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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83화 (83/115)

83화

나는 녀석과 침대에 누운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넌 어디 가서 이십 대라고 하지 마라.”

“애기라고 할게. 형 애기.”

“송여환.”

“……분위기 파악할게.”

쫓아내려 마음먹는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나 얽히는 다리와 등을 토닥여 오는 손이 의외의 안정감을 주어 나는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저 녀석의 곁을, 그리고 저 녀석에게 내 곁을 허락하고 있었다.

“우리 자기 살 빠진 거 같아.”

“건방 떨어라, 자꾸.”

“형이라고 한 건데…… 못, 못 들었구나?”

“…….”

“근데, 형.”

“자라고.”

무시하려 했으나 송여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등을 토닥이며 걱정스럽단 말투로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들켰겠지?”

X발, 잠시 잊고 있었다. 밀려오던 졸음이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하긴 아무리 새벽이라도 그 난리를 쳐 댔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를까? 송여환은 내 이름을 고래고래 불러 댔지, 나는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누에고치 안에서 거대한 화염까지 만들어 냈다.

이쯤 되면 사실 우리 둘 다 숨기고 싶은 마음은 단 1g도 없었던 거 아닐까.

“……기자들이 좋아하겠네.”

“희망을 가져 볼까? 새벽이라 아무도 못 봤을 수도 있잖아.”

“마음의 각오나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미안해. 내가 괜히 나서서…….”

송여환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영원한 비밀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 편이지만 굳이 녀석의 말을 정정해 주진 않았다. 그래야 녀석이 나를 찾겠답시고 또 위험한 짓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다음 날, 우리는 멍청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했다. 송여환의 불길한 예언이 정확히 적중한 거다. 대중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 지 하루 만에 들키다니. 민망하기까지 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라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일까요? 일단 기자들의 출입은 전부 통제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곳곳에서 울려 대는 전화기에 본부 사람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가 너무 편하게 생각한 것도 있지만…….”

김강민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나와 송여환을 흘깃거렸다. 최대한 언론에 노출되고 싶지 않아 부러 새벽에 움직인 건데, 그걸 또 들켰냐? 하는 눈빛이었다.

왜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할 말도 없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김강민이 볼펜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된 일입니다. 알잖아요. 평생 숨길 수도 없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낙유성 에스퍼를 전면에 내세워 낮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들킨 거 차라리 활용을 해 보자는 말이었다. 아예 노출해서, 밤에만 움직일 수 있다는 행동의 제약을 없애자는 뜻.

“혹시나 오해는 마세요. 저희도 언론에 노출되는 건 그다지 원치 않는 입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봤자 이득이 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만약 가능하다면 이대로 쭉 비밀리에 모든 일이 진행되길 바랐습니다.”

김강민이 송여환을 향해 말했다. 계속 갈굼을 당하니 미리 차단하는 것 같았다. 지긋한 그의 시선을 송여환은 모른 척 고개 돌려 피했다.

“……물론 결정은 낙유성 에스퍼가 하는 겁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죽어라 잡아떼 보는 거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어쩐지 간절한 그 눈빛들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눈 가리고 아웅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미 기사란 기사는 전부 나돌고 있는 상태다. 뭐 하나 팩트 체크된 것 없는 카더라 가득한 낚시용 기사였지만…… 불꽃을 찍어 낸 몇몇 사진도 있어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당장 한 뉴스 댓글만 봐도 그렇다.

[wu***: 합성 아님? 찐으로?]

[yqa***: 내가 낙유성이면 다 ㅈ돼바라하고 절대 안싸움ㅋㅋㅋㅋ 아님 돈을 ㅈㄴ 받든지]

[cc***: 제발 ㅠㅠㅠ 살려주세요ㅠㅠㅠㅠㅠㅠ]

[qwr***: 그때 악플단 새끼들 지금 개쫄릴 듯]

[fim***: 힘이있는데 왜 진작 안나온거지????? 희생된 사람들도 꽤 있는 걸로 아는데?? 나만 수상함??]

카메라 기술이 좋나? 그 새벽, 화염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찍은 건지. 소문이 퍼져 나가는 속도가 굉장했다.

나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기자회견은 딱 한 번으로 하죠. 그 외 다른 취재는 받지 않는 조건입니다.”

애초에 에스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에 ‘평온한 삶’ 따위 추가될 수 없다. 송여환과 있으니 나도 모르게 뇌가 말랑해졌나 보다. 아니, 솔직히 어떻게든 되겠거니 생각했다. 이게 현실인데 말이지.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사람들이 알게 된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건 변치 않으니까. 그것에만 집중하면 될 거라 여겼다.

그래, 그랬었다.

“헐. 대박 낙유성이다.”

