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94화 (94/115)

94화

-그래도 성체 아닙니까. 이제 제 몫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뇨, 안 돼도 해야 합니다. 그럼 적어도 사람들을 지키는 용도로는 쓸 수 있겠죠. 그 실험체는 그러라고 만든 겁니다, 낙유성 에스퍼.

굳이 따지자면 김강민의 말이 맞았다. 유제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니, 그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선 목숨을 걸더라도 백산과 싸워야 했다.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이힛.’

‘부모오님!’

‘다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겨우 한 달일지라도 아이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 본 자라면 결코 그런 잔인한 환경으로 내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키고 싶다면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다.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저 멀리 꿈틀거리는 거대한 누에고치를 노려보며 액셀을 더욱 세게 밟았다.

도착한 누에고치 앞. 잠잠하던 평소와 달리 하얀 덩어리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거기다 기분 나쁠 정도로 느껴져 오는 적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먼저 선공을 쳐야 할까? 아니면 기다려야 할까. 깊은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고치의 한 부분이 일그러지며 백산이 나타났다. 그때의 전투 이후 한 달 만에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무언가 이상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흰자위가 보이지 않는 새까만 눈, 일렁거리는 불안정한 기의 흐름. 조금 다르지만, 알 수 있었다. 저건 에스퍼의 폭주와 비슷한 증상이다.

“젠장…….”

백산의 고개가 내게로 향한 즉시 황급히 본부로 연락을 취해 외쳤다. 당장 긴급 대피를 알리라고.

* * *

─콰앙!

도착한 그날을 기준으로 며칠이나 버텼는지 모르겠다. 잠도 자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으며 백산과 끝없는 전투를 벌였다. 4일째가 되던 날부터는 날짜를 세지 않았다.

녀석은 쌓인 힘을 풀어내듯 전력을 다해 덤벼들었고, 그 흐름에 따라 나 역시 이성을 잃고 싸웠다. 때문에 주변을 보고, 시민의 안전을 지킬 여유도 없었다. 그저 부수고, 막고, 파괴했다. 백산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도록 녀석의 모든 걸 받아들였다.

하지만 몇 번이나 해와 달이 뜨고 지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침인지 피인지 점점 헷갈렸다. 나 역시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이 저 아래로 떨어졌다.

주변은 빛 한점 보이지 않고 새까맣다.

‘……만.’

이대로 쭉 잠들면 편할 텐데.

‘……랜, 만…….’

뭐야. 소리?

‘……련…….’

허우적거림을 멈추고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응? 무언가 하얀 게…….

……은발?

자각하자마자 화려한 은발이 눈앞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보며 히죽 입꼬리를 올리는 익숙한 얼굴의 녀석.

‘오랜만이지? 도련님.’

너……? 뭐야. 나 죽은 건가?

‘말이 심하네. 여기 지옥은 아니거든.’

너는 분명 그때 가짜 녀석에게…….

‘봉인 당했지. 덕분에 끝내주는 하루하루를 보냈어.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거든.’

여기가 어딘데.

‘으응? 하하, 어디긴 네 의식이지. 몇 대 처맞더니 대가리도 멍청해진 거야?’

네가 왜 내 의식 안에 있는 건데.

‘어려운 건 나중에 설명하고. 있잖아, 도련님. 우리 친한 사이니까 내가 부탁 하나만 할게. 내 봉인을 좀 풀어 주었으면 해. 같이 봉인된 알타타의 괴물들은 전부 죽였으니 나는 좀 풀어 줘도 되잖아? 네 의식에 닿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헛소리 마. 그 괴물들이나 너나 같은 위험 분자야. 너를 풀어 줘? 미쳤다고?

‘아아아, 저 까칠함 참 오랜만인데 여전히 짜증 나네? 말이 통하니까 넌 더 싸가지가 없어. 뭐, 싫으면 말아. 근데…….’

근데 뭐.

‘네가 먼저 나를 찾게 될걸?’

헛소리 말고, 내 의식 속에서 꺼져.

‘호광산에 검은 용이 그려진 절이 있어. 그 아래 묻힌 칼을 빼내.’

못 들었어? 입 닥치고 꺼지라고.

‘알았어, 알았어. 가면 되잖아. 너 자꾸 그렇게 성내다 나 보면 되게 민망할걸?’

영원히 거기 처박혀 있어.

‘아하……? 어떤 얼굴로 나를 찾을지 되게 기대되네……. 그럼, 곧 보자고. 도련님.’

