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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84화 (84/115)

84화

점점 비틀리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검진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본부에서 가이딩과 비슷한 효과를 내겠다며 만든 장치는 무소용이었고, 하다 하다 누에고치 일부분을 채취해 여러 방법으로 효과를 보려 했지만…… 내게는 영 반응이 없었다. 김강민도 그걸 아는지 입술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괴물 녀석이 회복기에 들어갈 때 나도 휴식을 취하는 게 파장을 가라앉히기에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하아…… 더 설명하긴 싫고, 이만 비켜 줬으면 하는데.”

나는 미련 없이 그대로 김강민을 지나쳤다.

긴 복도를 걸어 본부 바깥으로 나가자 미리 차를 빼 두고 기다리던 송여환이 늘 그렇듯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어. 빨리 가자, 피곤하다.”

“벌써 세 달째인데 어째 난 익숙해지지가 않냐. 형 그렇게 엉망인 모습으로 올 때마다…… 심장이고 위고, 너무 아파.”

싸우는 건 난데 말라 가는 건 녀석이었다. 요새는 신경성 위염도 앓는다고 죽는소리를 해 대기까지 해서 나를 웃겼다. 나는 송여환의 뺨을 손등으로 툭 치며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미리 히터를 틀어 놔서인지 몸은 금세 노곤해졌다.

“도착하면 깨워.”

“응. 시트 더 눕혀.”

“됐어.”

눈을 감자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폭삭 덮었다. 익숙한 냄새가 짙게 묻어나는 걸 미루어 송여환의 코트구나. 매번 덮어 주니까 이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버스럽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치워 내진 않았다.

“이대로 형 보쌈해서 도망가고 싶다.”

송여환이 차를 출발시키며 중얼거렸다. 뭐라 대꾸를 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졸려서 불가능했다.

‘기분 좋은 냄새…….’

녀석의 코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내 방 침대 위였다.

‘이 멍청이가…….’

깨우라고 했는데 또 멋대로 안아 들고 들어왔나 보다. 멍한 정신을 차리고자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뭐야……. 열이 있나?’

그러고 보니 목덜미도 조금 뜨거운 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젠장. 이럴 때 아프면 곤란한데. 혀를 차고 약을 찾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이미 해가 사라진 시간,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실 방 안에 있는 버저를 누르면 사용인 분들이 직접 찾아오는 시스템이 구축된 집안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얹혀사는 입장이다 보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도덕성 때문이라기보단 어색해서 그렇다는 게 더 맞지만.

나는 뺨을 긁적이곤 약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송여환을 찾기 위해 녀석의 방 앞으로 걸어갔다.

“자냐? 들어간다.”

별다른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에 있어야 할 주인이 없다. 썰렁한 내부를 한 번 훑고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

“뭐야? 꼭 필요할 때 찾으면 없다니까.”

그냥 돌아가기엔 목이 따끔거렸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송여환의 침대에 누웠다. 늘 녀석이 내 방으로 찾아왔기 때문인지 녀석의 방은 살짝 낯설었다.

‘뭔가 냄새가…… 되게 진하네.’

나는 후끈해지는 몸의 체온을 느끼며 느릿하게 기지개를 켰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기분이 좋은 거 같으면서 불쾌했다.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기분에 이리저리 뒤척이자 목에서 으음-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점점 정신이 나른해지고 감각은 예민해져 갔다.

이거, 뭔가 익숙한데……? 나는 열이 몰린 눈가를 꾹꾹 눌렀다. 설마 폭주? 아니,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다.

‘어쩐지 부족, 한데…….’

송여환이 사용하던 이불에 뺨을 비비적거리던 나는 문득 ‘부족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불안감은 곧 초조함을 닮아 가며 형태를 바꾸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쉴 새 없이 뛰었다.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하아…… 후으.”

어느샌가 내 몸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부족해.’

턱 아래로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곤 뭐에 홀린 듯 송여환의 방 안을 미친 듯 뒤지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일단 녀석의 방과 이어져 있는 작은 피팅 룸으로 가 이것저것 옷을 집어 왔다. 바닥으로 질질 떨어지는 옷가지가 기다란 길을 만들었다.

나는 침대 위로 잔뜩 집어 온 옷들을 던지곤 그 안에서 또 골라내기 시작했다. 송여환, 그 녀석의 체취가 가장 많이 묻어난 것들로만 쏙쏙 집어냈다. 양말, 속옷, 코트, 잠옷 할 것 없이 말이다. 그 후엔 녀석이 자주 사용하는 만년필, 벨트, 굴러다니는 잡다한 모든 것을 주섬주섬 챙겨 침대 위로 던졌다.

“하아…… 하아…….”