“사진 찍어 달라고 할까?”

“저기요! 응원하고 있어요!”

‘에스퍼 낙유성’이란 존재가 얼마나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고 말이다.

괜찮을 거라 여겼던 타인의 관심이…… 아니, 관심‘들’이 생각 이상으로 힘겨웠다. 길을 걸을 때 몰려드는 시선이나 누에고치 주변을 탐색하기 위해 다가가면 쏟아지는 함성, 전투를 끝내고 나면 마구잡이로 던져 오는 꽃다발들까지.

‘……적당히 해라. X발.’

본인들이 재미로 매도했던 상대가 유일한 희망이 되었으니 없던 양심이 찔리기라도 한 건지, 사람들은 나를 깠던 것의 몇 배만큼 열렬한 지지를 보여 줬다. 마치 전에 했던 잘못을 덮으려는 것처럼. 아니면 ‘낙유성이 기분 상해서 우릴 버리면 어떡해?’ 싶은 마음에 유난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어느 쪽도 민폐였다. 나는 응원도 관심도 필요 없으므로. 심지어 가끔 받는 익명의 편지 뭉치가 있는데, 그게 제일 최악이었다. 전부 송여환의 손을 한 번 거쳐 오지만 사실 그게 그거였다.

내용은 전부 달랐으나 하나같이 열받는다는 점이 똑같았다. 과오를 고백하며 사죄하는 이도 있었고, 왜 진작 싸우지 않았냐며 따지는 이도 있었고, 남들이 다 욕할 때 저만은 꿋꿋이 믿고 있었다며 별 같잖은 개소리를 하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의 양면성이 새삼스럽지만 놀라웠다. 정말 송여환이 예견한 대로 사람들은 내게 검을 쥐여 주고 투구를 씌워, 하나의 영웅으로 만들어 냈다. 과거, 나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온갖 SNS에서 ‘낙유성’을 향한 애정 섞인 응원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인류의 절망으로 볼 수 있는 ‘백산’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공포로 자리 잡았을 테니까. 그런 어쩔 도리가 없는 와중 나타난 ‘에스퍼’의 존재는 그야말로 붙잡을 수밖에 없는 기적의 동아줄이리라.

하지만 정작 내게는 사람들의 기대 따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 그 자체가 방해였다. 백산과 전투할 때가 특히 심했다.

일부 대피했지만…… 아예 마음을 놓고 싸울 수 없었다. 주변 사정 봐주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 녀석과 달리 나는 최소한의 피해를 내야 했기에 움직임의 제약도 많았다. 신경을 조금만 덜 써도 일어나는 건물 붕괴나 화재 등으로 심각한 인명 피해가 생길 수 있어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또 내가 온전한 힘을 내지 못하니 백산을 제압할 수도 없어 녀석으로 인한 피해는 나날이 커져 갔다. 이렇게 해도 사람이 죽고, 저렇게 해도 사람이 죽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빌어먹을…….’

불리한 싸움의 연장전에 지쳐 갔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었으니. 내가 아닌 지선우…… 그러니까, 맞지 않는 몸으로 태어난 탓에 백산의 몸은 불완전해 재생 능력이 월등히 떨어져 회복기가 길었다. 나와 전투를 벌이면 녀석은 꽤 긴 시간을 ‘회복’ 상태에 들어가야 했다는 말이다.

본부는 그 부분을 돌파구로 잡고 인류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세 달이 흘렀다.

‘하아……. X발…… 피곤해.’

이젠 퍽 익숙해진 백산과의 전투를 끝내고 너덜너덜해진 채 본부로 복귀했다. 해결하는 데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릴지 몰랐던 터라 요새 본부 사람들은 백산에 대한 경계만큼이나 내 몸 상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검진을…….”

정확히는, 혹시 모를 폭주에 대비했다.

“됐습니다.”

다가온 김강민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그래도 검사받는 게 낙유성 에스퍼를 위해서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검진해 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거 알지 않나?”

괜찮다고 했는데도 들러붙는 게 짜증 났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스트레스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보다 예민한 이유는 아마 막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탓이겠지.

스스로 느끼기에도 과한 흥분이었으나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만하라는 의미로 김강민을 쳐다봤다.

“위험합니다.”

그러나 김강민은 그만두지 않았다. 고집통머리가 여간 센 게 아니다.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하는데?”

“주변이, 위험합니다. 낙유성 에스퍼. 더 이상 말릴 수 있는 에스퍼나 가이드가…… 없으니까요.”

호기롭게 꺼낸 것치고 뒷말이 흐렸으나 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픽 입꼬리를 올렸다. 뭐가 ‘낙유성 에스퍼를 위해서라도 좋습니다’냐. 자기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주제에.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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