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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75화 (75/115)

75화

“안전벨트 매시고. 자, 펭귄도 보고 상어도 보러 가 봅시다~”

“시커먼 사내새끼 둘이서 퍽이나 시선 안 끌겠다.”

“응? 시커먼 건 유성이 너 하나- 윽!”

눈을 말똥말똥 뜨고 말대꾸를 하는 녀석의 입을 찰싹 때렸다. 시커멓게 입혀 놓은 게 누군데?

“다물고 운전이나 해라.”

“어우, 가는 줄도 모르게 모시겠나이다.”

“까불긴.”

퉁명스레 말했지만 사실 오랜만에 나서는 외출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나는 창가로 고개를 돌리며 빠르게 지나치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한 달. 딱 그만큼만 살고 끝내려 했는데 왜 아직까지 저 바보 같은 녀석 곁에서 바보 같은 나날을 보내며 머무르고 있는 걸까. 이제 에스퍼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됐으니까? 아니면 이대로 잊힌다면 나름 살 만해질 거 같아서?

사실 잘 모르겠다. 그저 송여환에게 휘둘리고 있다, 그렇게만 얘기하고 싶다. 내 의지가 아니라 저 녀석 때문에 하루하루 억지로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 핑계를 대보면…….’

스윽, 시선이 송여환에게로 향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손으로 여유롭게 핸들을 돌리고 있는 녀석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나는 픽 터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좋은 거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승승장구해 온 귀족가 도련님이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내 수발이나 들고 있는지.

“뭐야. 우리 유성 씨, 왜 웃으실까. 내 욕했나?”

“눈치는 귀신같이 빨라 가지고.”

“뭐? 진짜 욕했어? 왜!”

“운전이나 해라.”

“아, 왜 욕했냐고, 왜!”

“배고프다.”

“어? 배고파? 알겠어, 기다려. 빨리 갈게.”

……멍청이. 나는 다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없는 웃음이 또 새어 나왔다.

“배고프다며. 정말 점심 안 먹어도 돼?”

“빨리 보고 가자.”

“아쿠아리움을 빨리 보고 가?”

“너 돈 많잖아. 나중에 또 보면 되지.”

“나, 나중에? 또? 나랑? 둘이?”

대놓고 지갑 취급을 해도 그저 좋다고 헤벌쭉거리는 녀석을 무시하며 걸어 나갔다.

도착한 아쿠아리움은 정말이지 환상…… 아니, 환장 그 자체였다. 뛰어다니는 꼬맹이들과 온갖 포즈로 사진을 찍어 대는 커플들 사이에서 나만 우중충했다. 옆에 반짝반짝한 녀석이 있어 더욱 비교되는 거 같다.

게다가 내가 아니라 이 녀석 얼굴을 가렸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들어온 지 5분 만에 ‘브릭트스컴트?’ 혹은 ‘에스퍼였던 사람’ 혹은 ‘그 광고 모델!’ 등등으로 송여환을 알아보는 사람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니까.

“야.”

“하하, 이 물고기 되게 징그럽게 생겼다. 그치.”

“떨어져서 걸어.”

“오~ 형 마음이랑 닮은 듯. 못생김.”

녀석은 기어코 한 대를 얻어맞고 나서야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내 뒤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졌다.

“진짜 아파, 진짜. 형! 나 진짜 아프다고.”

찡얼대는 녀석을 모른 척하며 걷다 드디어 펭귄을 찾았다.

“……음?”

다큐로 봤을 때는 분명 귀여웠는데, 저 매가리 없이 허공을 떠도는 눈동자는 뭐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집중해서 펭귄을 쳐다봤다.

“귀여운 건가? 아무리 봐도 눈깔이 범상치 않은데.”

혼잣말을 하며 펭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펭귄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송여환과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를 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 진짜 귀엽네.”

펭귄 보고 하는 말 맞지? 순간 공기가 이상해졌다. 나는 먼저 시선을 피하며 출구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뒤에서 같이 가자며 쫓아오는 녀석은 모른 척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내내 침묵했다. 송여환이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현재 내 기분이 굉장히 가라앉았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기에 속이 답답했다. 설마 펭귄이 생각보다 귀엽지 않아서인가?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저조해질 수 있나?

창문 너머 빠르게 변하는 광경을 눈으로 훑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아니다. 사실 계속 무시했지만, 은연중 감이 잡히는 게 딱 하나 있긴 했다. ……그러나 그건 절대 아니어야 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녀석이 물었다.

“생각 없-”

같이 있기 불편해 피하려던 나를 녀석의 다음 말이 붙잡았다.

