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다들 양심이 있으면 도와 달라고 하면 안 되지. 사람을 아주 나락까지 끌어 내리면서 비웃어 놓고 무슨 자격으로!”
“그렇다고 모두 죽게 둘 겁니까? 힘이 있다면 써야죠. 욕 좀 먹었다고 사람 목숨을 버릴 겁니까? 그것도 한두 명이에요? 전 세계가 걸린 문제입니다.”
“욕 좀 먹었다고?”
송여환이 사내를 위협하며 소맷자락을 걷어붙였다. 이대로 두면 멱살잡이라도 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에 그만두라는 말을 던지려던 찰나, 접객실의 문을 열고 집사장이 들어왔다.
“도련님.”
차분한 음성에 송여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노기를 가라앉혔다. 짧게 혀를 찬 녀석이 도로 주저앉아 가슴을 퍽퍽 내려친다.
집사장은 그런 녀석과 내게 너무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다면서 향이 좋은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러더니 다른 두 사람에겐 아주 우아한 자세로 투명하고 맑은…….
‘……저거…….’
“청정 암반수입니다.”
물을 줬다.
물끄러미 집사장을 쳐다보자 그는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조용히 웃었다. 냉수를 받은 사내 둘은 나와 송여환 앞에 놓인 향긋한 차를 한 번 흘긋대곤 미묘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 사히 마시겠습니다……?”
“예. 부족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많이 있으니까요.”
집사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나가기 전 ‘수돗물 없는 집은 없으니까’라며 흘리듯 중얼거린 말은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척하기로 했다. 옆에서 송여환이 ‘나이스’ 하고 중얼거린 것 또한.
“큼, 일단 아까의 실언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사명감에 휘둘려 실례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낙유성 에스퍼가 많이 억울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냉수를 벌컥댄 사내가 입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냉정해지셔야 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부디…… 감정보단 이성으로 사건을 바라봐 주십시오.”
그러곤 파일 하나를 건넸는데, 그 안에는 누에고치에 대한 여러 정보가 담겨 있었다. 에스퍼가 사라지고 ‘협회’는 없어졌지만, 그 기술력만큼은 남아 있었기에 누에고치에 대한 작은 단서들을 얻어 낼 수 있었던 듯했다.
팔락팔락. 재빨리 넘겨 보자 놀랍게도 누에고치는 던전과 유사한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또 어느 면에선 가이드가 만들어 내는 가이딩과 비슷한 파장까지 뿜어낸다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일단 낙유성 에스퍼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저 누에고치, 그러니까 그 사내를 저희는 일단 제로라고 부릅니다만, 예. 제로를 누에고치 바깥으로 끌어내는 겁니다. 아직 전부 추측이지만 제일 가능성 있는 가설은 제로가 누에고치에서 가이딩과 비슷한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태어난 집이라고 봐도 좋고요.”
“…….”
“그러니 회복이든 힘의 충전이든 방해를 해 보자는 거죠. 거기서 더한 단서를 얻으면 럭키고요.”
줄줄 뱉는 사내의 말은 그럴듯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누에고치에서 나타난 녀석의 외형은 어디로 보나 인간과 똑같았다. 그리고 보여 준 믿을 수 없는 힘. 만약 나타난 곳이 누에고치 안이 아니었다면 ‘에스퍼’라고 단정 지었을 거다.
고로 누에고치, 통칭 ‘굴’에서 떨어진 제로라는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실험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굴과 멀어졌을 때 힘을 사용할 수 없다거나, 힘의 제한이 걸린다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전에 말이 통하는지도 확인을 해 보고 싶은데…… 저희가 다가가기만 해도 족족 공격해 오니 방도가 없습니다.”
“유성이 형한테도 공격을 해 오면?”
가만히 듣고 있던 송여환이 다리를 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건…….”
“말이 좋은 거지, 형은 에스퍼니까 가서 맞다이라도 하라는 거 아냐? 아니면 방패로 쓰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면? 말해 보시라니까요.”
“……도움을,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저희에겐 아무런 힘이 없으니까요. 낙유성 에스퍼에게 기대려 하는 거 맞습니다. 부정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이쪽 입장도 이해해 주십시오. 저희는 오로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사내 둘은 절실해 보였다. 실제로 두 사람이 과거 내게 욕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수많은 사람을 위해 대신 욕을 먹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들은 진심으로 세계를 위해,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하지만 그게 송여환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나 보다. 송여환은 픽 입꼬리를 올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은 똑바로 하죠. ‘저희’가 아니라 ‘한 명’이라고.”
