X발, 괜히 꺼냈군.”
[하하!]
욕을 듣고도 뭐가 좋은지 실실거린다. 녀석은 콧노래를 옅게 부르다 나를 향해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놀러 갈래.]
“뭐?”
[생각해 봐, 도련님. 내 개인적인 원한이든 뭐든…… 여기 버러지들이 내 덕을 보는 건 맞잖아? 근데 정작 나는 짐승 새끼처럼 갇혀서 별 재미도 없는 공부나 처하고 있어야 하다니. 너무 억울해. 그 신기한 오락거리만 해도 그렇고, 아마 내가 모르는 별천지가 가득 있겠지?]
“지금 그런 걸 할 때가-”
[뭐 어때. 사기 충전이라고 보면 되지. 내가 이 세계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더 좋은 건 그쪽들 아냐?]
개소리를 줄줄 늘어놓으며 나가고 싶다고 다섯 살 꼬맹이보다 더한 똥고집을 부리는 녀석을 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참자. 참아라. 지금 죽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먹이 꽉 쥐어지고 어금니가 까드득 소리를 낼 정도로 맞물렸다. 나는 인내심의 바닥의 바닥까지 긁어 참았다.
“후우…… 뭘 하고 싶은데.”
[영화! 영화라는 걸 보자. 그러고 카페라는 곳을 가 보는 거야. 레스토랑이란 데서 식사도 하고.]
저걸 혼자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본부에 맡기자니 이능력 없는 일반인들이라 놈이 마음먹고 사고 친다면 말릴 수도 없을 테다. 영화 보고, 카페 가고, 밥 먹고…… 꼼짝없이 같이하게 생겼다. 녀석이야 신기하니 해 보고 싶다는 거겠지만 이 모든 걸 송여환이 알게 된다면…….
‘뭐어? 내가 그 새끼 완전 음흉한 눈깔 하고 있다고 했지! 그거 완전 데이트 코스잖아! 칼! 총! 당장 죽여 버릴 거야!’
아,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뭐 해? 안 가?]
나는 원수 놈을 노려보며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냈다.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빠르게 끝낸 후 복귀하자. 그게 일단의 목표였다.
‘물론…… 송여환 모르게.’
백산과의 전투 때문에 영화관은커녕 같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데, 저놈과 나란히 데이트 코스를 밟았다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음, 끔찍하군. 나는 각오를 다지고서 재촉하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고 나갔다.
서울의 중심부는 고치 때문에 파괴되어 그 외각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도 사람은 적응을 한다고……. 고치의 피해가 덜한 곳은 생각보다 활기가 넘쳤다. 물론 영화관 같은 곳은 운영하지 않아 작은 DVD방을 찾아야 했지만.
[아리아에게 고마울 지경이야. 봉인이 풀리니 이런 환상적인 세계로 오게 되었잖아? 으응, 이곳에 오기 위한 고생이었다 생각하면 뭐…… 그래도 X같은 건 똑같네.]
싸구려 빈백에 누워 영화를 관람하던 녀석이 나른히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저 작은 화면에 사람이 갇혀 있다며 신기해하더니 곧 설명해 주지 않아도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곤 얌전히 영화를 감상했다. 금세 흥미를 잃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취향에 맞았는지 입을 다물고 연달아 두 편을 봤다.
[편안히 누워 다른 이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게 몇 번을 생각해도 놀라워.]
화면에 고정된 눈동자는 어딘가 텅 비어 보였다. 녀석은 원래 살던 세계의 일상이 이곳에선 그저 하나의 오락거리인 이야기로 취급받는다는 게 무척 묘한 듯했다. X발, 하필 선택한 영화가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내용일 게 뭐람.
[저 녀석은 사냥하는 방식이 잘못됐어. 나라면 조금 더 날카로운 창을 만들 거야. 주변에 미끼를 던지고…….]
분석하는 시선이 역시 전문가다웠다. 나는 하품을 하며 언제 끝이 나는지만 기다렸다. 그런데 이 짜증 나는 놈이 또 뭔 장난기가 발동한 건지 나를 보며 툭 말을 걸어왔다.
[이런 곳, 강아지랑도 와 봤나?]
“……닥치고 보기나 해.”
[어둡고 좁은 게, 딱 아이 만들기 좋은 장소인데.]
녀석의 저질스러운 멘트에 픽 입꼬리를 올렸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가게 주인이 고생 좀 하지. 그런 걸 개념이 없다고 표현해, 이곳에선.”
[얼마나 개념이 없는 건지 궁금한데? 예시를 좀 보여 봐. 어차피 도련님은 나한테 잘 보여야 할 입장이잖아. 이것도 다 공부라고?]
“하, 봉인됐을 때 네가 그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이랑 맨날 한 짓거리를 하라고?”
코웃음 지으며 받아치자 녀석의 눈빛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와아, 그거 참 나도 몰랐던 내 일화잖아. 내가 괴물들이랑 난교라도 했다는 거야? X발, 상상 한번 끝내주네.]