침대를 가득 채운 옷과 물건들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만족감은 뭘까? 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그 위로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지만 그걸 뛰어넘는 기분 좋음에 다른 생각을 깊게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아…….’

몸을 바르작거리며 녀석의 옷가지 위로 코와 뺨을 문댔다. 달큼한 냄새에 아랫배가 오싹오싹했다.

“흐…….”

그러자 아주 신기하게도 어지러움을 유발하던 두통이 싹 사라졌다. 몸은 여전히 후덥지근했지만 불쾌했던 아까와 달리 간질거림이 섞인 아주 야릇한 열감이었다.

그렇게 내가 한창 만족감에 녹아내리고 있을 때였다. 잠잠하던 방문이 덜컥 열렸다.

“누나는 뭔 한밤중에 일 얘길…….”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말이 뚝 멈췄다.

“…….”

동시에 방 안의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나는 치아를 살짝 지르물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순간 내가 왜 이 방에 있는 건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끝없는 물음이 생겼으나 낮은 음성으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형?”

가까이 다가와 내 몸을 살살 흔드는 손길,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녀석의 체온……. 모든 게 좋았다. 전부 내 것만 같았다.

“뭐야. 열 나잖아.”

내 이마를 덮은 손이 천천히 떨어지고, 녀석이 심각히 중얼거렸다. 몽롱한 정신인 와중 녀석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게 무척 아쉬웠다.

“잠깐만 지금 약…… 아니다. 주치의 선생님 불러올게.”

멀어지려는 송여환이 시야에 잡힌 순간, 나도 모르게 녀석의 손목을 콱 잡아당겼다.

‘또 어디 가게? 네가 있어야 내가 안정되는데, 이런 날 두고 어디로 사라지려는 거야.’

머릿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마구 치솟아 올랐다.

“잠깐…… 악!”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아파! 뭐야, 뭐가 등을 찔렀어?! 마, 만년필이 왜…… 엇, 형 이거 내 속옷…… 인데?”

침대로 쓰러진 송여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음표 수백 개를 띄웠다. 그러다 제 속옷 뭉치를 발견하곤 예쁘장한 얼굴을 확 붉혔다. 입을 꼭 다물고 눈만 껌뻑이는 녀석은 꼭 잘 익은 버찌 같았다. 특히나 종알종알하는 붉은 입술이 유독 그랬다. 촉촉하고, 빨간 게 너무 탐스러웠다.

“형, 열나는 거 같- 읍!”

뭐라는 건지 모르겠고, 벌려진 입안의 붉은 살덩어리가 그저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대로 입술을 내리눌렀다. 질척하게 얽히는 녀석의 혀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낮은 신음을 배경 삼아 계속해서 녀석의 입안을 탐했다.

숨과 숨이 섞이고, 타액이 넘쳐흐를 때까지 녀석과 나는 서로를 공유했다.

“하아, 으흐…….”

그렇게 송여환의 위에 엎드려 누구의 신음인지 구분되지 않을 무렵까지 입술을 물고 빨아 대던 나는 막히는 숨에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아니, 떼어 내려 했다.

“……아직 안 돼.”

“흐, 읍!”

송여환이 내 목뒤를 억세게 눌러 다시 입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다. 녀석답지 않은 강제적인 행동이었으나 굳이 거부하진 않았다. 송여환과 숨을 나누고 혀를 섞을수록 몸의 안정을 되찾는 건 나였으니까.

“하아, 형한테서, 되게, 단, 냄새가 나…….”

어느샌가 위치를 바꾼 녀석이 내 목덜미에 코를 박고 한참을 킁킁거렸다.

나는 녀석의 품에 끌어안긴 채 주변을 훑어봤다. 온통 송여환과 연관된 것으로 가득 찬 공간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최고의 만찬을 먹은 듯 배가 부르고 몸에 쌓여 있던 독이 사르르 풀어지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의 커다란 쾌락, 그 자체였다. 이대로 영원히 있고 싶을 만큼.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줘…….’

나른한 숨을 뱉으며 녀석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렇게 새벽 내내 이어진 짙은 애무의 시간이 흐르고 해가 고개를 들 무렵, 나는 침대 바깥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온몸에 잇자국이…….’

샤워하고 나온 나는 불긋한 자국이 가득한 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강아지 새끼가 따로 없다. 뭘 이렇게 잘근잘근 씹어 놓은 건지.

“적당히를 모르지.”

쯧, 혀를 차곤 옷을 입었다. 머리를 탈탈 털고 나오니 따뜻한 차를 들고 서 있는 송여환이 보였다. 녀석은 부러 내 눈치를 살피는 척하며 아양을 떨었다. 본인도 너무했다는 자각이 있나 보지?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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