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오랜만에 도착한 집이 어색했지만, 눈치 빠른 집사장이 유제와 관련된 물건을 전부 치워 버렸기에 나와 송여환은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형님 이름이 뭐였지.”
먼저 환복한 송여환이 차를 내오며 물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자얀.”
“정말 괜찮을까?”
“모르지. 그래도 백산을 잡으려면 필요한 카드야. 녀석의 재생 능력은 너도 봤잖아. 써먹기 좋은 방패지.”
“그렇긴 한데…… 기억상으로 만만치 않은 인간이었던 거 같아서 그래. 여러모로.”
“잘 길들여 봐야지. 말도 가르쳐 볼까 해.”
“형이?”
“당분간은. 말이 통하는 게 나뿐이니까.”
본부랑 커뮤니케이션이 돼야 하니까 간단한 의사소통은 필수였다. 내가 항상 옆에서 보모 노릇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내 말에 송여환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나도 같이 가는 거지?”
“…….”
“형? 왜 대답이 없어?”
미친놈이랑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데 거절하기엔…… 송여환이 미쳐 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맑은 눈인데도 이상한 집착이 엿보여 나는 차를 호록 마시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다사다난할 것 같은 이 예감은 뭘까.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오늘은 일찍 자자, 피곤하네.”
“그러자.”
“같이 잘 거지?”
“……뭐어, 그러든가.”
이젠 익숙해진 루틴에 눈을 피하며 동의하자 송여환이 빙긋 웃음 짓곤 물었다.
“이대로 아예 나가서 우리 둘이 살까?”
그러고 보니 워낙 넓어서 그렇지, 지금 사는 저택에는 따지자면 송여환의 가족들도 함께 머물렀다. 언제까지 얹혀살 수는 없는 노릇이란 말이다.
“그래. 사람들 많이 없는 곳도 좋다면.”
“…….”
“또 왜? 네가 나가 살자며.”
“아니. 아까부터 묘하게…… 형, 은근 내 말에 다 동의해 주는 거 같아서. 평소라면 조금 더 이렇게, 이런 표정으로 뭔 헛소리야? 같은 말 하잖아.”
녀석이 나를 흉내 내듯 싸늘한 표정을 짓고서 성대모사를 했다. 오버한다는 생각과 함께 억울함이 살짝 솟았다. 내가 언제 또 그렇게까지 차갑게 대했다고?
“언제까지 얹혀살 순 없으니까 그렇지.”
“그런 것치곤 나가는 데 나는 필수 옵션으로 들어가는 거 같은데?”
“자꾸 까불어라.”
송여환의 코를 아프지 않게 잡았다 놓자 녀석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볼수록 강아지 같단 말이지.
* * *
[으응? 이런, 강아지잖아? 이거 반갑군. 안녕, 멍멍아. 나를 기억하니?]
자얀이 송여환을 보자마자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강아지 같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왠지 저 새끼가 그렇게 부르자 기분이 약간 언짢아졌다. 어디서 수작을 걸어? 나는 인상을 찡그리곤 송여환의 팔뚝을 잡아 내 뒤로 숨겼다.
“왜? 뭐래?”
“너 여전히 못생겼다는데.”
당연하게도 알아듣지 못한 송여환은 나를 쳐다봤고, 나는 곧이곧대로 알려 주는 대신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
“뭐? 웃기네. 지가 더 이상한 머리 색이면서! 참 나, 상관없다고 전해 줄래? 난 유성이 형한테만 예뻐 보이면 되니까.”
송여환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좋아, 계획대로 돼 가고 있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곤 방 안을 훑어봤다.
아직 자얀에 대한 완벽한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녀석의 주거는 본부 지하에 따로 만들어진 서브 룸이었다. 대충 둘러보니 여느 호텔의 스위트 룸 정도 되는 게, 혼자 지내기에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시간마다 먹을 게 나와. 전부 맛이 좋고. 식감도, 냄새도, 생김새도 신기한 것들뿐이지. 거기다 원할 때마다 몸을 씻을 수도 있어. 기분이 좋아지는 액체를 이용해서 따뜻한 물로 말이야. 이런 곳은 상상도 못 했는데……. 서블의 모두가 오고 싶어 하는 환상의 나라가 있다면 이런 곳이겠지. 참 신기한 곳이야.]
소파에 늘어진 채 자얀이 손을 휘적거리며 능글맞게 말했다. 그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알면 협조나 잘해.”
[으응?]
자얀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재수 없게 괜히 실실 쪼개는 건 여전하군.
[이보다 더 어떻게? 당장 뛰쳐나가 벌레 덩어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지만 잘 참고 있잖아. 이봐, 도련님. 자꾸 자극하지 마. 아무리 네가 내 봉인을 풀었다지만…….]
녀석이 가볍게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혀 놔서 그런지 유독 더 껄렁한 양아치 같았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물빛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입꼬리를 올린 채 자얀이 말했다.
[그렇다고 네가 내 주인은 아니지.]
“…….”
[목줄, 적당히 잡아. 응? 난 널 섬기지 않아.]
