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하…… 그래, 나 망가졌어. 알고 있다고. 그래서 다 놓으려고 했잖아. 그게 맞으니까! 형을 잡아먹고 살아남았는데, 제대로 살아갈 자신도 없는 병신 새끼가 나야. 그게 뭐. 왜. 그래서 그만하려고 했는데, 왜!
“…….”
어지러운 머리에 절로 생각이 멈췄다.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자 송여환이 내 손목을 살며시 잡아 왔다. 이어 부들부들한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로 툭 닿아 온다.
“한 달만, 딱 한 달만 내가 너 좀 지킬 수 있게 해 줘.”
송여환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알 수 없으나 내게는 꼭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을 만들어 준 것처럼 들려왔다. 모든 결정은 한 달 뒤에 하라는 양 말이다.
* * *
계속 바빴던 내 삶에 이토록 긴 여유를 가져 본 적이 있던가 싶을 만큼 나는 며칠 내내 나태한 생활을 반복했다. 거기다 모든 수발을 고용한 적도 없는 S급 에스퍼가 들어 주시니. 이건 뭐, 황제라도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생했어. 안 피곤 해? 차라도 내올까?”
지금도 그렇다. 치료라고 해 봤자 저택으로 온 심리 치료사랑 하루 한 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인데 녀석은 마치 내가 큰일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 대기 일쑤였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저리 비키라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성의 없는 대꾸에도 녀석은 꿋꿋하게 말을 붙여 왔다.
“저녁은 오랜만에 치킨 같은 거 먹을까? 매일 집밥만 먹기 질리잖아.”
고급 코스 요리처럼 매일 메뉴를 바꿔 나오는 걸 단순히 집밥 취급하기엔 약간의 어려움이 있으나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이 대부분이라 녀석의 치킨 소리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소파에 누우며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자 송여환이 빙긋 웃음 지었다.
“지금 주문할게. 프라이드랑 간장…….”
조잘조잘 떠들던 중 녀석의 핸드폰이 윙윙 울렸다. 양해를 구하듯 손바닥을 펼쳐 보인 녀석이 뒤를 돌아 전화를 받았다. 꽤나 가까운 사이인지 격을 갖추지 않고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나는 드러누운 그대로 녀석의 말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심리 치료사랑 의미 없는 상담 시간을 가지면 꼭 이렇게 무기력해진다. 잠만 많아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뭐……. 딱히 나쁘진 않나…….’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작스레 큰 소리가 들려왔다.
“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곤란한 표정의 송여환이 보였다. 놈은 자세를 고쳐 잡더니 꽤 짜증스러운 말투로 소리를 질러 댔다.
“아오! 말을 하고 와야 할 거 아냐, 뭐? 지금 말하고 있다고? 이것들이 진짜, 야. 여, 여보세요? 야!”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긴 듯 송여환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생각보다 치킨이 빠르게 올 거 같은데……?”
뭔 헛소리인가 싶었는데 정말로 20분 뒤 나는 치킨을 받아 볼 수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치킨을 든 에스퍼 무리를.
“아이고, 반갑습니다.”
“저희 누추한 팀장님께서 이런 귀한 분과 함께하고 있다니.”
“낙유성 에스퍼님! 저 진짜 팬인데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가능하다면 사진도요!”
“팀장님. 이거 어디다 놔요.”
조용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오일장만큼 시끌벅적해졌다. 여기 우당탕, 저기 우당탕, 한시도 조용히 있질 못하는 원숭이 떼다. 정신이 사납다 못해 어지럽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달갑지 않은 상황을 조용히 관전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것들이 아예 제대로 즐겨 보려는지 멋대로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방금 나한테 인사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나도 갑자기 올 줄은 몰랐어. 미안해.”
싸늘한 내 표정을 봤는지 송여환이 쩔쩔매며 다가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넓은 거실을 두고 왜 이 방에서 난리를 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애초에 이 집은 송여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화를 낼 자격은 없다. 나는 빠르게 현실과 타협했다.
“다른 방 남는 거 있지.”
“같이 가.”
송여환이 슬며시 손을 잡아 왔다.
“굳이?”
“저녁도 먹어야 하고.”
“있는 거 해서 먹으면 돼. 넌 저 원숭…… 팀원들이나 신경 써.”
우끼끼 소리 적당히 안 나게 관리 좀 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뒷말은 가까스로 삼켜 냈다. 그렇게 방을 나서려는데, 바닥에 앉은 원숭이1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 낙유성 에스퍼님 가시게요?”
“…….”
“아하~ 술은 못 하시나 보구나. 음음, 그럴 수 있죠. 하긴 협회 넘버 원이라고 해도 못 하는 게 하나 정도는 있을 수 있지. 특히 남자들끼리 그런 거 은근히 신경 쓰이잖아요. 이해해요. 가서, 아가처럼 일찍 주무세요!”
아…… 말이 아니라, 시비였구나.
“김도준, 너 실례되는-”
“술.”
