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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87화 (87/115)

87화

“형 요새 통 고생만 하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네. 자, 아~”

송여환이 두툼한 게살을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이 장면 뭔가 익숙한데? 데자뷔를 느끼던 나는 곧 미래 세계에서의 일을 기억해 냈다.

‘아, 라면…….’

은발과 지선우가 없는 틈을 타 내게 몰래 한 입 먹으라고 배시시 웃던 송여환. 그때도 굳이 먹여 주겠다며 똑같은 자세로 음식을 권했었다. 가만 보면 먹이는 걸 참 좋아하는 녀석이란 말이야.

‘그래, 언제나 나만 보면 밥 먹었냐며 걱정을 해 줬지. ……생각해 보면 늘 나부터 챙겼었네, 이 녀석은.’

문득 깨달은 사실에 가슴으로 뜨끈한 무언가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을 벌려 녀석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곤 똑같이 포크를 들어 올렸다. 송여환은 내가 식사하려는 줄 알았는지 고개를 내려 먹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놈을 향해 괜스레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야.”

휙, 송여환을 향해 음식을 찍은 포크를 내밀었다.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얼굴과 포크를 몇 번이나 번갈아 쳐다봤다.

“어?”

“그…… 먹, 든가.”

부들부들, 포크를 든 손이 떨렸다. 이런 수치심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짓거리를 스스로 하다니. 돌아도 단단히 돌았군.

‘젠장, 죽고 싶어.’

당장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었다.

“……싫으면, 말-”

반응 없는 녀석이 민망해 머뭇거리며 손을 내리려던 순간, 끝이 발긋한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싫을 리가 없잖아.”

녀석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음식을 받아먹었다. 이게 뭐라고 시간이 느리게 갈까.

“너무 맛있다.”

“……그렇겠지.”

“형이 줘서. 그래서 좋아.”

송여환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저 음식 하나 집어다 준 게 전부인데 무슨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하는 게, 연애도 많이 해 봤을 놈이 순 숙맥처럼 구는 게, 그냥 그런 게……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간지러워서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끄럽고 밥이나 먹어.”

“좋아해.”

“…….”

“정말로 좋아해.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나 자신보다, 형을 사랑하고 있어.”

막 피어난 꽃처럼 송여환이 활짝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새삼 다시 싸우기로 했던 다짐이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녀석을 따라 웃어 버렸다. 아이처럼, 아주 밝은 표정으로,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말이다.

식사를 끝낸 후, 우리는 따로 마련된 탕에 들어갔다.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널찍한 히노끼탕은 피로했던 마음과 몸을 사르르 녹여 주었다.

“옆으로 가도 돼?”

“……마음대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온 송여환이 이를 드러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왜 자꾸 히죽거려.”

“왜긴~ 좋아서 그러지.”

맞닿은 어깨의 살갗이 뜨거웠다. 아니, 어깨뿐만 아니라 온몸이 그랬다. 아마 물속에 몸을 오래 담그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얜 녹는 거 아냐?’

옆을 흘끔거리니 하얀 피부의 송여환이 곳곳을 발긋하게 물들인 채 나른히 풀어져 있는 게 보였다. 워낙 색소가 옅어서 그런지 눈처럼 녹아 버리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됐다.

“형.”

“어? 어.”

혼자 변태처럼 흘끔대던 나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어색히 대꾸했다. 송여환은 그런 나를 보다 픽 웃으며 손바닥으로 물을 퍼 세수를 했다. 뜨거운 김, 첨벙이는 물, 울려 퍼지는 목소리……. 모든 게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오늘 말이야.”

녀석이 가볍게 운을 뗐다. 아, 드디어 가출이니 뭐니에 대해서 말하려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다. 내 얘기 하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

“뭐?”

“그때 왜 그런 거야?”

“그때?”

“저번에 내 방에서 내 물건들 전부 꺼내 놓고 기다린 거.”

나 그날 되게 설렜는데…….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쳐다봤다. 마주친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고, 점점 맞춰지는 호흡이 우리 사이의 묘한 기운을 그대로 나타냈다. 몸을 풀기 위해 들어온 탕 속에서 되레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한 긴장감이 돈다.

녀석의 시선을 피하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뭐냐고 물어도…….”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설명을 해? 그나마 알 수 있는 거라곤 내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날 때, 송여환이 옆에 있으면 진정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게 가이딩 효과와 비슷하다고는…… 절대 못 말하지.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입술을 열었다 닫으며 시간을 끌었다. 녀석이 이렇게 돌직구로 물어 올 줄은 몰랐다. 내가 뭘 하든 에헤헤 웃으며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그냥 네가…….”

