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다시 종이를 조심스레 접어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문득 ‘또 유제 같은 아이가 만들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자 명치께부터 뜨거운 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빗소리 같은, 귀를 멍하게 만드는 환청도 들려왔다.
‘불쾌해.’
속이 울렁이며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실험체를 만들지 않고서 백산을 잡을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없는 걸까. 이대로 또 이번과 같은 끔찍한 경험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네가 먼저 나를 찾게 될걸?’
“아.”
흠칫,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곳에 은발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말도 안 돼. 그런 신용할 수 없는 미친놈을……. 설마, 은발은 지금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그런 말을 한 걸까?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호광산에 검은 용이 그려진 절이 있어. 그 아래 묻힌 칼을 빼내.’
“호광산…….”
사실 녀석의 힘이야말로 지금 같은 상황에 너무나 필요했다. 백산의 공격을 맞고도 죽지 않을, 무한히 재생되는 몸.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완벽한 방패막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양날의 검인 녀석을 꺼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똑같은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니,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송여환이 우는 건…… 그만 보고 싶었다.
‘부디 악수만이 아니길 비는 수밖에.’
새근새근 잠이 든 송여환을 흘깃 바라보곤 기척을 죽인 채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송여환이 깨기 전, 수면제를 얻어 돌아와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새벽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두 명의 주치의가 항상 상주하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으스스한 복도를 걸었다.
“위장약이랑 같이 달라고 하면 되려나.”
* * *
“어? 형? 일어나도 돼?”
아침 일찍, 집에 다녀온 송여환이 짐 꾸러미를 소파에 올려 두며 물었다.
“어, 괜찮아.”
부기가 안 빠지네. 근래 계속 울어서 그런가. 나는 녀석의 퉁퉁 부은 눈가를 손으로 쓸어 내며 작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사과였다. 송여환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흔들며 밥이나 거르지 말라는 소리를 해 왔다.
“일어난 김에 뭐 좀 먹을래?”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송여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녀석은 여전히 내게 유제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자식처럼 아꼈으니 내가 원망스러울 법도 할 텐데 말이다.
분명 아직 마음이 아물진 않았겠지. 그런데도 송여환은 티를 내지 않았다. 첫날 그렇게 서럽게 울며 아파했으면서, 지금은 유제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로지 내게만 집중했다. 때문에 나도 더 이상 사과를 건네지 못했다. 송여환이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자, 이거.”
나는 음식을 꺼내 드는 녀석에게 만들어 뒀던 커피를 건넸다. 수면제가 든 커피였다. 밤에는 산에 오르기 어려우니 어떻게든 낮에 다녀오기 위해 만든 거다. 송여환이 알면 따라오겠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녀석을 떨어뜨리기 위한 준비였다.
“어? 웬 커피.”
“아, 어. 너 요새 나 간호하느라 잠 못 잤잖아.”
“나 주려고 만든 거야?”
“……어.”
“몸도 힘들 텐데……. 감동이다. 고마워.”
송여환의 감사 인사를 들으며 나는 침대에 앉았다. 녀석은 받아 든 커피를 조심스레 내려 두곤 내 식사부터 부지런히 챙기기 시작했다. 침대에 달린 판을 내려 그 위로 음식을 올려놓는 손길이 퍽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막 올라온 음식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역국.’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음식은 미역국이었다. 송여환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음식이었지, 아마?
‘딱 한 그릇.’
전에 녀석이 해 주었던 얘기가 둥실둥실 머릿속에 떠올랐다.
‘딱 한 그릇을 비울 동안만 우셨고, 망설이셨지. 그렇게 깨끗하게 비우고 나면 누구보다 단단해지셨어. 나도 그래.’
멍한 표정으로 미역국을 내려다보다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맑은 녹빛의 국물을 떠 입안에 넣으니 잊고 있던 입맛이 살아나는 듯했다.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부드럽게 내려가 내 속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송여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음식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그제야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이제껏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송여환만큼 정을 주지도 않았고, 원체 성격도 부드러운 편이 아니니까. 은발을 깨우려는 의도도 그저 유제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고작 한 달.
“울지 마, 형…….”
그 한 달에 나도 꽤나 많은 사랑을 주었었나 보다. 나는, 그래……. 나는 슬펐던 거구나. 몸이 떨릴 만큼 화가 나고, 유제가 그리웠던 거구나.
