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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85화 (85/115)

85화

“차, 차 마실래?”

예전이라면 김이 폴폴 나는 차를 들어 녀석의 얼굴에 확 끼얹었겠지만 지금은…….

“뭘 쫄아.”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엇보다 먼저 손을 댄 건 나였다. 정신은 몽롱했지만, 기억을 잃은 건 아니니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의문이 드는 것이 있으니.

“너 일로 와 봐.”

“어?”

내가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두드리자 녀석은 눈을 껌뻑이며 순순히 다가왔다.

“왜, 왜?”

“너 혹시…….”

“혹시?”

“…….”

“어? 혹시? 혹시 뭐?”

‘가이드로 발현된 건 아니냐?’고 물으려던 입을 그냥 꾹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신 같은 질문 같아서.

하지만 정말로 이상했다. 분명 송여환과 몸을 부대끼고 나면 컨디션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 단순히 성욕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가이딩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몸이 풀렸다.

‘그리고 전부터 느낀 이 아랫배의 열감…….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무슨 특정 조건에서 발생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 엿 같은 충동의 해결책은 모두 송여환이라는 거.

‘처음 병원에서부터 녀석에게 닿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었지, 아마? 대체 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 상황만을 가지고 세울 수 있는 가설이 머릿속을 스쳤다.

‘몸이 안 좋아지면 이상한 충동이 생기고 그걸 억누를 수 있는 게…….’

시선이 옆에 있는 똥강아지 녀석에게로 향했다.

‘그럼 이것 또한 새로운 형식의 가이딩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니, 그전에 송여환은 에스퍼였는데?’

생각하던 도중 나도 모르게 아랫배로 손이 움직였다. 고통이 찾아올 때 송여환이 곁에 있으면 이 부근이 따뜻하고, 찌릿해진다.

“형? 형 왜 그래, 배 아파?”

“아니, 아무것도 아냐.”

“진짜?”

“어.”

“그럼 다행인데……. 아! 아까 혹시, 라고 했잖아. 뭐야? 뭐 물어보려던 거 아냐?”

녀석의 질문 공세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일단 모든 물음을 넣어 두기로 했다. 현재는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게 넘쳤으니까.

“형, 혹시 그거 알아?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

“그냥 키스 좋았다고, 멍청아.”

쉴 새 없이 말을 붙이던 녀석이 입을 일자로 꾸욱 다물더니 양 뺨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줍어하는 얼굴이 조금 열받았다.

* * *

쾅-!

‘몸이 가벼워.’

근래 있던 전투 중 제일 몸이 가벼웠다. 과거, 파트너 가이드가 있었을 때처럼 완벽한 컨디션에 역시 그건 가이딩이 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좋은데, 이대로 밀어붙인다면…….’

오른손에 힘을 집중해 평소보다 더 커다란 불꽃을 만들어 내던 찰나.

—낙유성 에스퍼! 들리십니까!

본부가 귀신같이 제동을 걸어왔다.

—힘의 충돌 때문인지 굴 주변에 충격이 큽니다. 대피소까지 진동이 오고 있어요!

“……칫!”

나는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김강민의 다급한 외침에 신경질을 내며 대꾸했다.

“그럼 어떡하라고! 녀석을 잡아야 할 거 아냐!”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아요!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녀석이 ‘휴식기’에 들어가도록 유도해 주십시오! 현재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X발, 진짜…….”

이게 무슨 자판기도 아니고 이렇게 해 달라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해 달라 하면 저렇게 되는 건 줄 아나. 이쪽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거라고!

싸울 거면 제대로 붙어서 녀석을 아예 소각시켜 버리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내 바람일 뿐,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일단 제일 큰 문제가 ‘방어 수단’이었다. 백산을 잡기 위해 싸우는 내가 그와 같은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젠장, 옛날처럼 나와 백산의 전투에서 시민을 지킬 에스퍼가 몇 명 있다면 좋을 텐데. 과거에는 결계를 펼치는 에스퍼들이 시민의 안전을 책임졌었는데, 지금은 홀로 감당해야 하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음 놓고 싸울 수도 없고, X발.’

저쪽은 진심을 다해 오는데 이쪽은 눈치를 봐야 하니 매번 밀릴 수밖에 없다. 거기다 말이 ‘휴식기에 들어가도록 유도해 주세요’지 실제론 그냥 샌드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백산의 불완전한 몸이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때까지 골고루 얻어터지며 시간을 끌어야 했으니까.

“허억, 허억…….”

쾅! 쾅!

“잘 피해 다니네. 그리움.”