이내 툭, 기다란 손가락이 내 어깨를 건드렸다. 척 보기에도 깔보고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그 빌어먹을 지옥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계속 싸우고 싸워 살아남은 나야. 예전과는 많이 다를 테니…… 도련님도 조심하자?]
“저게!”
그 순간, 송여환이 놈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짝! 자얀의 손을 거세게 쳐 내며 물러나라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아주 오랜만에 에스퍼일 때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어디 함부로 손을 대?”
송여환이 으르렁거리자 자얀이 양손을 들어 올려 장난스레 흔들어 댔다.
[아하하, 강아지야. 경비견으로 진화라도 한 거야? 아아, 맞다. 강아지 너는 도련님께 흑심을 품고 있었지. 그 불쌍한 꼴은 여전한가?]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도련님은 널 사랑한대?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은데. 혹시 매일매일 주인님~ 저 좀 봐 주세요, 하고 꼬리라도 흔들고 있는 건가?]
송여환을 바보 취급하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송여환에게 괜찮다는 표시를 해 보이곤 자얀에게 말했다.
“글쎄, 너만큼이나 이쪽도 많이 달라져서.”
[아하……? 뭐지, 이 묘한 분위기는? 설마 징그럽게 너희끼리 붙어먹었다는 건 아닐 테고.]
녀석이 으, 소리를 내며 장난스레 얼굴을 구겼으나 나는 뭔 상관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데?”
[……오, 내가 진짜 오랜 세월을 갇혀 있었나 봐. 귀랑 머리가 어떻게 된 거 같아. 분명 내 기억에…….]
뚝 말을 멈춘 녀석이 나와 송여환을 번갈아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맙소사, 진짜야? ……음……. 이걸 재밌다고 해야 하나……. 그전에 너희 둘 다 그, 아, 뭐, 그래. 됐어.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진짜라니 더 놀리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어. 으응, 잘됐네, 강아지야. 그때 꾸역꾸역 살아나길 잘했어.]
녀석은 끝까지 쓸데없는 말을 줄줄 뱉어 냈다.
“걱정 마. 널 끼워 넣을 생각은 없으니까.”
[부디.]
킥킥거리는 놈을 흘겨보다 테이블 쪽으로 턱짓했다.
“앉아.”
[으응, 또 할 얘기가 남았어? 네 똥꼬 빨아 줄 연인은 저 강아진데 왜 그렇게 나한테 달라붙는 거야? 하아, 이제 그만 가지 그래? 나는 말이야, 그 벌레를 처죽일 시간만을 기다리며 이 말도 안 되게 재밌는 오락을 즐겨야 하거든.]
자얀이 답지 않게 흐뭇한 표정으로 바닥에 잔뜩 쌓여 있는 게임팩을 가리켰다. ……누구야, 저 녀석한테 글보다 게임을 던져 준 새끼가.
“저거 다 불태워 버리기 전에 앉아.”
[아하? 아까 분명 넌 내 주인이 아니라고 경고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봉인을 푼 것 같다. 나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한번 테이블을 턱짓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게임을 해야 한다며 놈이 바락바락 개겨 장장 두 시간을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벌이고 말았다.
결국 백산을 죽이고 자유를 얻어 이곳 생활을 하려면 언어는 필수다, 말이 통하면 더 많은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거다, 영화라는 것도 있다…… 등등, 많은 회유를 거듭해 녀석의 손에 연필을 쥐여 줄 수가 있었다.
“자, 빨리 외워. 아무리 지네 대가리보다 못하다 해도 이 악물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회화가 가능한 수준까진 가겠지. 그러니 딴청 부리지 말고 잘 들어, 백산이 깨어나기까지 시간 없으니까. 본부랑 소통이 돼야 널 현장에 내보낼 거 아냐.”
하지만 연필만 잡았을 뿐, 지루하단 표정으로 내 말을 흘려듣는 녀석이 짜증 나 기어코 참았던 성질이 터져 비아냥댔다. 그러자 녀석이 가증스럽게도 슬픈 표정을 지으며 흑흑 우는 척을 해 왔다.
[지네 대가리……? 아야. 선생님, 더 이상 공부 못 하겠어요. 방금 내 마음이 다쳤어.]
이 능구렁이 새끼가 진짜. 차라리 한 대 쳐 버릴까, 깊은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였다. 자얀의 앞으로 찻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탁! 놓였다. 물론 내 앞에도 놓였으나 놈과 달리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X발……. 누군 형이랑 안 붙어 있고 싶어서 안 붙어 있는 줄 아나. 그렇게 배우기 싫으면 빨리빨리 익히면 되잖아. 하,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형이랑 더 있고 싶어서?”
송여환이 평소보다 몇 배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흑심은 너만 품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분위기상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통 뭐라는 건지…… 음? 으응?]
껄렁하게 중얼거리던 자얀이 문득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나와 본인 앞에 놓인 찻잔을 번갈아 쳐다봤다. 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었는데, 그냥 평범한 차였다. 그저 내 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향긋한 꽃차고, 녀석의 것은…… 아무리 봐도 냉수라는 것뿐?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