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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86화 (86/115)

86화

“하! X발, 이젠 하다 하다 실험용 쥐새끼라도 되라는 거야? 샌드백도 모자라서?”

“낙유성 에스퍼 몸에 직접 해를 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조금의 도움만 주시면 됩니다. 채혈이나 머리카락을 얻는 정도로-”

왜 김강민이 의무실 앞에서 기다렸는지 알겠다. 녀석은 나를 설득하기 위한 대기를 하고 있던 거다. 굳이 따지자면 설득 아닌 통보지만.

“점점 부탁하는 게 늘고 있다는 건 자각합니까? 협회와 다르니 뭐니 해도 결국 똑같아. 시민들의 안전 운운하며 나한테……!”

차분했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저들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

“하아…… 됐다. X발.”

울컥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다물었다. 화도 통하는 사람한테 내는 거다. 나를 사람으로도 안 보는 녀석들에게 무슨 화를 낼까. 차라리 모두가 같은 괴물이었던 협회 시절이 나을 지경이다. 인조 에스퍼라니. 뭐 이런 끔찍한 생각을 다 한 걸까?

“화내시는 거 이해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짐승, 로봇이라도 좋습니다. 인류를 구할 수 있다면요. 저희가 바라는 건 낙유성 에스퍼의 보조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당신이 전투하는 동안 시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해요.”

“그래서, 응? 그래서요. 결국 기어코 하겠다는 거잖아. 내가 싫대도.”

“낙유성 에스퍼.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김강민은 단호해 보였다. 나는 더 이상의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반대한다고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기분이 썩 좋지 못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 녀석들에게 나는, 에스퍼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쓸데없는 생각…….’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등을 돌렸다. 불쾌하고 역겨운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나 결국 나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거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모욕은 잠시지만 송여환의 안전은 몇십 년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 실험이고 나발이고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내 몸에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재료’를 좀 빌려줄 뿐이다. 이미 굴려질 대로 굴려진 삶. 이제 와 뭘 더 따지고 들겠는가. 나는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래도…… 기분은 더럽네.”

나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곤 긴 복도를 묵묵히 걸어 나갔다. 뒤에서 김강민이 소리쳤지만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무시했다. 오늘따라 복도가 참 끝없이 길었다.

“형!”

하지만 그럼에도 버텨야겠지.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갈색 강아지 한 마리를 위해.

녀석의 얼굴을 보자 아까의 불쾌했던 기분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픽 입꼬리를 올리며 녀석에게로 터덜터덜 힘없이 다가갔다.

“엉망진창이잖아! 으…… 눈물 날 거 같아.”

“오버 떨지 마.”

“오버 아니야.”

“야, 나 더러워.”

“나한텐 누구보다 깨끗해.”

송여환은 늘 그렇듯 나를 끌어안으며 내 어깨 위로 이마를 비벼 댔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작게 떨리고 있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 그동안 어떻게 에스퍼 노릇을 했던 거지?

“울지 마. 징그러워.”

“너무해애…….”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어째 녀석은 날이 지날수록 나보다 더 힘들어했다.

“너 살 좀 쪄라.”

송여환의 옆구리를 툭툭 건조하게 매만지며 말하자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이 고생하는데 나 혼자 맛있는 거 먹고 살찌라고? 차라리 한 달을 굶으라고 해라.”

“맛없는 거 먹고 찌든가.”

“입맛이 없어. 형이 먹여 줘.”

“뼈 빠지게 일하고 온 사람한테 밥시중도 들라고?”

“그럼 내가 시중들게 해 줘. 형 한 입~ 나 한 입 먹으면 한 공기 비울 자신 있는데.”

요새 들어 제대로 식사하지 않는 송여환을 알기에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나만 챙기지 정작 본인 몸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놈이니까.

“음…….”

“와, 형. 설마 진짜로 고민해?”

“…….”

“나 이제 좀 사랑받고 있다고 자부해도 되나?”

“까불지 마.”

맞다. 이 녀석은 금세 기어오르는 녀석이었지. 나는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녀석의 옷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제대로 각이 잡힌 정장 차림이었다.

“너 어디 다녀왔어?”

내 말에 송여환이 순간 멈칫하더니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어 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좋겠는데.

“음…… 가서 얘기하자.”

송여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살살 쓸어 댔다. 바깥에서 하기 곤란한 얘기겠거니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을 따랐다.