“별 개 같은 별명으로 부르지 말랬잖아, 빌어먹을 자식아.”

“쥐새끼 같아.”

“X발…….”

이런 놈을 두고 하는 아슬아슬한 술래잡기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결국 놈의 공격을 직격탄으로 한 대 맞고 나서야 이번 싸움도 끝이 났다. 나는 피를 후드득 흘리며 겨우 본부로 복귀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주변 상황이고 나발이고 제대로 맞붙어 버릴까 하는 울컥함이 한 번씩 올라왔으나 앞서 말했듯 ‘송여환’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남을 희생해 얻은 안전과 평화로 녀석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치료 먼저 받으시죠.”

“하아…… 지친다.”

김강민에게 무전기와 소형 카메라 등등 주렁주렁 달려 있던 것들을 휙 던져 주고 의무실로 향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머리가 핑글 돌았다. 초반에 좋았던 컨디션은 이미 똥 된 지 오래였다.

차라리 백산이 휴식기에 들어가기 전 몸이 무너질 때를 노려 공격을 퍼부어 볼까도 했지만, 그때는 이상하게도 굴이 하나의 폭격기가 되기 때문에 쉽사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인간 형태의 몸이 잠들면 그 의지가 거대한 누에고치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혀를 차며 의무실로 들어간 나는 송여환이 오기 전 빠르게 치료를 받았다. 녀석이 보면 눈을 휙 까뒤집고 기절을 할 수도 있으니까.

“상처가 심하네요.”

“대충 감아 주세요.”

“어떻게 그럽니까, 우리 영웅에게.”

“…….”

징그러운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나는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 주는 담당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사람도 내 앞에선 웃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아니, 내가 눈앞에서 당장 사라지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려나? 그 X밥 새끼, 아무것도 못 하고 불안만 키운다고 할까? 정말 한순간이라도 나를 걱정한 적은 있을까?

……하긴 그게 다 뭔 소용이야. 나도 송여환의 안전만을 바라는 주제에.

“다 됐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더 이야기 나누길 바라는 듯 눈을 반짝거리는 담당의를 무시하고 의무실을 나섰다. 드르륵, 문을 열고 나오자 김강민이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아까 피 줄줄 흘리는 거 못 봤냐며 성질을 부릴까 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피곤함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란히 서서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아서 뚜벅뚜벅 복도를 걷자 김강민이 내 걸음에 속도를 맞춰 따라오며 본인 할 말을 줄줄 내뱉었다.

“낙유성 에스퍼가 힘들다는 건 알지만…… 오늘 같은 일은 안 됩니다. 대피소 지붕이 무너질 뻔했어요.”

“힘들다는 거 알면 입 좀 다물어 주지 그럽니까. 누구는 뭐 좋아서 지붕 무너뜨리고, 시민들 다치게 하고, 그러고 싶나? 싸우다 보면……!”

“…….”

“하아, 됐다……. 됐습니다.”

말해 뭐 하나 싶다. 어차피 저 자식도 위에서 들들 볶으니 이러는 거겠지. 김강민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말해 봤자라는 이유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김강민이 걸음을 우뚝 멈추며 입을 열었다.

“혼자 고생하고 계신 거 압니다.”

“예. 위로 감사하네요.”

나는 그를 두고 계속 걸어 나가며 설렁설렁 대꾸했다.

“낙유성 에스퍼.”

“피곤하니 그만 부르죠.”

“윗선에서 결정이 내려왔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퍽 진지했다.

“저희는 에스퍼를 만들 겁니다.”

……내용은 황당했지만.

“뭘, 만들어?”

“에스퍼. 정확히 말하자면 인조 에스퍼입니다.”

“약 먹었습니까?”

“지극히 정상입니다.”

“아니, 내가 보기엔 그쪽 정신 나간 거 같아서.”

나는 뒤돌아 팔짱을 낀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이딩과 비슷한 효과를 내 보겠다는 장치조차 개발에 실패했으면서 이젠 뭐? 에스퍼를 만들어? X발 이게 무슨 창의력 뚝딱 교실이야? 만든다고 하면 만들어지게?

어이없다는 내 눈빛을 읽은 건지 김강민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당황스러우실 거 압니다. 사실 저희도 자신 없어요. 그저 일단 해 보겠다, 라는 겁니다. 이것도 저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라도 뭐든 해 봐야죠. 살려면.”

“하……. 그래서 뭘 어떻게 만드시게?”

김강민은 천천히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낙유성 에스퍼의 DNA를 기반으로 실험을 해 볼 생각입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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