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같은 불을 다루는 능력으로 개화될 겁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젠장, 아침부터 사람 기분 망쳐 놓네. 본부에서 오는 전화는 하나같이 좋았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다. 언제 한번 지랄하든가 해야지. 나는 쯧 혀를 차며 핸드폰을 노려봤다.
“부모니임!”
그때, 김강민의 불쾌하던 목소리와 달리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멜빵바지를 입은 유제가 종이를 팔락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저렇게 뛰면 꼭 넘어지던데.
“오옹?”
아니나 다를까, 찐빵 두 개 붙여 놓은 것 같은 몸이 휘청였다. 저 바보, 그냥 걸어와도 될 걸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나도 모르게 몸이 튀어 나가 유제를 황급히 안아 들었다.
“꺄아!”
“너 내가 뛰지 말랬지.”
한 손으로 대롱대롱 집어 들자 유제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얘는 낙엽 구르는 것만 봐도 재밌다고 할 놈이네.
“부모오님, 오옹, 옹! 짜안!”
혼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제는 내 얼굴로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 얼룩덜룩,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잘 그렸다 할 수 없는 엉망진창의 그림이었으나 무엇을 그렸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새카맣게 칠해진 머리의 사람과 손을 잡고 있는 갈색 머리의 사람, 또 두 사람 중간에 그려진 제일 작은 사람까지.
“…….”
나랑 송여환, 그리고 본인을 그려 넣은 나름의 ‘가족 그림’이었다. 절대 가족이 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로 묶은 그림.
“앗, 형! 유제 그렇게 들지 말라니까.”
아이를 데려가 안는 송여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손에 든 종이로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지금 유제의 눈에는 우리가 가족으로 보이는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나랑 송여환이랑…… 정말로 그렇게…….
“어? 형! 얼굴 빨갛다. 열 있나?”
“……손대지 마. 별거 아니니까.”
나는 그림을 반듯하게 접고 또 접어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다. 어쩌면 나중에 유제가 커서 내가 부모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해도, 그래서 만들어진 이 가짜 가족이 없어지는 날이 올지라도 이때의, 이 순간의 감동만큼은 소중히 간직해도 괜찮겠지 싶어서.
그런 평화로운 날이 며칠 흐르자, 김강민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안 되겠어?”
“네, 죄송해요.”
분내를 풀풀 풍기며 부부, 부우 웅얼이던 유제는 어느새 또박또박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대략 14~ 16세 정도 되어 보였다. 겨우 3일 전까지만 해도 아기였는데, 하루 날 잡고 고열에 시달리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여 줬다.
“어렵네요. 능력에 익숙해지는 건.”
다만 한 가지의 문제가 있었는데…… 유제가 능력 사용의 컨트롤이 너무 떨어진다는 거였다.
김강민이 예견한 대로 유제는 나와 똑같은 불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사용 불가 수준으로 재능이 없었다. 아니, 이건 재능이라기보단 몸이 따라 주지 못한다는 편이 맞았다. 조금만 무리해도 코피를 쏟거나 기절을 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유제의 얼굴이 빨갛게 익은 것을 확인하곤 훈련 중단을 알렸다.
“네? 하지만 강민 삼촌이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고…….”
“삼촌은 개뿔. 본부에서 오는 연락 받지 말라고 했잖아. 나나 송여환한테 넘겨.”
뻔뻔하게 삼촌은 X발……. 유제 모르게 욕을 중얼거리며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송여환을 향해 턱짓했다.
“더하면 네 아빠 쓰러진다.”
내 말에 유제가 뒤를 돌아 송여환을 확인했다. 앳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는 손을 번쩍 들어 아빠- 불렀고, 송여환은 옳다거니 하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열나네? 머리는 안 어지러워? 숨은? 배는 안 아파?”
“응. 아빠는 너무 걱정이 많은 거 같아. 부모님이 함께해 주시는데 왜 그래.”
몸을 마구 더듬으며 걱정을 한 바가지 쏟아 내는 송여환에게 유제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부모님. 유제는 여전히 나를 그렇게 부른다. 머리가 좀 굵어지면 호칭을 바꿀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나와 송여환이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꿋꿋하게 이 가족 놀이를 유지했다.
‘아니, 근데 왜 쟤는 아빠고 나는 부모님이야? 또 왜 송여환한텐 반말을 하면서 나한테는 존댓말이지?’
평소에는 그러려니 했던 사실들이 갑작스레 거슬리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더 나이 들어 보여 그런가? 아닌데. 삭아도 송여환 저 새끼가 삭았지, 나는 꽤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음, 사실 그것도 그거지만 가장 큰 불만은 송여환에게 있었다.
‘나 땀 흘린 건 안 보이냐?’
