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송여환. 나도 서비스 하나 할 테니까, 가출은 오늘까지만 하기로 하자.”
“응? 뭔 서비- 으읍!”
나는 눈을 깜빡이는 녀석의 고개를 잡아당겨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아닌 조금 더 낮고 아찔한 소리가 나는 입맞춤이었다.
두툼한 혀가 섞일수록 공기는 후끈해졌고, 숨을 고르기 위해 잠깐의 틈을 만들 무렵 송여환은 어느새 내 옆에 자리를 잡아 다시 진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그렇게, 우리의 가벼웠던 장난은 곧 어른들만의 비밀스러운 놀이로 이어졌다.
* * *
“하!”
송여환이 화났다.
“나도 서비스할 테니까, 가출은 오늘까지만 하자의 의미가 이거였어?”
그것도 아주 단단히.
“너야말로 언제까지 화낼 건데.”
“영원히.”
유치한 새끼. 나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돌아온 다음 날. 나는 ‘인조 에스퍼 개발 계획’에 참여 의사를 밝혔고, 그로 인해 송여환과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녀석은 본부와 집안 모두에게 골고루 지랄을 떨어 대며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는 경고를 주야장천 날렸는데…… 그게 고맙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럼 뭐 어떡해, 어? 하아…… 좋아. 그래, 네가 말해 봐. 나 혼자서는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송여환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녀석도 알고 있는 거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송여환.”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고집을 부리는 녀석에게 화가 나는 건 아니다. 모두가 내게 희생만을 강요할 때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지는 이를 어떻게 미워하겠는가. 그저 내 모든 행동의 이유가 송여환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이해를 받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마음이 많이 상한 건지 대꾸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곤 뺨을 긁적였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송여환은 자연스럽게 내 화를 풀어 주었을 텐데. 정작 나는 녀석의 화를 풀어 줄 방법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 여환아, 내 말 좀 들-”
“방금 뭐라고?”
휘익! 방금까지 무시하던 녀석이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분명 짜증과 분노, 그리고 복합적이지만 오로지 부정적인 감정만을 담고 있던 녀석의 눈이 지금은 맑다 못해 반짝반짝했다. ……도대체 왜?
“내 말 좀 들으라고.”
“아니, 아니잖아. 그거 말고 그전에.”
그전에? 그전에 무슨 말을 했지?
“네가 방법을 찾으…… 라고?”
“그것도 말고! 내 이름, 형 방금 나 뭐라 불렀어.”
“네 이름? 송여환.”
얘가 왜 이러나 싶다. 갑자기 뜬금없이 뭐? 대화의 논점을 흐리지 말고 제대로 얘기를 하라고.
“형, 너 일부러 이러냐?”
분명 좋은 듯했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는 게 보였다.
“너야말로 뭐야. 왜 또 화를 내는 건데. 여환아, 잘 좀 얘기-”
“그래! 그거!”
“……뭐?”
나는 또 발작하듯 반응하는 녀석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내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야, 너…… 왜 갑, 자기 세우고 지랄이야.”
녀석의 불룩해진 아랫도리였다.
“나 욕하지 마. 이게 다 형이 그동안 나를 햄스터 고환보다 못한 취급 해서 그런 거니까.”
녀석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줄줄 뱉더니 발그레한 얼굴로 꽤나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겨우 이름 좀 불러 준 걸로 내 화가 풀렸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뭐라는 건지 존나 모르겠네. 이름을 불렀더니 아니라며 발작을 해 대던 놈이 이번에는 또 화가 풀렸을 거라 생각 말라고? 도대체 대화의 흐름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맞장구를 치기로 했다.
“어, 어…… 뭐……. 아무튼 내 몸에 대고 직접 실험한다는 것도 아니고 끽해 봤자 피나 좀 뽑고 말겠다는 건데, 그만 화 풀어. 너까지 화내면 나는 어떡하라고. 응?”
다정하게 타이르자 녀석의 꾹 다물렸던 입술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보였다. 10분가량 침묵이 흘렀을까. 한숨을 내쉰 송여환이 졌다는 듯 시선을 맞춰 왔다. 따뜻한 빛을 담은 갈색 눈동자가 유독 예뻐 보였다.
“내가 형을 어떻게 이기냐……. 하아.”
다행이다. 한 번 더 고집 피우면 못 참고 한 대 후려칠 뻔했는데. ……아, 그럼 죽겠구나. 속마음을 숨기며 녀석의 어깨를 어색하게 툭툭 매만져 주었다.
송여환은 그런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들어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이 손등에 닿아, 적당한 숨과 간지러운 웅얼거림을 만들어 냈다.