한 손으로 눈가를 누르며 숨을 참았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참았던 감정이 한번 터져 버리니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스스로가 미웠다.
유제야, 너는 나를 살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나는 소중한 사람을 전부 잃어야만 하는 걸까.
‘다, 다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어차피 오래 살 수도 없던 아이의 작은 소원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나는 내 등을 감싸 안아 오는 온기를 느끼며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녀석에게 물었다. 너도 미역국을 먹었느냐고. 한 그릇을 비울 동안만 울고 괴로워했느냐고. 그 시간 동안 자유롭게 슬퍼하고, 후회하고, 그리워했느냐고.
“응, 나도 그랬어.”
그렇게 송여환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며 위로를 받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려지다 못해 결국 떨림으로 변할 때까지.
“아…… 같이 울어 버렸네.”
송여환이 짓무른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나도 누구 앞에서 울어 본 적이 별로 없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멋쩍음과 함께 창피함이 고개 들었다.
“보지 마.”
“형, 눈 완전 붕어야. 퉁퉁.”
녀석이 낮게 웃으며 아까 내려놓았던 커피잔을 들었다.
“음…… 형이 타 줘서 그런지 더 맛있다.”
“주접은 변하질 않네.”
내 말에 녀석이 피식 웃었다.
“심해지면 심해졌지, 영원히 변할 일 없을걸.”
단호한 말투에 묘한 안심이 들었다. 변치 않는 내 편이라는 건 엄청 든든한 거구나.
“꼭 그래라.”
나는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녀석의 뺨을 손등으로 살살 문질렀다. 기분이 좋은지 송여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길을 고분고분 받아들였다.
“병원이라는 것만 빼면 형이랑 평생 이러고 있고 싶다.”
녀석이 나른히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날이 좋아 그런지 약간 졸린 거 같다며 웅얼거리다 곧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의식 잃은 송여환을 손으로 받쳐 들어 침대에 눕혔다. 녀석이 에스퍼였다면 전혀 먹혀들지 않았을 수면제가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를 발휘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나는 환복한 후 깊이 잠든 송여환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송여환.”
* * *
호광산으로 향하는 걸음에 더 이상의 머뭇거림은 없었다. 운전한 차는 근처 주차장에 두고 직접 산을 올랐다. 평일, 그것도 이른 낮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검은 용이 그려진 절, 그런 게 이 산에 있었나? 검색해 봤으나 딱히 나오는 건 없고, 그렇다고 주변에 물어보자니 괜히 시선을 끌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섰다.
‘하루 종일 뒤지다 보면 뭐라도 보이겠지. 설마 정상 꼭대기에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일단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인적이 드문 샛길로 빠져 또 한참을 걸었다. 보통 사람이 왕래해 길 끝에 절이 있곤 하니 쉬이 발견하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 봤지만 절은커녕 쉼터도 보이지 않았다.
‘그 새끼 사기 친 거 아냐?’
머리를 헝클이며 막 인상을 쓰던 중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희미하지만…… 에스퍼와 비슷한, 무언가 꽉 억눌려 터지기 직전의 폭력적인 기운이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녀석이, 힌트를 주고 있다.
젠장, 설마 가까이 있었는데 내가 못 찾고 뱅뱅 돈 건 아니겠지? 욕을 중얼거리며 기운을 따라 걸음을 돌렸다. 흔히 등산하라 만들어진 평범한 길이 아닌, 사람의 발길이 아예 닿지 않은 완벽한 숲길이었다.
‘냄새 맡는 개도 아니고…….’
우거진 수풀을 손으로 헤치며 몇 시간을 떠돌았을까, 드디어 눈앞에 검은 용이 그려진 절이 보였다. 곳곳에 이끼가 낀 게, 꽤 오랜 시간을 견딘 모습이었다.
‘칼을…… 빼내라고 했지.’
절 아래 묻힌 칼.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고 눈이 빠져라 바닥을 훑었지만, 칼의 키읔 자도 보이지 않아 조금 난감했다. 있는 게 맞나? 여전히 은발 놈이 친 사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독 강한 기운의 흐름이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했으니. 나는 굴러다니던 돌로 그 부분을 마구 파내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했는데 땀을 뚝뚝 흘릴 정도로 긁어내니 언뜻 잔뜩 부식된 칼의 손잡이가 보였다.
‘이거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손잡이를 잡아 그대로 뽑아 들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