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직접적으로 손을 댄 건 아니었으니 혹시 염력 같은 건가? 나는 녀석을 경계하며 슬쩍 거리를 벌렸다.
‘돌아가야 하나.’
만약 본부와의 연결이 끊기는 상황이 온다면 바로 복귀하기로 했다. 하지만…… 딱히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이는데. 그냥 돌아가면 아깝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와중 녀석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설핏 웃음 지었다.
“도통 감을 못 잡는군. 희생된 이가 꽤 슬퍼하겠어.”
“뭐?”
“나의 이름은 백산. 과거에는 여인의 몸으로 그렇게 불렸었지.”
……백산?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다. 나는 입안으로 백산, 백산 하며 단어를 굴렸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던 순간, 머릿속으로 번개가 내리치듯 억지로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 ‘백산 혼자 외롭게 죽지 않아도 되는 거야.’ ]’
‘[ ‘백산의 핏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그녀와 닮은 힘, 강한 영혼. 그녀의 환생을 위한 재료로 충분했지.’ ]’
‘[ ‘네 뼈와 살과 영혼을 좀 주지 않을래?’ ]’
그리고, 그 사람까지.
‘─잘 있어, 유성아.’
“어……?”
나는 눈앞에 있는 믿을 수 없는 존재를 쳐다봤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아니다. 절대 아니어야 했다. 주춤주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걸…… 환생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뒤죽박죽이야. 아직도 내가 백산인지, 아닌지 헷갈린단 말이지. 거기다 이 몸의 재료가 된 이의 감정도 조금씩 느껴져서 여간 곤란한 게 아니야.”
나는 과연 누굴까. 백산이란 녀석이 중얼거리더니 뒷걸음질 치던 내게로 훅 다가왔다. 기다란 손가락이 턱을 억세게 잡아 들었다.
“큭…….”
“눈을 뜨니 처음 보는 세상에, 내 존재 자체도 알 수가 없는 기분…… 알아?”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한다.
“정말 미쳐 버릴 거 같아.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그리움, 애정, 후회……. 모든 게 낯설어. 이 감정들이 내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어.”
“윽…….”
“다시 태어나길 바란 적은 맹세코 없는데……. 이 원망을 누구에게 풀어야 하나 몹시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들은 전부 거슬려서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너는 또 아니야. 으음…… 그래, 아마 네가 내 안에 있는 그리움이라 그런 거겠지.”
정말로 이 녀석이 지선우의 뼈와 살, 그리고 영혼을 바쳐 만들어진 거라고? 하지만 전혀 다른 생김새와 기운인데……. 지선우였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을까? 분명 나를 현혹하기 위한 거짓말일 거다. 그래, 그게 맞다.
‘……그런데 왜 이 손을 뿌리칠 수가 없는 거지.’
녀석이 굳어 버린 나를 천천히 훑는다.
“너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죽여 볼까 해.”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긴 그림자가 진다. 평온한 얼굴, 나른한 목소리. 하나 대비되는 잔혹한 말. 녀석은 꼭 ‘악’ 그 자체 같았다. 맑고 순수하여 더욱 잔인한 ‘순수 악’ 말이다.
“눈을 뜨고 사람들을 내려다봤는데, 하나같이 징그럽더라고. 우글우글한 게 끔찍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 분명 마음 한구석에서 외치고 있었어…… 인간이 싫다, 고.”
“……헛소리.”
“그럴지도. 나도 내가 제정신인지 영 확신이 안 서. 아리아 그 말괄량이 같은 게 기어코 금기를 어긴 건 맞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잉태를 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며, 사내의 몸이라니. 흐음, 이런 나도 ‘백산’이라 칭해야 하는 건지…….”
“…….”
“네가 보기엔 어떻지? 내가 과거 백산과 동일 인물이라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이 몸의 뼈, 살, 영혼은 네게 가까웠던 인물의 것이니 나는 너의 그와 동일 인물이라 할 수 있는가?”
‘네가…… 지선우랑……?’
바닥으로 떨어졌던 정신머리가 다급히 돌아왔다. 지선우와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있냐고? 당연한 걸 묻고 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이를 악물며 녀석의 손을 쳐 냈다. 적막이 감돌던 공간에 매서운 소리가 짝- 울려 퍼졌다.
내가 망가졌던 시절이었더라면, 송여환과 지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을 ‘신’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그랬을 것 같다. 소중한 형을 버린 나를 심판하기 위해 내려온 신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용기를 내야 할 때는 내야 해.’
‘다른 건 다해도, 자학은 하지 마.’
‘내가 너 좀 지킬 수 있게 해 줘.’
과거에 묶여 있기엔 나에게 새로이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다. 더 이상 머저리처럼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인간을 모두 죽이겠다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백산을 노려봤다.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곤 여유롭게 대꾸했다.
“본보기라도?”