대신 화를 내려는 송여환의 말을 끊고 원숭이 떼가 모여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모자랄 텐데.”
평소라면 코웃음 치고 무시했겠지만 단순하게 살고 있는 요즘은 이런 무식한 시비가 되레 반가웠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제격이었으니까.
“오, 싸나이.”
“몇 년생?”
내 질문에 원숭이1이 싱글거리며 나이를 밝혔다. 나는 소주 뚜껑을 따며 입꼬리를 픽 올렸다.
“말 깐다. 넌 까지 말고.”
“앗…….”
“뭐 해. 쉴 틈 있어?”
그 후론 광란의 술 배틀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그만 마시라는 송여환의 입에도 억지로 술을 쑤셔 넣으며 꽤 오랜 시간을 마시고, 또 마셨다. 역시 에스퍼라 그런지 징그러운 놈들은 쉽게 지치지 않았다. 일 대 다수는 오랜만이라 꽤 애를 먹었지만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술에 절여 놓고야 말았다.
그렇게 고군분투하여 얻은 값진 승리를 만끽하며 자리를 파했다. 시각은 어느새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술에 잔뜩 절은 원숭이 떼가 돌아가자 남은 건 나와 송여환 둘뿐이었다. 이제 이 녀석만 본인 방으로 돌아가면 마음 놓고 편히 잘 수 있겠거니 싶었는데, 이미 취할 대로 취해 버린 송여환은 내 침대에 엎어진 채 고른 숨소리만 색색 내고 있었다.
“쯧.”
어지간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꺼지라고 했을 텐데 나 역시 주량을 한껏 넘긴 탓인지 모든 게 귀찮았다. 침대도 넓으니 옆으로 조금 비켜 자면 되지 않을까.
생각을 마치니 행동은 빨라졌다. 나는 송여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웠다. 몽롱해진 정신은 금세 저 바닥으로 뚝 떨어져…… 야, 하는데.
‘……더워.’
마른 입술을 타고 나온 숨소리가 푹 젖어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결국 짜증스레 눈을 떴다. 젠장, 왜 잠이 안 오지? 이 정도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어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나는 인상을 쓰며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어울리지 않게 양을 세 보기도 하고, 명상을 하듯 머릿속을 비워 내기도 해 보았지만 영 효과가 없었다. 느낌상 이대로 밤을 꼼짝없이 새울 판이다. 그건 정말 싫은데.
어째야 하나 고민을 하던 바로 그 순간, 예민해진 감각에 이상한 파장 하나가 걸려들었다. 따끔하고, 사납고, 정리되지 않은 폭주 직전의 파장이었다.
……나 말고 이곳에 에스퍼는 딱 한 명뿐인데?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아니다 다를까 송여환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 하.”
“미친.”
이 새끼 지금 제정신인 건가? 왜 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가이딩을 받지 않은 거지? 잔뜩 올라왔던 취기가 싹 사라졌다. 감지된 위험한 기운. 이대로 방치했다간 폭주할 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가이드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윽!”
찌르르 아파 오는 아랫배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거다.
“하, 왜…… 또 X발!”
배 속이 꼬이는 듯한 통증이 마구 휘몰아치며 정신을 쏙 빼놓더니 곧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쉬다 점차 느껴지는 묘한 간질거림에 발가락을 오그리며 끙, 신음을 흘렸다.
이 개 같은 감각. 분명 어디서 겪어 본 적 있는데…… 아, 맞아. 그때다. 송여환의 병실을 찾아간 첫날. 그래, 똑같았다. 그날도 녀석을 보자마자 이런 간질거림과 허기를 느꼈다. 몸속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참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계속 일었었다.
왤까. 왜지. 무엇 때문인 거야. 나는 흐려지는 이성을 붙잡으며 침대에서 내려가기 위해 덜덜거리는 몸에 힘을 주었다. 일단 뭐가 되었든 가이드부터 불러야 했다. 송여환 정도 되는 놈이 폭주하면 정말 위험하니까.
정신을 다잡고 다시 천천히 호흡하며 막 침대 바깥으로 발을 디뎠을 때였다.
“……어딜 가.”
울림 같은 소리와 함께 어깨가 잡혀 다시 침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윽, 소리가 나올 만큼 거친 손길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미간을 좁히고 나를 제압한 송여환을 쳐다봤다.
이 녀석…… 이미 눈이 맛이 갔잖아?
“놔! 송여환!”
“……하아, 하아.”
평소와 달리 여유 한 점 없는 놈의 모습은 마치 발정기를 맞이한 짐승 같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집요하게 나를 쳐다본다. 아무리 저 지경이라도 에스퍼, 가이드 구분은 될 텐데?
“야, 떨-”
“하아, 좋아. 좋아…… 요.”
“……!”
녀석이 내 목덜미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강아지처럼 연신 냄새를 맡으며 비비적거리는 행동이 너무 간지러웠다. 동시에 도통 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이딩은커녕 같은 에스퍼끼리라 거부감만 들 텐데 뭐가 좋다는 거지?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