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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97화 (97/115)

97화

-일어나니까 형은 또 없고. 병원복도 벗은 걸 보니 외부로 나간 거잖아. 그치? 왜 굳이 나를 재우고 나갔을까?

“하아……. 가서 다 말해 줄게, 일단.”

이렇게까지 화낼 줄은 몰랐다. 어떻게든 녀석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변명하려는데, 전화 너머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내 말을 끊고 들려왔다.

-낙유성. 어디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와 이를 악문 발음. 적개심을 드러내는 녀석이 낯설었다.

-묻잖아. 어디냐고. 다쳐서 며칠이나 혼수상태였다가 눈뜬 사람이 또 어디를 갔냐고! 왜, 하아……. 왜 형은 항상 내 생각은 안 하는 건데? 유제 잃은 지 얼마나 됐다고 형까지 불안하게 굴어. 왜, 왜 자꾸 내 눈 밖으로 사라지는 거야? 제발 그러지 마. 미칠 거 같아, 제발, 어?

끝으로 갈수록 잔뜩 떨리며 물기 어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전화 너머 송여환은 커다란 불안에 휩싸여 있는 거 같았다. 나를 위로해 주고, 씩씩한 웃음을 보이기에 녀석도 미역국을 삼키며 슬픔을 이겨 내려 노력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송여환은 혹여 자신보다 내가 더 무너질까 봐. 나를 생각해 버팀목이 돼 주려 괜찮은 척했던 것뿐이었다.

-나는 형을 구하러 갈 수 없잖아……. 유제도, 구할 수 없었는데, 왜, 다들…….

그런 와중 내가 말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참았던 불안이 터졌나 보다.

“하아…… 송여환. 침착해. 내가 실수했어. 금방 갈게. 아직 병원이지?”

나는 전화기를 고쳐 잡으며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김강민이 다시 말을 붙여 오려 했지만 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혹시나 내가 본부라는 걸 안다면 송여환은 저 불안불안한 상태로 운전을 해 오려 할 테니까. 그건 위험했다.

[이봐, 가려는 거야?]

조용히 하라니까 빌어먹을 자식들이. 나는 인상을 찡그리곤 송여환에게 병원으로 출발할 테니 길이 엇갈리지 않도록 그대로 있으라는 말을 전했다. 전화 너머에서 외침이 들려왔지만, 상황이 급해 모른 척 끊어 버렸다.

“라면이나 처먹으면서 얌전히 기다려.”

[으음? 나를 이 우리 안에 가두고 사라지려고? 도련님 없으면 저 멍청해 보이는 녀석들과 말이 안 통하잖아.]

“네가 평생 살았던 곳보다 훌륭한 우리일 테니 걱정 마.”

눈썹을 까딱이며 불만을 토로하는 은발을 무시하곤 김강민에게 넓은 방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식사는 제시간마다 최대한 풍족히 넣어 주시고…… 아까 말했듯 절대 혼자 녀석을 상대하지 마세요. 제 말을 어기고 일어난 일은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저건 겉껍데기만 인간이지, 속은 짐승이라 보면 되니까.”

[아하? 아주 갚아 주는 게 제대론데? 말 한 번 X같이 하네.]

“틀린 말이라도?”

[같은 짐승 새끼끼리 이러지 말자고?]

은발과 잠시간 눈싸움을 하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저 녀석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제정신 아닌 놈은 맞지만, 아직 공공의 적이 있으니 막 나가진 않겠지.

나는 차로 달려가면서 윙윙 진동하는 핸드폰에 혀를 찼다. 지금은 자얀보다 송여환이 더 신경 쓰였다. 돌아가면 분리 불안에 대한 훈련이라도 해야겠네, 젠장.

* * *

어디냐는 재촉을 수십 번 받으며 도착한 병원. 송여환은 이미 주차장에 내려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가 가겠다니 차마 뛰쳐나가진 못하겠고, 그렇다고 병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기엔 불안했는지 본인의 차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피가 맺히다 못해 주르륵 흐를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송여환!”

“혀, 형!”

탕! 차 문을 거세게 닫으며 녀석에게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아까는 지하 동굴만큼 목소리를 낮게 깔며 화를 내더니 정작 나를 앞에 두자 뭐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달려와 엉기기 바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야.”

“어디, 어디 갔었어.”

덩치도 커다란 게 자꾸만 품 안으로 파고들려 한다. 예전이었더라면, 아니, 다른 놈이었더라면 징그러워 걷어차 버렸겠지만 송여환은 눈가도 붉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그런지 퍽 안쓰러워 보였다.

“일단 집에 가자.”

“…….”

“네 차는 다른 분한테 부탁하고. 일단, 이리 와.”