─화악! 녀석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저 멀리서부터 하얀 빛무리가 쏟아져 내렸다.

“허억, 헉! 허억……! 악, 아악!”

흡, 눈을 뜬 동시에 말도 못 할 통증이 나를 덮쳤다. 절로 입이 벌어지고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비명을 지르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잠에서 깨어난 듯 비몽사몽 몸을 일으켰다.

“형, 유성이 형!”

그러다 곧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곤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이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내 몸을 부여잡고 ‘숨 쉬세요!’ 하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 * *

“형, 뭐 좀 먹어야지.”

숟가락을 들이미는 송여환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몇 번째인지 모를 식사 거부.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송여환은 내게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형…….”

나를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도 지쳐 있었다. 나 말고 본인이나 챙기지.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붉다 못해 짓무른 눈가가 신경 쓰였다. 송여환은 내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제는, 형 때문에 죽은 게 아니잖아.”

우리 지키려고…… 그런 거잖아. 끝말을 흐리던 녀석은 기어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내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형이라도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등을 들썩이는 송여환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귀로는 송여환의 흐느낌이 울렸지만, 머릿속에선 김강민의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재생됐다.

‘듣기만 하세요, 낙유성 에스퍼.’

내가 막 산소 호흡기를 달고 흐린 정신을 차릴 무렵, 어디선가 잔뜩 얻어터진 몰골의 김강민이 찾아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유제…… 실험체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본인의 할 일을 완벽히 수행하고 갔습니다.’

내가 기절한 후의 일이었다. 나만큼이나 지친 백산에게서 나를 구출하며, 딱 한 번의 공격을 막아 줄 존재가 필요했다고.

그리고 그게 유제였다. 일반인은 도저히 껴들 수 없는 공간에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된 아이가 들어갔다. 나를 구하겠다고, 아이가 직접 본부로 찾아갔단다. 물론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썩 중요치 않았다.

기절한 나를 끌고 그 지옥에서 걸어 나온 유제는 이미 몸이 반쯤 녹아 죽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고 했다. 분명 백산의 마지막 공격을 맞은 거다.

말이 구출이지, 사실 그냥 샌드백이었다. X발, 그냥 죽으라고 떠민 거나 다름없었다. ‘사람’은 희생되면 안 되니까, ‘실험체’인 네가 가서 백산의 화풀이용이 되라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당신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죽을 걸 알면서 본부는 아이를 밀어 넣었다.

‘그래도 희망이 보입니다. 낙유성 에스퍼가 힘을 써 준 덕에 고치의 반이 붕괴되었어요. 녀석도 큰 대미지를 입었을 겁니다. 현재도 죽은 듯 잠잠하고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끝이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내가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유제를 잃는 일은 없었을 거다. 나는 회상을 멈추고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리는 송여환을 쳐다봤다.

그래. 조금만 더 힘냈더라면. 그랬다면…… 이 녀석도 괴롭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의식을 잃고, 유제까지 죽은 이후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후로도 본부에서 몇 차례나 연락이 왔다. 주된 이야기는 내 회복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들 입장에선 내가 빠르게 전장으로 복귀하는 걸 원할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물음이었다. 물론 송여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형이 퇴원할 때까지 얼씬도 하지 마!’

녀석은 고치의 반응도 없는데 입원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화를 냈다. 하다 하다 직접 찾아온 본부의 이사장과 김강민을 쫓아내기까지 했다. 나도 딱히 보고 싶은 얼굴들은 아니기에 말리지 않고 그저 방관했다.

아직도 기뻐하던 김강민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지. 희망이 보인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끝이 보일 거다, 라고.

과연 그들에게 유제를 향한 미안함은 존재했을까? 아니, 없었겠지. 본부 사람들에게 유제나 폐기되었던 덩어리들은 실험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니까. 오히려 우울해하는 나와 송여환을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고개를 돌려 간이침대에서 잠이 든 송여환을 내려다봤다. 녀석을 지키기 위해 뛰어든 싸움인데,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울리기만 하는 것 같다.

나는 절뚝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은은한 조명을 따라 병실 한쪽에 놓인 서랍장으로 향했다. 두 번째 칸을 열자, 곳곳이 찢긴 종이 하나가 있었다. 유제가 그려 주었던 가족 그림. 병원에 실려 올 때 입었던 옷에 들어 있던 거였다.

크레파스가 번져 더욱 엉망이 된 그림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못생기고 얼룩덜룩한 그림이 현재의 내 현실보다 아름다웠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