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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76화 (76/115)

76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색색-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안심됐다.

‘……안심?’

나는 말없이 다시 방문을 닫았다. 뭐, 안심이야 될 수도 있지. 녀석에게 받은 도움만 해도 너무 많고, 부모님을 제외하곤 현재 제일 가깝게 지내고 있는 게 송여환 한 명뿐이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이 날 좋아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관계,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거잖아. 그러니 걱정이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 아닐까. 친구. 친한 사이. 뭐, 나름……?’

어쩔 수 없다. 여기선 저 녀석이 내게 제일…… 그러니까, 가까운, 그런 거니까. 그래, 부모님이 있었다면 부모님을 확인했겠지. 단순히 그런 거다.

나는 연신 물음표를 띄운 채 녀석의 방문 앞에 서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아주 느릿느릿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서도 잠자리에 들 수는 없었다.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번 느낀 불길한 기운을 경계하기 위해 나는 집 지키는 사냥개처럼 한껏 예민해진 감각을 곤두세우며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에 깨우러 온 송여환이 내 퀭한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냐며 다그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창문만을 노려보고 있었을 거다.

“느낌이 안 좋아.”

“확실히 짚이는 건 그 징그러운 누에고치 하나뿐이긴 하지. 게다가 유성이 네 감이라면…….”

말을 흐리던 송여환이 문득 내 팔뚝을 잡았다.

“뭔가 할 생각은 아니지?”

“뭔가?”

“무슨 일이 생기든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정확히는 내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지만 뭐, 그게 그건가?

“어차피 난 못 싸워.”

“던전에 한해서잖아.”

송여환의 표정은 퍽 진지해 보였다. 한때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던 국가 에스퍼가 하기에는 너무 모순적인 말이었다. 녀석은 내게 힘이 있음에도 쓰지 말라고 하는 거니까. 나는 가만히 듣다 녀석을 향해 물었다.

“저 누에고치가 많은 사람을 해치면?”

애초에 송여환은 전형적인 ‘바른 인간’이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는,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인간. 그런데 그런 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뭐?”

“이제 에스퍼는 없는 세상이야. 저 누에고치 안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설령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든 어쩔 수 없다고. 네게 힘이 남아 있다는 거 난 끝까지, 죽어도 말 안 해. 그러니까 너도 잊어. 네게 힘이 남아 있다는 거.”

“…….”

“너는…… 형은 누구도 구할 필요가 없어. 봤잖아, 형을 욕하던 많은 사람. 우리는 이제 평범한 사람이야. 그렇게 살아가면 돼. 더 이상 에스퍼 낙유성은 없어. 능력이 있어도 없는 거야. 헷갈리면 외워!”

끝내 울컥한 건지 송여환이 소리를 질렀다. 마치 나 대신 화내 주는 것만 같았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나서서 영웅 행세할 생각은 없다고 얘기해 줘야 할까?

나는 씨근덕거리는 녀석을 보다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와…… 뭘 해, 내가.”

하지만 위기는 늘 그렇듯,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 * *

평소와 조금 다른 듯 같은 날. 송여환이 산책 겸 대형 마트에 가자고 했고, 딱히 할 일도 없던 나는 군말 없이 녀석을 따라나섰다.

저택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형 마트까지 차를 타고 이동했다. 늘 그렇듯 송여환은 떠들고, 나는 시큰둥이 대꾸하는 패턴이었다. 누에고치가 나타나고 이능력자가 힘을 잃은 지 반년이자 내가 송여환의 집에 얹혀산 지 반년. 이젠 변화를 받아들인 시점이었다.

“이거 새로 나온 건가 보다.”

송여환이 시리얼 코너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매일 과자만 먹다 보면 살찔걸.”

“뭐? 서, 설마 나 지금 살…… 쪘어?”

“글쎄.”

“거짓말하지 마. 매일매일 조깅에, PT에, 필라테스까지 받는 몸이라고 널 위해서!”

“그게 왜 날 위한 거야.”

녀석이 집었던 시리얼을 카트에 담으며 비웃음을 짓자 옆에서 입을 삐죽 내민 송여환이 정말 살이 찐 거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였다.

“웃기지 마! 몸무게도 그대로고 오히려 근육…… 응? 왜 그래.”

“…….”

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오로지 나뿐, 모두가 평화롭게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분명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이름 모를 공포가 느껴지는데 말이다.

“송여환.”

“속 안 좋아? 아니면 배고픈 거야? 푸드 코트라도 갈래?”

“나가자.”

“어?”

“나가자고! 당장!”

나는 녀석의 팔뚝을 잡고 질질 끌었다. 송여환은 당황해하면서도 반항 없이 따랐다.