“그래, 나도 알아. 여기서 제일 답답하고 화가 나는 사람은 형이라는 거. 알면서도 못나게 군거 미안해. 하지만 다들 형을 무슨…….”
“네가 사과할 건 없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진짜, 너무 괴로워. 할 수만 있다면 형이랑 둘이 도망가고 싶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러기 위해선 저들이 바라는 대로 따르는 게 가장 효율적일 거 같다…… 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걱정 마.”
“당연히 그래야지. 모든 게 잘될 거야. 그렇지?”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될 거라는 무책임하고 의미 없는 말 따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송여환의 입에서 나오니 또 나름의 매력이 있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포근해진다고 해야 하나.
‘……나도 미쳐 가네.’
설핏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송여환의 허락 아닌 허락도 떨어졌겠다, 본부는 브릭트스컴트의 지원을 받아 인조 에스퍼 실험에 박차를 가했다. 송여환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내뱉은 말을 철저히 지켰다. 내게서 필요한 데이터를 뽑아내는 일은 더러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만 손을 댈 뿐 그 외 다른 해를 가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심지어 인조 에스퍼 실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결과물은 나왔는지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개입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아 모른 척을 했다. 상황이 좋으면 알아서 보고하겠거니 싶어서.
하지만 그런 내게 ‘실험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마주하게 된 불유쾌한 사건이 머지않아 하나 생기고 말았다.
어김없이 백산과의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날. 너덜너덜해진 몸을 끌고 늘 그렇듯 의무실에서 간단한 처치를 받고서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반대편 코너 너머에서 잔뜩 주눅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며칠째 잠을 못 자요. 그것들이 꿈에 나와서…….”
“나도 그래. 밥 먹다가 비위 상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으으, 안 떠올리려 해 봐도 자꾸 기억나서 일상생활을 하기 너무 힘들어. 하아…… 진짜 지금도 토할 거 같아.”
“차라리 낙유성 에스퍼가 한 번에 태워 버리면 좋을 텐데.”
“아서라. 가이드도 없는데, 최대한 컨디션 조절해야지. 걔까지 이상해지면 우리 진짜 죽는 거야.”
피곤함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의 대화가 내 귀에 정확히 꽂혔다. 평범한 뒷담화라기엔 어딘가가 영 석연찮았다.
‘태워? 뭐를?’
대화의 내용이 무엇일지 추측하고 있으려니 그들이 막 코너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딱 마주치자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는 티를 숨기지 못했다.
“나, 낙유성 에스퍼.”
두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는다. 아마 ‘들었을까?’ 하는 의미겠지. 나는 어색해하는 두 사람을 향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뭐를 태워 주면 좋겠다는 겁니까?”
“아! 앗, 아! 드, 들으셨어요?”
“저기 아까 걔라고 칭한 건 그…… 낙유성 에스퍼를 지칭한 말이 아니, 아, 아니고요.”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변호해 대는 두 사람의 태도가 우스웠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 그걸 물었습니까?”
“아…….”
“두 번 묻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어서 대답하라는 의미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그들의 입에서 정확히 ‘낙유성’이란 이름이 나왔기에 모른 척할 수도 없을 테다.
“그…… 그게요.”
“이봐!”
“아, 어떡해요…… 그러엄……. 여쭤보시는데……. 그, 그래도 낙유성 에스퍼랑 아예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낙유성 에스퍼에게 비밀 사항도 아니잖아요.”
점점 가라앉는 내 분위기를 읽었는지 조금 더 풍채가 좋은 쪽의 남자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저희는 인조 에스퍼 개발 계획팀의 연구원들입니다.”
남자는 머뭇대며 본인들을 소개했고, 그다음으로 아까의 일을 사과했다. 그럼에도 내가 표정을 풀지 않자 다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비위가 상한다느니 낙유성 에스퍼가 태워 주었으면 한다느니 했던 얘기는 모두 ‘폐기’에 관련된 일이란 설명이었다.
듣기로, 인조 에스퍼를 만들기 위한 실험에서 실패한 생물을 처리하는 과정은 꽤나 잔혹했다. 어쨌든 에스퍼의 유전자를 따 만들어 낸 것들이니 어떤 식으로 해야 완벽한 죽음에 이르는지조차 ‘실험’에 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다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실험실이 어딥니까.”
“예? 가 보시게요?”
“두 번 묻는 거 안 좋아한다고 또 말씀드리네요?”
까칠한 말투에 두 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내를 하겠다 나섰지만 나는 칼같이 거절했다. 어차피 불편한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굳이 함께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냉랭한 태도가 별로였는지 연구원들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가는 길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