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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99화 (99/115)

99화

[너무 다르지 않아, 이거?]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리라는 거겠지. 일부러 가져다준 애한테 투정 부리지 마.”

[애? 지금 저 시커먼 걸 보고 애라고 했어? 와아, 도련님 정말 사랑에 빠졌구나? 아주 보기 역겹고 좋아. 응?]

자얀이 팔짱을 끼며 빈정거렸지만 별 타격은 없었다.

“입 닥치고 공부나 해. 내일까지 알려 준 범위 전부 외워 놔.”

[가려고?]

“왜. 시커먼 사내놈이 외롭냐?”

비꼼을 그대로 돌려주자 녀석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다.

[뭐야……. 우리 도련님, 생각보다 강아지 많이 아끼는구나?]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이러면 나 진짜 슬슬 재밌어지려는데?]

미친 새끼. 나는 헛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며 녀석을 흘겨보곤 송여환에게 돌아가자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송여환이 잔뜩 성났던 얼굴을 싹 지워 버리고서 급히 짐을 챙겨 든다. 하여간 단순하고 귀여운 새끼다.

“형, 빨리 가자.”

송여환이 내 어깨를 감싸며 유독 치댔다. 뭘 경계해서 하는 행동인 줄은 알겠는데, 저 은발 새끼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 나는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뿌리치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편해진다면야, 뭐…… 못 할 것도 없지.

[보기 좋은 연인이야~ 아주 드러워 죽겠어! 휘익! 가서 내가 해 줬던 것처럼 엉덩이 사이 꿀이나 빨아 달라 그래, 도련님!]

뒤에서 조롱해 대는 자얀은 깔끔하게 씹어 줬다.

* * *

“같이 있기 불쾌한 새끼야.”

알아듣진 못하지만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송여환은 운전대를 잡으며 답지 않게 욕을 했다. 나는 진정하라는 의미로 녀석의 뺨을 살살 쓸어 줬다.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라고 하면 백 퍼센트 싸우겠지.

“형 보는 눈깔이 심상치 않았어.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X발. 하, 저걸 어떻게 죽이지?”

“죽이면 안 되지. 죽어도 쓰임새는 다하고 죽어야지. 그러라고 봉인을 푼 건데.”

차가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흘깃 본 송여환이 히죽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뺨에 쪽, 입을 맞춰 왔다.

“욕해서 미안해. 근데 다음에 저 녀석 앞에서 뽀뽀해도 돼?”

“아니.”

“…….”

젠장, 대답이 너무 빨랐나?

“둘…… 이 있을 때만 해. 괜히 보여 줄 필요 없잖아. 그런, 그, 소중…… 한, 거니까…….”

또 토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그라드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말하자 다행히도 잘 먹혔는지 송여환이 감동받은 얼굴로 혀엉! 하며 매달려 왔다. 아직 출발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아무리 봐도 형을 보는 시선이 너무 더럽고 음흉해서…… 나도 모르게 경계하고 있었나 봐.”

그 새낀 그냥 음흉하게 생긴 거다. 나는 속으로 자얀을 비꼬며 송여환을 향해 단호히 말했다.

“절대. 나한테 그런 흑심 품을 놈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

“형은 형 매력에 대해 너무 몰라. 그러니까 매일 나만 불안하지. 형이 얼마나 예쁜데.”

……놀리는 건가?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게 생긴 건 내가 아니라 송여환이다. 만약 저 말이 진심이라면 송여환은 지금 당장 안과를 가야 한다.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녀석을 보며 참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냥 어색하게 웃는 걸로 상황을 종료했다.

* * *

놀랍게도 자얀은 어느 정도의 회화를 며칠 만에 익혔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건지, 에스퍼라서 그런 건지, 그도 아니면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건지. 서툴긴 했지만, 의사소통이 아예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더 재밌는 점은 자얀의 언어 습득에 제일 기뻐한 사람이 송여환이라는 점이다.

“와아, 이제 형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잖아!”

아, 그 부분이 마음에 드는 거구나. 나는 신이 나서 아침을 차리는 송여환을 보며 큼, 목을 풀었다.

과외는 끝이지만…… 전투 합을 맞추거나 그 외 앞으로도 공유해야 할 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저렇게 싫어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얼마나 싫은 티를 내는지 그 뻔뻔한 자얀마저 뒤통수가 뚫릴 것 같다 말할 정도였다.

‘[이봐, 내가 널 덮치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노려보는 거야? 이러다 그 벌레를 죽이기 전에 내가 강아지에게 살해당할 거야.]’

자얀은 반쯤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겠지만 집에 와서 은색 물건만 보면 죄다 부숴 버리는 송여환을 미루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말이 아닐까 살짝, 생각했다.

“오늘은 혼자 다녀올게.”

나는 가죽 재킷을 걸치며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뭐?”

“너도 요새 제대로 일 배우느라 피곤하잖아. 그런 와중에 나까지 따라다니고.”

