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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82화 (82/115)

82화

“그리고 이제부턴 추측입니다만…….”

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피부가 녹아내리던 백산의 모습을.

“아마 놈의 능력 사용 시간은 아주 짧거나 혹은 사용 범위만큼의 리스크가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면해 본 결과, 놈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걸 파고들면 분명 승산이 있을 겁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파고들 것인가’겠지. 유감스럽게도 아직 백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또한 이쪽에서 대응할 수 있는 카드는 나뿐. 만약 내가 놈에게 크게 밀린다면 최악의 경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희생을 얹은 싸움으로 번지게 되리라.

“첫날부터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단 따로 검사받고-”

“아뇨.”

나는 김강민의 말을 끊어 내며 옆쪽을 흘깃거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혹시라도 긴급 상황이 생기면 바로 현장으로 갈 테니 걱정 마세요.”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어떤 똥강아지를 달래 줘야 했기에 나는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눈짓으로 남은 인사를 전하고 걸음을 돌리려는데, 김강민이 붙잡았다.

“낙유성 에스퍼.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 전달드립니다. 본부에서 내린 결정 사항입니다. 앞으로 가이딩과 비슷한 힘을 낼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보겠다고 하니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가이딩……. 그러고 보니 안 받은 지 오래된 거 같은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몇 번 위기가 오긴 했는데…… 그건 좀 다른 감각이었고. 심지어 아쿠벨 꼬맹이에게 강제 가이딩을 당했을 땐 역하기까지 했다.

‘……뭔가 위화감이…….’

고개를 기울이며 잠깐 생각하다 알겠다는 의미로 끄덕였다. 본능적으로 깊게 머리를 써야 할 문제를 피한 거다. 지금은 그거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게 많았으니까.

“가자.”

나는 송여환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말했다. 함께하는 귀가가 이젠 아주 자연스러웠다.

* * *

“내가 이렇게까지 그릇이 작은 남자인 줄 몰랐어.”

“…….”

“나름 간덩이 부었다 자부하고 살았는데. 전혀. 네버.”

“퉤.”

“나 아무래도 수명이 단축된 거 같아. 응? 이대로면 분명 서른 전에 죽을 거야. 확신해. 백 퍼센트야.”

“아르르르르.”

“형? 내 말 듣고 있어?”

“퉤! 야, 이거 바꿔. 너무 매워.”

“매워? 알았어. 내일 당장 바꿀…… 게, 가 아니라!”

“좁아. 비켜. 이러다 해 뜨면 자겠다.”

양치질과 세수를 끝낸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욕실을 나섰다. 그러자 녀석이 종종걸음으로 내 뒤를 따랐다.

“혀엉. 나 진짜 오늘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어.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있다는 거잖아. 나 진짜 미칠 거 같아. 어? 형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너도 팩 붙였잖아.”

“어떤 상황에라도 관리는 필수야.”

“……자라.”

송여환에게 정중히 나갈 것을 권했지만 녀석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침대로 냉큼 올라갔다. 물론 성인 남성 두 명 정도는 여유롭게 누울 수 있는 사이즈의 침대였지만 그렇다고 녀석과 같이 잠자리에 드는 건 계획에 없었다. 각자 방이 있는데 굳이 왜?

“송여환. 나 피곤해.”

“누워. 안마해 줄게.”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내가 픽 웃으며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자 송여환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 그 말, 지금 나…… 되게 의식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헛소리 말라는 핀잔을 주려 고개를 돌린 순간, 송여환과 눈이 딱 마주쳤다.

“…….”

“…….”

조용한 방 안에 숨소리만이 흘렀다. 녀석도 나도 한마디 말없이 코가 닿을 거리에서 침묵을 지켰다. 마치 얼음땡 놀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보인다면 뭔가……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날 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탐색전이 길어질수록 송여환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갔다. 녀석은 내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다,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어물어물 말했다.

“왜 전쟁 통에도 아이가 생겼다는지 알 거 같아.”

겨우 꺼낸 말이 그거냐며 비웃고 싶었지만, 평소보다 나른히 속삭여 오는 게 퍽 간지러워서 애써 덤덤한 척 대꾸했다.

“난 모르고 싶은데.”

“키스해도 돼?”

“모르고 싶다고 방금 말- 읍!”

망할 녀석.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녀석이 내 입술을 덮쳤다.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게 입술을 꾹꾹 누른다. 마치 아기 고양이가 오동통한 젤리 발바닥으로 내 입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키스…… 보단 뽀뽀에 가깝달까. 한참을 쪽쪽거린 녀석이 푸흐흐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다.