머뭇거리며 할 말을 찾는 와중 머릿속으로 여러 개의 말이 순식간에 휙 지나갔다. 같이 살아남았으니까, 도움을 줬으니까, 신경 쓰여서, 고마워서, 지키고 싶으니까, 소중하니까, 옆에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모두 송여환을 향한 나의 감정들이었다. 천천히 변하고, 바뀌어 가던 내 마음 말이다.

어느샌가 송여환은 내게 이렇게까지 들어와 있었구나. 새삼 깨달은 사실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젠장, 빌어먹을……. 입술을 꽉 깨물고 녀석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더 기다려 볼게.”

“…….”

“지금은 방금 그걸로 충분해.”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아 오는 녀석.

“고마워, 형 마음에 내 자리 만들어 줘서.”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자 웃음소리가 한 번 더 퍼졌다. 부끄러워 죽고만 싶었다.

“아! 형 보니까 가출하기 잘한 것 같네!”

잡힌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춘 녀석이 말했다. 가출. 잊고 있던 단어에 나는 돌렸던 고개를 바로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도 이제 말해. 가출이라니 도대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 그게 사실은…….”

송여환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큰형이 본부에서 진행하는 한 실험을 지원해 주기로 했는데…… 그게…….”

“인조 에스퍼?”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누가 말했어?”

“김강민이 말해 줬어. 나도 아까 들은 거야.”

“하아, X발…….”

욕설을 뱉은 송여환이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녀석이 욕을 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기에 나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거친 모습도 꽤 잘 어울리네. 다른 욕 하는 것도 보여 달라고 할까?

혼자 뭉게뭉게 상상을 하던 중, 송여환이 한숨처럼 말해 왔다.

“미안해, 형.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아무리 말해도 안 듣더라고. 그래서 대판 싸우고 가출했어.”

녀석이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속상해 죽겠다고 칭얼칭얼하는 게 딱 막내였다. 그제야 가출의 이유를 알게 된 나는 어려도 한참 어린 녀석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헤집어 줬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집을 나와.”

“사람에게 할 짓이 아니잖아. 형이 무슨 실험용 쥐새끼도 아니고! 큰형이랑 누나 모두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

“이럴 줄 알았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걸 바랄 줄 알았어. 이래서 싫었다는 거야, 형. ……네가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 한 사람한테만 희생을 강요하다니 너무하잖아.”

“뭐…… 방법이 없다면-”

“그거 가스라이팅이야! 정신 차려, 낙유성!”

“알겠으니까, 그만 매달려. 무거워 죽겠다.”

“절대 안 할 거라고 말해.”

“별 상관없는데…….”

“뭐?! 안 돼! 안 할 거라고 말해!”

“아니, X발! 비키라고 무거우니까!”

“악!”

첨벙!

가벼운 밀침이었는데 녀석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물에 처박혔다. 아, 맞다. 이 녀석 이제 평범한 일반인이지?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부들거리며 고개를 든 녀석은 ‘형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하는 얼굴로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시선을 돌리며 머뭇머뭇 말했다.

“힘, 조절…… 한 거야……. 그, 나름…….”

결국 단단히 토라진 녀석의 요구를 들어주며 달래야 했다. 그 요구라는 게 상당히 이상했지만.

위이이이잉!

“고객님~ 기분은 좋으신가요?”

송여환은 드라이기로 내 머리를 말리며 싱글싱글했다. 안 그래도 노곤한데 부드러운 손길까지 더해지니 졸음이 솔솔 밀려왔다.

“머릿결이 좋으시네요. 요새 연애하시나 봐요? 연하에 잘생기고 돈도 많고 몸 좋은? 와, 우리 고객님 너~ 무 부럽다.”

쉴 새 없이 떠드는 녀석이 웃겼다. 그도 그럴 게, 보통 요구를 하면 받드는 쪽이 아닌 받들어지는 쪽을 선택하지 않나?

참 이상한 녀석이란 말이야. 이런 것도 변태라고 해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녀석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고객님! 대답이 없으시네요? 이제 제 기분이 좀 풀린 거 같다고 긴장 놓으셨나 봐요?”

“아뇨, 예……. 좋네요…….”

“네네. 머리 말린 후에는 마사지 타임이 있겠습니다.”

“하아…… 예. 네 X대로 하세요…….”

“키스 타임도 있는데요?”

이게 진짜. 너무 까불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들어 올리자 녀석이 그대로 입을 맞췄다. 쪽, 가벼운 버드 키스였다.

“찾아가는 서비스.”

장난 같은 뽀뽀가 끝나자 송여환이 시원스레 웃었다. 그 얼굴이 얄밉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결국 나도 같이 픽 웃어 버렸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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