그런데 평소 일을 끝내고 돌아온 내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던 녀석이 운전하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굳힌 채 오로지 앞만 보며 핸들을 움직였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녀석을 흘깃거렸다. 순간 내가 왜 이래야 하나 싶으면서도 항상 살갑게 치대던 녀석이 무게를 잡고 있으니 퍽 낯설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고, 라디오 디제이의 말소리만 멍하니 듣고 있을 무렵이었다.

“형.”

녀석이 뜬금없이 나를 불렀다.

“어, 왜.”

끽- 차가 신호에 맞춰 멈췄다. 녀석은 빨간불을 잠시 응시하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집으로 안 갈 거야. 괜찮지?”

“뭐?”

“아, 신호 떨어졌다.”

가볍게 말한 녀석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뭐가…… 괜찮지…… 야?’

그럼 현재 이 차는 어디를 목적지로 굴러가고 있다는 걸까?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래서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던 건가? 답답함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야. 우리 어디-”

“가출이야.”

‘네 정신이?’

가까스로 비꼼을 삼켜 낸 나는 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으며 침착히 되물었다.

“가출은 무슨 가출. 집 놔두고 왜?”

“…….”

“송여환. 묻잖아.”

“가서 얘기하자. 다 도착했으니까.”

그러니까 어딜? 답답함에 따지기 직전, 휘황찬란한 어느 호텔 앞에서 차가 멈췄다. ……호텔? 갑자기 가출에 호텔? 여기가 도착지가 맞는 건가 싶어 가만히 앉아 있자 송여환이 먼저 안전벨트를 풀었다.

“내려, 형.”

녀석은 다가온 호텔 직원에게 자연스럽게 차 키를 넘기며 정문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배고프지? 가서 밥부터 먹자.”

“설명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밥 먹으면서 해도 안 늦어. 형 밥 먹을 시간 늦었어. 어서 먹여야 해. 방해하지 마.”

내가 신생아냐? 불만스러움을 대놓고 티 냈지만 송여환은 특유의 살랑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 팔뚝을 잡아 끌어당겼다.

“가자, 응?”

녀석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나를 향해 애교 아닌 애교를 피워 댔다.

‘귀엽네…….’

나는 큼, 헛기침하며 못 이기는 척 녀석을 따라 호텔로 들어갔다. 여우의 꼬드김에 넘어간 게 아니라 일단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길 한복판에서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따른 거였다. 호텔이라는 게 좀 걸리지만 뭐…… 둘 다 성인이고. 아니, 애초에 숙박만 하는 건데 왜? 뭐가 어색하다고.

생각을 잇다 보니 괜히 옆에 서 있는 녀석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젠장, 호텔 처음 와 본 사람도 아니고 왜 이러는 거야?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손톱만 뜯고 있자 한 여성이 구두를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총지배인이라며 본인을 소개한 여성에게 송여환 역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형이랑 누나는 모르죠?”

“제 선에서는 그렇습니다.”

“안다는 소리네…….”

나는 계속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느라 어디를 가는 건지도 모른 채 그저 두 사람을 따라 걸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안내를 마친 이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정중한 인사를 건넬 무렵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객실……?’

분명 호텔 내부에 있는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식사할 거라 여겼는데, 정작 안내를 받은 곳은 객실이었다. 뭐 두고 갈 짐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눈을 껌뻑이며 쳐다보자 송여환이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분위기 좋은 곳 가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보는 눈도 많으니까. 우리는 안에서 느긋하게 먹고 쉬자.”

“아…….”

“안에 히노끼탕도 있어, 형.”

녀석은 방긋 웃으며 나를 리드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간 스치고 간 아쉬움이 무엇인가 의아해하면서도 부러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하면 뭔가 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녀석과 있다 보면 이상한 어리광이 는단 말이지. 나는 짧게 혀를 차며 괜히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방은 좋네.’

도대체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건지 내부는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송가 저택에서의 생활로 눈이 너무 높아진 탓인지 이제 이 정도 수준은 딱히 놀랍지 않았다.

“밥부터 먹을 거지?”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송여환이 물어 왔다. 궁금한 것투성이였으나 당장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반쯤 포기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여환은 알겠다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식사가 도착했다. 단순 룸서비스로 보기에는 양과 질이 과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 새끼 혹시 셰프를 갈아 넣었나?

“이걸 둘이 다 먹자고?”

“응. 분위기 좋은 곳은 못 갔으니까 그 대신.”

콧잔등을 찡긋거린 녀석이 와인을 따 잔에 따랐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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