“열어 줘.”

근데 나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녀석이 소중한 것과 별개로 이런 행동을 허락한 적은 없지 않나? 녀석이 폭주의 기운을 보였던 때를 제외하곤…… X발. 뭐야. 나는 송여환과 정확히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거지? 송여환을 지켜 주고 싶은 건 맞는데…….

눈을 깜빡거리다 애교를 부리는 녀석의 뺨을 콱 쥐어 떼어 냈다. 그러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녀석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여우 새끼. 나를 홀린 건가?’

나는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들려는 어떤 감정을 모른 척 짓밟고선 괜히 녀석에게 화풀이해 댔다.

“비켜, 더워.”

“악!”

뺨을 쥔 손을 놓는 동시에 녀석의 이마를 딱- 때리자 후끈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식었다.

“이씨!”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나를 노려보는 송여환. 나는 분위기도 바꿀 겸 어차피 했어야 할 대화 주제를 꺼내 들었다.

“장난 그만 치고 들어.”

“넌 네 힘이 장난 같-”

“본부에는 말하지 않은 거야.”

나는 조용히 ‘백산’에 대한 모든 진실을 송여환에게 털어놓았다. 다행히 지선우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던 그였기에 상황을 이해하는 게 빨랐다.

“……아리아 녀석이 원하던 대로 흘러갔더라면 아마 원래는 내가 됐어야 했던 거겠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송여환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듣는 내내 괴로워하던 녀석이니 그럴 만했다.

“……끔찍해.”

꽤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녀석이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게 뭐야. 너무 잔인해. 아무도 행복하지 않잖아.”

송여환이 숨을 몇 번 고르고는 지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동감이었다. 아리아, 그 녀석은 제멋대로 백산의 부활을 감행했을 때 다시 태어난 그가 과연 행복해했을 거라 믿었던 걸까. 그건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형은 괜찮아?”

혼자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옆에서 걱정 어린 목소리가 닿아 왔다. 송여환은 말을 고르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며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말을 건넸다.

“선, 하아, 선우…… 형님이잖아.”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난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렸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나를 괴롭힐 수많은 선택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나는 괴로워하는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헤집으며 대꾸했다.

“용기를 내야 할 때는 내야 한다며.”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다.

“네가 그랬잖아. 송여환.”

과거의 모든 감정을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 위를 새롭게 덮을 수는 있을 거다. 상처는 언젠가 아물 테고, 새살은 분명 돋아나니까.

내 대답에 눈을 크게 뜬 송여환이 곧 피식 웃으며 흐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목소리에선 안타까움과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나도 함께 싸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실 나는 송여환의 이능력이 사라져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굳이 말하진 말아야겠다.

“무능력한 남자가 된 기분은 최악이야.”

잔뜩 우울해진 송여환이 은근슬쩍 나를 끌어안았다.

“위로해 줘.”

날이 지날수록 뻔뻔해지는 녀석이다. 하지만 끌어안는 품이 싫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넓은 어깨 위로 고개를 기댔다. 많은 말보다 더 강렬한 의미를 담은 위로였다. 송여환도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내 몸을 느릿하게 쓸었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안겨 있다 슬슬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근데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냐.”

“방, 방이 좀 춥네?”

놓으라는 의미로 몸을 물리려고 하자 녀석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다급히 힘을 줬다. 힘이 바짝 들어간 녀석의 팔뚝이 나를 꽈악 제압했다. 이젠 포옹이 아닌 조르기였다.

“이, 씹, 안 놔?”

“싫어!”

애틋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을 자야 할 거 아냐!”

“같이 자! 재워 줘!”

“X발. 네가 애새끼야?”

“어! 애야!”

사람이 어떻게 저토록 철판을 깔 수 있을까. 녀석이 소중한 건 소중한 거고, 나는 꽤 객관성이 있는 인간이라 절대 송여환이 어리고 연약한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본인 입으로 애라고…… 아니, 잠깐만. ……어리고 연약한 건 맞지 않나?

“쫓아내지 마! 오늘 악몽 꿀 것 같단 말이야. 너는 형이잖아! 배려해! 양보해! 아아아, 진짜 형이랑 자면 안 무서울 거 같다고!”

“…….”

“형이 지켜 줘. 응?”

또 저 큰 눈으로 불쌍한 척하며 매달려 온다.

‘아주 습관이 됐군.’

녀석은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더욱 기세 좋게 밀어붙였다. 결국 고집스레 나를 놓지 않은 송여환의 승리로 우리의 몸싸움은 끝이 났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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