코를 훌쩍이는 녀석을 질질 끌어 차에 태웠다. 병실에 남은 짐이나 따로 주차된 송여환의 차가 신경 쓰였지만 내버려 두면 녀석의 집안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리라.

“안전벨트 매.”

내 말에도 송여환은 고집스레 앞만 쳐다봤다.

“…….”

“여환아.”

“……왜 자꾸 말도 없이 사라지는데.”

“그럴 만한 사정, 하아…….”

나는 핸들을 잡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서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배려가 없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송여환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내린 선택이 오히려 녀석을 자극하는 꼴이 돼 버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꿈을 꿨는데…….”

집으로 돌아가 차분히 얘기하려 했지만, 녀석이 너무 힘들어하니 그냥 털어놓아야겠다.

“거기 그 녀석이 나왔어. 기억나? 은색 머리.”

송여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무슨 소리냐는 눈빛에 이제껏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같이 말했다.

“유제 죽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으니까. 더 이상…… 희생되어야만 하는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 너도, 나도 너무 힘들잖아. 무엇보다 백산을 없애기 위해선 녀석의 힘이 알맞기도 했고.”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잖아. 그 사람이 다른 백산이 되지 않을 거란-”

“그렇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

빠르게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서 그 녀석의 제안은 너무 달콤했다. 나는 송여환의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쓸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새로운 적이 된다면, 그럴 징조가 보인다면 내가 책임질 거야. 백산과 전투하는 날에 녀석도 같이 묻어 버리지, 뭐.”

장난스러운 대답에도 송여환은 웃지 않았다. 녀석은 힘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에스퍼였더라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냐?”

“쓸데없지 않은 생각.”

“네가 후회하거나 미안해할 일은 하나도 없어.”

“그건 형이 아니라 내가 정해. 형 혼자 희생하겠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봐, 도와주겠다는 말 하나 못하잖아. 겁쟁이 새끼야, 나는…….”

그 미친 백산을 두고도 나 찾겠다고 쫄랑쫄랑 뛰어온 간덩이를 보자면 겁쟁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하지만 심각한 녀석의 분위기에 차마 태클을 걸진 못했다.

나는 픽 입꼬리를 올리며 송여환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아!”

“그만 우울해해. 오로지 너 하나 보고 힘내는데, 정작 그 대상이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있으면 힘이 나겠냐.”

“……뭐?”

“어?”

아까와는 다른 정적이 차 안에 내려앉았다. 기운 내라고 해 준 말인데 뭔가 이상했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는 송여환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그러다 고개를 옆으로 삭 돌리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형은 가, 가끔, 이상하게, 고백, 하더라…….”

고백?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귀어 주십사 하는 그 고백? 나는 바보처럼 눈을 깜빡이다 여전히 귓불까지 빨갛게 익어 꾸물꾸물하는 송여환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나를 좋아하고 있지. 물론 나도 저 녀석을…….

‘어?’

우뚝. 사고가 정지했다. 소중한 녀석이고 지켜 주고 싶은 건 맞지만, 성적으로…… 그러니까, 아니. 돌이켜 보면 키스도 하고 했지만…….

‘설마, 우리 사귀고 있던 거야?’

나는 녀석 몰래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해 보니 송여환과 내 관계를 정확히 명시한 적이 없었다. 이제 와 말하자면 웃기지만, 그랬다. 과거에 녀석이 몇 번이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마다 거절하거나 어물쩍 넘기곤 했으니까.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딱히……. 그냥 자연스럽게 같이 자고, 씻고, 스킨십을 나누어서…….

‘X발 이게 사귀는 거잖아.’

아, 뭔가 어린애한테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송여환이 순수하게 좋아해, 좋아해, 를 시전하는 놈이어서 더욱.

나는 쩝, 입맛을 다시다 혼자 중얼중얼하는 녀석을 보고는 뺨을 긁적였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좋겠지.’

내가 말주변이 없다는 건 객관적으로 알고 있다. 고로 여기서 괜히 ‘우리 혹시 사귀냐?’ 따위의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파국이 될 걸 직감했다.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입 다물고 송여환의 흐름에 우리 사이의 정의를 맡기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때 은근슬쩍 묻어가야겠다. 어차피 이제 내 인생에 이 녀석보다 중요한 건 없을 테니까.

“형? 유성이 형.”

“아, 어어.”

“왜 그래.”

언제 안정을 찾은 건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나를 보는 송여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문득 자각해 버려서 그런가, 자꾸 뭔가를 해 줘야 할 것 같은 이 초조함은 뭐지? 마음속에 녀석을 향한 강렬한 보호 본능과 함께 새싹 같은 무언가가 뾱 올라왔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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