“아니면 말지 뭘 그렇게 흥분해. 기분 째지게.”
[도련님은 참…… 죽이고 싶을 때가 많아.]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하, 됐고. 나와. 영화 끝났어. 두 편이나 봤으면 됐잖아.”
기분이 상한 건지 아니면 영화가 질린 건지 녀석은 별 대꾸 없이 나를 따랐다. 그 후로도 미술관, 카페, 심지어 맛집 투어까지 한 녀석은 해가 지니 복귀해야 한다는 내 말에 아쉽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X발, 이 정도면 됐지.
[근데 이제 와 묻는 것도 웃기지만 우리는 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전부 맨얼굴인데.]
선글라스에 모자, 마스크까지 쓴 녀석이 투덜거렸다. 좀 더 생생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싶은데 이것들이 방해된다며 계속 구시렁거렸다.
“시끄러워. 모자 벗지 마.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어지간히 시선을 끄는 외모를 가졌다는 자각이 없는 건지 녀석은 조심성이 없었다. 들키면 안 된다고, 자식아. 나 역시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한 번 들썩였다.
시간이 늦어지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평소에도 늦는 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이 시간대면 집으로 돌아갔기에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실제로 송여환에게서 오늘 늦냐는 메시지가 두 번이나 왔다.
“야, 이만하면 됐잖아. 이제 돌아가야 해. 백산 처죽이고 네 멋대로 다니면 되잖아.”
[왜 그렇게 급해? 도련님도 즐겼으면서.]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네? 네 옆에서 내내 죽상 짓고 있던 건 어느 낙유성이냐?
[으음, 뭐 가긴 가는데…….]
가는데? 왜 말끝을 늘이는 거지, 불안하게.
[이 세계에도 커다란 강이 있다며. 한강. 그것까지만 보고 가자, 도련님.]
뭐? 미쳤냐? 나는 헛소리 말라며 녀석의 멱살을 콱 잡아끌었다. 제정신이야?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나는 분명 해 줄 만큼 해 줬다. 그러니 녀석도 이만해야 하는 게 도리에 맞았다.
“어리광 작작 부려라.”
[응? 확 이대로 튀어 버린다.]
“이 새끼가 진짜…….”
한강에 가자는 녀석과 닥치고 따라오라는 나의 말싸움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다. 옥신각신하며 난리를 피우다 결국 선글라스가 녀석의 손에 맞아 휙 날아갔다.
“하.”
나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녀석을 노려보다 바닥에 떨궈진 선글라스를 줍기 위해 잠시 몸을 돌렸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행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알아봤는지 두 눈을 크게 뜬다.
‘이런 X발.’
황급히 선글라스를 주워 쓰고 여전히 한강, 한강 노래를 부르는 녀석을 끌고 자리를 뜨려 했다.
“미친…… 지금 같은 상황에 놀러 다니는 거야?”
충격받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만 아니었다면 이미 자리를 벗어났을 거다.
[와우, 여기나 거기나 참 도움받는 것들은 여전하다.]
녀석도 알아들었는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
[역겨워. 그렇지, 도련님?]
이죽거리는 녀석은 어째 즐거워 보였다.
* * *
‘[좋은 구경했으니 됐어. 이만 갈게. 으응, 도련님 욕먹는 거 보니 내 마음이 다 아프네?]’
재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자얀을 다시 본부 지하에 처박아 둔 뒤 급히 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종일 일하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송여환은 늦은 시간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홍빛의 은은한 조명을 켠 채 책을 읽고 있는 송여환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왜 안 자고.”
“아, 왔어? 으음, 형 보고 자려고 기다렸지.”
바깥 냄새난다. 송여환이 내 손을 잡아당겨 제 뺨으로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손바닥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 온기에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 들어 설핏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 더러워.”
“안 더러워. 형이 나한테 더러울 일은 없어.”
“씻고 올게. 그대로 자도 돼.”
“아니. 기다릴래.”
송여환의 뺨을 쿡 찌르며 말을 전하자 고개를 저으며 귀여운 고집을 부린다. 그 모습에 방금까지 최악의 최악을 달리던 기분이 어느새 눈 녹듯 사르르 풀리고 말았다.
나는 물을 맞으며 자꾸만 픽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사람들이 반려견을 키우는 이유도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집에 들어오든 늘 똑같은 애정으로 나를 반기는 존재.
‘뭐, 저 녀석은 반려견이 아니라 반려인이지만.’
……응? 나 방금 되게 부끄러운 생각하지 않았나?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점점 송여환화 되어 가는 것 같다.
‘젠장.’
뺨이 뜨거운 건 전부 물 온도가 높아서라는 핑계를 대며 괜히 세수만 무한 반복했다. 그렇게, 도를 닦듯 불경한 생각을 물로 씻어 내리며 야릇함을 떨쳐 낸 뒤에야 욕실을 당당히 나올 수 있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