“아니야, 괜찮아. 그 새끼랑 둘이 어떻-”

“송여환. 앞으로는 내가 자얀과 둘이 있어야 할 일도 많아. 너도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잖아. 고집 그만 부리고 넌 네 할 일을 해.”

또, 또 꿍해진다.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송여환에게로 다가갔다. 저 ‘나도 에스퍼였으면……’ 하는 표정이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오히려 네가 위험하지 않아 좋은데.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녀석의 어깨를 위로하듯 살살 쓸어 냈다.

“일이 다 끝나면 난 백수가 되잖아. 그때를 위해 지금 네가 열심히 해야지. 너희 누나, 형이 우리를 책임지진 않을 거 아냐. 나가서 같이 살자며.”

그제야 송여환의 두 눈에 반짝임이 짠, 하고 생겨났다. 녀석은 얕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나를 끌어안았다. 가까이서 풍기는 녀석 특유의 씁쓸하고 단 냄새에 나 역시 기분이 몽글해졌다. 이젠 이 단단한 어깨와 듬직한 품이 익숙하다 못해 좋았다.

“형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어리광을 부렸지. 자꾸 초조했나 봐.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형 옆에서 하려는 걸 보니…….”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냐?”

“어쩔 수 없어. 좋아하는 사람한테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남자는 없으니까.”

녀석이 낮게 웃음 지었다. 부족한 모습이라니, 그런 거야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물며 송여환 정도면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지 않나? 예쁘게 생겼고, 집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몸도 좋…… 잠시만. 나 방금 뭔가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않았나?

귓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낀 나는 괜히 시간 핑계를 대며 녀석을 떼어 냈다.

“그…… 알면, 네 일이나 잘해. 나 늦었어. 간다.”

뒤에서 송여환이 큰 목소리로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흘긋 보니 손까지 붕붕 흔들어 대고 있었다. 몇 분 전까진 우울해하던 주제에, 진짜 웃기는 놈이야. 나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을 빠르게 정리한 후 녀석과 조용한 곳으로 가 아무런 걱정 없이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힘내자.”

한숨처럼 말이 나왔다. 이런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송여환과 붙어 있다 보니 알게 모르게 물이 들었나 보다.

그렇게 도착한 본부 지하.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방 주인이 보이질 않았다. 설마 허락도 없이 외출한 건 아니겠지?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훑는데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씻나 보네. 이 시간에 온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귀찮은 새끼, 진작 좀 씻지.

나는 짜증을 삼키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늘 찾아온 목적은 앞으로 백산과의 전투에서 어떻게 포지션을 나누고 움직일지 회의하기 위해서였다.

‘물고기야? 뭐 이렇게 오래 씻어?’

나도 한 번 씻으면 꽤 걸리는 편이지만, 이놈은 더했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 것도 지칠 무렵, 드디어 발소리가 났다. 빨리 오라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끔찍한 광경에 그대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하, 도련님 안녕? 일찍 왔네.]

한국말을 배웠어도 나와 있을 때는 원래 사용하던 언어를 쓰는 편인 녀석이 능글맞게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일찍? 저 새낀 시간 개념도 없나?

“속옷이나 입어.”

[같은 남자끼리. 우리 탕에도 함께 들어갔던 거 잊었어? 내가 네 엉덩이도 핥-]

“닥치고 입으라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갑 티슈를 잡아 던졌다. 아, 젠장. 또 봤어.

[네 강아지도 같은 걸 달고 있을 텐데, 왜 내 것한테만 그렇게 화를 내? 이것 봐……. 도련님이 하도 뭐라 그러니까 애가 축 처졌잖아. 안쓰러워. 기가 죽었나 봐.]

“아예 태워 줄까?”

[그건 씁…… 사양하지.]

아랫도리를 다시 한번 내려다본 녀석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부스럭부스럭, 사람 속 터지게끔 느긋이 옷을 입더니 이번엔 앞으로 다가와 젖은 머리를 탈탈 털어 댔다.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걸까……? 나는 물기를 머금어 유독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노려봤다.

“적당히 해라.”

[하하하!]

“X발…….”

[그래서? 오늘도 선생님 놀이하러 온 건가? 나는 그거 좀 지겨운데.]

“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고. 일단 앉아. 네까짓 게 뭔데 나를 내려다봐?”

[성격은 여전해서 마음에 들어. 늘 그렇듯 싸가지가 없어.]

“자기소개 해?”

나와 녀석 사이의 공기가 잠시 차가워졌다.

[벌레 죽이려다…… 실수로 도련님까지 죽여도 나는 무죄이려나?]

“글쎄, 궁금하면 해 보지 그래.”

반대편에 앉은 녀석이 다리를 꼰 채 흠, 목을 울렸다. 녀석은 특유의 재수 없는 웃음을 짓더니 손으로 턱을 괴곤 한국말로 ‘재수 없어’라고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동감이라는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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