그러면서 막혀 있던 한쪽 벽을 순식간에 없애 버렸다. 바깥으로 이어진 동그란 구멍으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뭘 하려는 건지 의아한 찰나, 저 아래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유성-!”
……송여환?
“낙유성, 살아 있지!”
이런 X발!
“저 멍청이가!”
왜 찾아온 거야, 위험하게! 나는 황급히 백산을 쳐다봤다.
녀석은 특유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조용히 웃음 짓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육감이 경고를 알렸다. 마음 같아서는 송여환에게 도망가라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 딱…….”
백산이 바깥으로 손을 뻗는 순간, 앞뒤 잴 것 없이 거대한 화염을 만들어 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태울 작정으로 꽤나 커다란 힘을 끌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백산은 여유로워 보였다. 아니, 아주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루할 거라 생각했는데…… 꽤?”
“여유 부릴 때가 아닐 거다.”
“기세가 훌륭해. 하지만 내 앞에서는 누구든 어리석은 오만이 될 뿐이야.”
“넌 자만하다 큰코다칠 거고?”
“혀도 날카롭나 보군.”
“이 정도면 많이 죽었지.”
뜨거운 공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그래. 우리 같은 사람이 언제 말로 위아래를 나눴나, 그저 실력으로 정할 뿐이지.”
녀석에게 피해를 입히진 못했지만 적어도 관심을 다시 내게로 끌었다는 점에선 다행이었다. 나는 슬쩍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커다란 불꽃의 폭발을 분명 송여환도 보았을 터. 그 똥강아지라면 어떻게든 이곳으로 올라오려 하겠지.
송여환이 주변에 있다면 마음 놓고 싸울 수가 없다. 일단은 물러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백산이 쉬이 보내 줄지가 문제였다.
일단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한 번 더 공격을 쏟아부으려던 찰나,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이런…… 쓸모없는 몸 같으니.”
내 화염에도 여유 만만이던 놈의 뺨 한쪽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진 살점. 백산의 얼굴 반쪽이 너덜너덜해졌다. 공격이 이제야 먹혔을 리는 없고…… 뭐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백산이 혼자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썩 좋은 재료는 아니었나 보구나. 조금만 무리해도…… 쯧.”
혀를 찬 녀석이 바깥으로 고갯짓을 했다.
“의욕이 떨어진 건 피차 마찬가지 같은데. 보내 줄 때 가 보지 그래. 나도 잠시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으니.”
“…….”
“아…… 아니면 널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백산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또 보자고, 그리움.”
녀석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그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처절함 외침에 급히 걸음을 옮겼다.
매달아 놓은 로프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눈시울을 잔뜩 붉힌 송여환이 보였다.
“다친 곳은?!”
녀석이 다가와 내 어깨와 팔뚝을 바쁘게 매만지며 물었다.
“없으니까 진정해.”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통신도 끊기고 카메라도 아예 화면이 나가 버렸는데!”
“그래서 무작정 여기로 온 거냐? 위험하다는 거 뻔히 알면서?”
차분히 말하려 했는데 생각해 볼수록 괘씸해서 나도 모르게 머리로 점점 열이 몰렸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목숨 귀한 줄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와?
“내가 말했잖아. 찾으러 오겠다고.”
하지만 송여환은 반성의 반 자도 보이지 않고 되레 표독스럽게 따지고 들었다. 정말 한 대 콱 쥐어박을까?
“너……!”
오랜만에 정색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머릿속에 과거, 삶을 끝내려 했을 때 나를 붙잡고 불같이 화를 내던 송여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그렇게 화를 내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젠 알 것 같다. 죽지 않길 바라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겁이 나서 그랬구나.’
“뭐…… 뭐! 뭐, 왜! 때, 때리게?”
“……됐다. 가자. 보고할 게 있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나는 옆에서 찡얼거리는 녀석을 끌고 본부로 돌아갔다. 가는 길 내내 무슨 일이 있었냐 꼬치꼬치 캐묻는 송여환에게 가서 말해 주겠다며 피곤한 얼굴로 달램 아닌 달램을 해 줘야 했지만. ……정말 이럴 때 보면 어리다는 티가 확 났다.
그렇게 잔뜩 울상 지은 송여환을 데리고 도착한 본부에서 나는 2차로 ‘괜찮습니까?’ 폭격을 맞아야 했다. 송여환에게 했던 행동과 달리 대충 고개만 까딱여 주곤 본부장과 김강민을 찾아 대화를 나눴다.
당연하게도 백산에 대한 모든 걸 자세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차원 이동부터 지선우에 대한 걸 다 설명해야 했으니까. 대신 ‘녀석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이며 인간에 대한 분노를 가진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즉, 녀석을 완벽한 제거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지선우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백산을 나는 망설임 없이 ‘인류의 적’으로 간주했다. 스스로조차 놀라울 만큼 미련이 없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