유제에게 물을 주며 고생했다, 배고플 텐데 밥 먹자, 하며 샐샐거리는 꼴이 아주 못마땅했다. 나는 뭐 투명 인간인가? 입만 열면 유제, 유제. 나는 아주 관심 밖이지. 짜증이 울컥 솟아 유제와 함께 걸어가는 송여환의 뒤통수를 퍽 후려쳤다.
“악!”
“헉, 부모님! 아빠를 왜 때리고 그래요!”
송여환 이 얄미운 새끼.
* * *
“저 불꽃을 유지시키는 시간이 예전보다 좋아진 거 같아요. 이 정도면 부모님을 도와 세상을 지킬 수 있겠죠?”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유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유제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덧 우리에게 온 지 한 달이 되어 가는 시점, 유제는 나와 송여환과 같은 20대가 되었다.
“글세……. 넌 아직 어설퍼서.”
내 말에 유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실이자 진심이었다. 고작해야 30분. 그것도 농구공 크기조차 되지 못한 불꽃 하나를 만들어 내는 녀석을 끌고 백산과 전투를 하라면…… 냉정히 말해 차라리 없는 쪽이 훨씬 도움이 되리라.
“그래, 유제야.”
송여환은 나와 다른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은 그저 유제를 전투에 내보내고 싶지 않은 것뿐이겠지.
“유성이 형, 아니, 부모님 말씀이 맞아. 왜 그렇게 급해.”
“하지만…….”
걱정 어린 송여환의 눈빛에 움찔하던 유제가 나를 보며 머뭇머뭇 입술을 열었다.
“제가 빨리 도와야 부모님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거잖아요. 저 들었어요. 제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 계속 지체되면 노화가 빨라질 테고, 그러면 부모님을 도울 수 없는 몸이 될지도 몰라요. 빨리 괴물을 없애고 다, 다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끝말을 흐리던 유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거 같아 죄송하다 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세상 밖으로 나온 지 겨우 한 달 된 아이다. 아직 배울 게 많고 느껴야 할 게 많은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버릇처럼 유제가 그려 주었던 엉망진창의 가족 그림을 떠올렸다. 그 안에서의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게 웃고 있는데, 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에 잠식당하고 있다.
정을 주지 말아야지, 유제는 만들어진 내 복제품이니까. 잠들기 전 매일같이 되뇌어도 이미 유제에게 많은 마음을 준 뒤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송여환과 나와 유제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한 적도 많았다. 만약 내가 백산을 빠르게 무찌르면 본부에서 유제의 성장을 늦춰 줄 신약을 개발해 주지는 않을까 하는 어설픈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는 송여환과 떠드는 유제를 바라봤다. 유제에겐 본부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그들은 유제를 두고 완벽한 성공작이라 일컫고, 그리 믿지만 사실은 다르다.
유제는 능력 사용에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불꽃을 만들어 유지하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의 몸은 너무 약했다. 만약 아이가 내가 정해 준 한계를 넘어 힘을 쓰려 한다면 그때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제.”
“예?”
“너 내가 없는 곳에서 힘을 쓰지 않기로 약속한 거 잊지 마.”
“그 말 이번이 200번째인 거 아세요?”
……저 말 송여환이 잔소리할 때 내가 늘 받아치던 소리 아닌가. 역시 나와 닮았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몇 번 더 장난스러운 입씨름을 주고받으며 남은 음식을 먹으려던 순간이었다.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아찔한 경고가 온몸을 찌르르 울렸다.
덜컹! 거칠게 몸을 일으킨 탓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송여환과 무엇을 느꼈는지 두려움에 떠는 유제를 번갈아 보곤 급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다 밖으로 나오지 마. 특히 유제!”
“부, 부모님 저도 가, 같이……. 이거, 그거죠? 이게…… 제, 제가 같이 싸워야 하는…….”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이 없기에 아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송여환을 쳐다봤다. 녀석은 내 눈빛의 의미를 읽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불안한 얼굴로 유제보다 더 철없는 소리를 해 왔다.
“잊지 마. 무슨 일 있으면…… 총 들고 형 찾으러 갈 거야. 나 완전 연약한 거 알지?”
“이상한 걸로 협박하지 마, 바보야.”
나는 송여환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린 후 재빠르게 집을 벗어났다.
-윙윙윙.
아니나 다를까, 차를 타자마자 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귀신 같은 놈들. 하루 종일 저 빌어먹을 누에고치만 쳐다보고 있는 거냐? 취미 한번 더럽네.
“말씀하시죠.”
-낙유성 에스퍼, 고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요. 진동이 매우 큽니다. 빨리 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가고 있습니다.”
-혼잡니까?
“무슨 뜻입니까.”
절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원래도 친절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의도가 너무 빤히 보여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던 탓이다.
“유제를 말하는 겁니까? 아직 그 애는 능력에 익숙지 못하다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