송여환은 코웃음을 치곤 말을 이었다.
“대화는 이걸로 마무리하죠. 설마 오늘 당장 범죄자처럼 질질 끌고 갈 생각인 건 아니시겠죠? 아, 물론 유성이 형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는 거고요.”
“잠시만, 더 얘기를-”
“이쪽도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이 자리에서 바로 답을 드릴 순 없다는 거 이해해 주시죠.”
“현재 놈의 공격이 계속해서……!”
사내들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으나 송여환은 그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접객실 바깥으로 우렁차게 소리를 높였다.
“집사장님! 손님분들 나가신답니다!”
그러자 송가의 표식을 단 검은 정장의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들어 와 사내들을 질질 끌고 나갔다. 상황이 모두 정리될 때까지 나는 덩그러니 앉아 송여환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녀석, 전에 내 보호자가 되고 싶다며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비아냥거린 게 아니었나?
“형은 나랑 얘기 좀 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 송여환이 휙 몸을 돌렸다. 나를 두고 먼저 사라진 적이 없는 놈인데 단단히 뿔이 난 건지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곤 송여환을 따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뭐가.”
“저 사람들을 왜 만나겠다 한 거냐고. 정말 저 누에고치 괴물이랑 싸울 생각이야? 세상에 에스퍼라는 걸 밝힐 거냐고. 그게 무슨 의미인 줄은 알아? 형이 다 책임져야 하는 거야. 형은 그럴 마음이 아니더래도, 사람들이 멋대로 형한테 검을 쥐여 주고, 투구를 씌울 거라고!”
“…….”
“잘해야 본전이야. 끽해 봤자 얻는 건 상처투성이 영웅이라는 타이틀이라고. 못하면? 전에 겪은 것보다 더한 비난과 조롱만 따라올걸? 사람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 거라 생각해?”
“알아.”
“알면 왜! 그냥 조용히 떠나면 좋잖아. 형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니까!”
송여환이 소리를 높이며 날카롭게 쏘아붙여 댔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전부 나를 향한 걱정이었다.
“한 번 당해 봤잖아.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잘 알면서 왜 그래! ……누가 형보고 세상 구해 달래? 그거 안 해도 돼. 모른 척 도망쳐도 된다고. 힘이 있으면 올바른 곳에 써야 한다? 전부 개소리야! 자기들은 안전한 입장이니까 멋대로 씨불이는 거라고.”
나는 조용히 말을 듣다 녀석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송여환.”
그리고 녀석의 꽉 움켜쥔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 잡으며 이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내 선택의 이유가 되진 않아.”
“……뭐?”
“그렇다고.”
나는 픽 웃으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아직 대화 안 끝났어!”
“더 할 말 없어. 피곤하다. 가서 따뜻한 물 좀 가져와.”
옆에 달라붙어 오면서 제대로 설명하라고 닦달하는 놈을 모른 척했다.
최대한 이유를 몰랐으면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그때 화를 낼지, 눈물을 흘릴지 알 수 없으나 분명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 자신보다 연상인 나를 어린애 혼내듯 혼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건방진 녀석이니까.
그러니 지금은 비밀이다. 아파하는 송여환의 표정은 보고 싶지 않았다.
* * *
“아직 핸들 틀 수 있어.”
“방금까지 하면 100번째 듣는 말이야.”
“형을 설득할 수 있다면 200번, 아니, 500번, 1,000번도 할 거야.”
운전하는 내내 송여환은 집으로 돌아가자, 이대로 도망가자, 공항으로 가자, 시골로 가자 등등 수없는 회유를 시도해 댔다. 중간에 한 번 그렇게 가기 싫으면 너 먼저 집으로 가 있어라 했다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부터 형은 마음이라는 게 없는 인간이다- 라는 말까지 들었다.
‘젠장. 이럴 거면 혼자 나올걸.’
나는 후회하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누에고치 관련으로 사내들이 다녀간 지 이틀이 지난 시점, 나는 직접 그들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사실 돌아간 그날 밤부터 결단을 내렸지만 송여환이 적어도 이틀은 고민해 보자며 울고불고 난리를 친 덕분에 시간이 좀 더 걸리게 됐다.
그렇게 창과 방패의 대결처럼 ‘돌아가자’와 ‘입 닫고 가라’의 무한 반복 속,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새롭게 정의 내려진, (전)이능력 협회이자 (현)한국 비상 안전 본부.
“저 봐, 벌써 대기하고 있어. 어휴, 징그러운 놈들.”
송여환이 차 문을 열며 혀를 내둘렀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