‘빨리, 빨리 나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경고음이 윙- 윙- 울려 댔다. 불안함에 심장이 요동친다. 특히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남아 있는 내 작은 양심을 쿡쿡 찔렀다.

‘저 사람들은 두고 너만 살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여 온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모두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봤자 미친놈 취급만 당할 게 뻔하니…… 그럴 바엔 확실하게 내 사람을 구하는 쪽이 현명하다. 애초에 내겐 영웅 심리 같은 건 없으니까.

힘이 있다고 꼭 모두를 구해야 하는 걸까? ……아니. 내가 왜. 그래, 나쁜 게 아니다. 이건 선택일 뿐이다.

“형…… 괜찮아?”

“입 닥치고 따라와.”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송여환을 힘으로 잡아끌던 도중이었다.

“앗-! 아야!”

퍽, 내 다리에 부딪혀 넘어진 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아이.

“어, 괜찮아?”

내게 잡힌 팔뚝을 조심스럽게 빼내고 아이에게 다가가는 송여환.

고장 난 티브이처럼 눈앞의 모든 광경이 지지직, 지지직거리며 엉망으로 뒤틀려 보였다.

“다치진 않았니?”

아이를 안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송여환과 저 뒤에서 죄송하다며 뛰어오는 젊은 부부.

“…….”

그리고 또 한 번 느껴지는 진동.

송여환, 아이, 부부, 노인, 다시 송여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점점 강하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의 압박에 초조함이 밀려왔다.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해, 혼자 중얼거리며 송여환을 다시 한번 잡아끌려던 때였다.

“……숙여…….”

입 밖으로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우르르릉!

“다들 고개 숙여-!!”

건물의 붕괴와 동시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쿵! 콰르릉!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천장은 내려앉고, 바닥은 갈라졌다.

콘크리트에 깔려 비명을 내지르는 사람들 사이, 나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린 송여환을 찾아냈다. 당장 몇 분 전만 해도 멀끔하던 녀석이 돌가루와 먼지, 자잘한 상처들로 온통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콜록, 야, 송여환!”

“형!”

“다친 곳은.”

“없어. 형은.”

“나도.”

녀석은 내게 아이를 불쑥 건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형은 아이 안고 대피해.”

“뭐?”

“저기 깔린 사람이 너무 많아. 가서 구해 줘야 해.”

무슨 헛소리지 이 녀석은? 더 이상 능력도 없는 주제에 뭔 영웅 행세를 하려는 거야. 예전과 달리 회복도 어려울 거고 몸이 단단하지도 않을 텐데 누가 누굴 도와? 저 무거운 콘크리트는 어떻게 하게? 부술 수도, 들어 올릴 수도 없으면서!

“개소리하지 마. 당장 피해야 해.”

“이 아이 부모가 깔렸어.”

“지금 안 나가면 우리도 죽어.”

“형 먼저 나가. 아이랑 같이.”

“야, 송여환!”

결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하지만 녀석은 흥분한 내 모습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부탁할게.”

오히려 한마디만을 남긴 후 아이를 내 품에 억지로 밀어 넣고 저 멀리 뛰어갔다. ……차라리 내게 힘을 써 보라고 하지, 왜. 대체 왜.

“으아아앙.”

품 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세게 끌어안았다. 미련한 새끼. 자기가 뭘 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에스퍼 낙유성은 없어. 능력이 있어도 없는 거야.’

송여환은 정말로 내가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듯이 굴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조차 말이다.

난 이제 어떡해야 하지? 아이를 안고 대피해야 할까? 아니면 송여환을 도와야 하는 걸까?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났다. 자꾸만 머뭇거리며 몸을 들썩거렸다.

어차피 송여환이 하겠다고 한 거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 저 녀석이 나한테 그렇게까지 소중한 존재는 아니잖아. 그냥 이대로 모른 척 나가 버리면-

콰광!

생각의 고리를 끊듯 거대한 붕괴 소리가 났다.

“부서진다!”

뒤따른 절규 같은 외침,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송여환, 그리고…… 녀석의 머리 위로 낙하하는 콘크리트 더미. 저걸 맞으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송여환은 즉사하리라. 녀석은 더 이상 에스퍼가 아니니까.

‘죽…… 어? 죽는다고?’

호흡이 가빠지며 과거, 나를 구하고 죽어 가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가 뚫린 채 도망가라고, 죽지 말라고 악에 받쳐 소리치던 송여환.

‘이번에는 또 누굴 구하고 죽으려고?’

울컥하는 마음이 북받치자 오른손에는 어느새 뜨겁고 강렬한 불꽃이 만들어졌다. 그때 내 머릿속엔 ‘송여환을 구해야 한다’밖에 없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이미 잊어버렸다 여긴 에스퍼로서의 보호 본능이었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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