“맥주나 한잔할래? 아님 소주도 좋고.”

“……그러든가.”

“먼저 들어가 있어. 내가 준비해서 방으로 갈게.”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방으로 향해 하루 종일 쓰고 있던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꽁꽁 싸매고 다니는 게 오버 같았다. 대놓고 돌아다닌다 해도 아마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을 텐데……. 하지만 송여환은 절대 아니라며 여전히 나를 숨기기 바빴다.

“피곤한 녀석…….”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니 달칵, 방문이 열렸다. 송여환은 소주 두 병과 먹음직스러운 탕수육, 짬뽕을 들고 들어왔다. 전부 내가 좋아하는 거였다. 왠지 아까의 그 알 수 없는 기분이 다시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녀석에게서 술을 받아 들었다.

“알아서 나발 불어.”

간지러운 속에 싸한 알코올을 딱 부어 주고 싶은 참이라 나는 주저 없이 뚜껑을 따, 술을 벌컥 들이켰다.

“아이고, 인간아.”

송여환이 밉지 않게 타박하며 내 입에 탕수육을 쏙쏙 집어넣어 줬다. 그렇게 한참이나 나는 마시고, 녀석은 내 입에 탕수육을 쑤셔 넣는 행동만 반복하던 중이었다. 나는 탕수육을 으적으적 씹다 말고 녀석을 향해 물었다.

“……안 아쉬워?”

“뭐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땡그랗게 뜨는 녀석에게 작은 불꽃을 만들어 보여 줬다. 그러자 녀석이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싱겁게 웃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정말 아쉽지 않아. 영웅…… 이라는 부담감도 사라졌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책임감도 사라졌고. 으음…….”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던 송여환이 문득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있지. 유성이 네 힘만 남아 있는 거 말이야. 왜 너만 힘이 안 사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해. 더 이상 가이딩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애초에 받을 생각 없었어.”

“선택을 할 수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커.”

“그러는 너도 그때 안 받겠다고 고집부려서,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힌 주제에?”

“잠- 아니, 그, 그거랑은…… 그거랑은 다르지!”

“뭐가 달라.”

“됐고! 잘 들어. 절대 힘을 쓰지 마. 네가 아직 에스퍼란 사실은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거야. 약속해, 낙유성.”

송여환이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애도 아니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이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드는데, 녀석이 어서 손가락을 걸라며 재촉 아닌 재촉까지 해 왔다.

다시 던전이 생성된다 해도 어차피 못 싸울 게 뻔하다 보니 약속까진 필요 없다. 하지만 녀석이 워낙 강하게 요구해 나는 못이기는 척 손가락을 걸어 줬다. 안 해 주면 새벽 내내 귀찮게 굴 테니까.

송여환은 얽힌 새끼손가락을 빤히 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쪽- 입을 맞췄다. 차가운 손에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여우 같은 녀석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뽀얀 얼굴이 꼭 복숭아처럼 달콤히 변해 있었다.

“약속의 증거.”

……이게 아주 기어오르네. 평소처럼 한 대 쥐어박으려다 오늘따라 유독 예쁘장해 보이는 얼굴에 그만 주먹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송여환과의 술자리도 마무리 지어지고 막 잠자리에 들었을 무렵이었다. 이상하게 술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을 뒤척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따로 조명을 켜지 않아도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 덕분에 물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옆에 컵이 있었지만, 어차피 나만 사용하는 거라 입을 대고 단번에 전부 비워 냈다.

“하아…….”

갈증이 해결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찬물을 들이켠 탓에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졸음기까지 싹 사라져 버렸다. 꼼짝없이 밤을 새울 판이라 나는 작게 인상을 쓴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민한 감각은 저 멀리서 숲이 우는 소리까지 놓치지 않았다. 파스스- 음산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에 수풀이 스치는 소리.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어지러운 머리가 가벼워진다.

“…….”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홀로 밤 시간을 즐기던 중이었다. —오싹.

“……!”

감고 있던 눈이 번뜩 뜨였다. 이…… 게 뭐지? 내려다본 팔뚝에는 소름이 쫙 돋아나 있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무언가가 깨어난다’, 그런 생각을 했다. 쿵쿵, 심장이 점점 빨라진다. 침대를 짚은 손이 움찔거리고,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듯 조이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깨어나선 안 될 존재가 점점 눈을 뜨고 있었다.

“…….”

극심한 불안에 휙- 걸음을 돌렸다. 천천히 걷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빠르게 뛰어 송여환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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