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오메가, 동경, 뤙, 지선우. 형태 없는 것들이 숨통을 조여 왔다. 이대로 있다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진작 미쳐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수치심도 모르고 이러고 있겠지.
“X발…… 놓으라고!”
바보처럼 아등바등하고 있을 때였다.
「…….」
놈이 우뚝 멈추더니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름이 잔뜩 진 미간과 새카맣게 변해 버린 눈동자는 미동 한 번이 없었다. 그 이질적이고 기괴한 표정이 마치 마귀와 같았다. 탐욕에 눈먼 인간이 얼마나 징그러워질 수 있는지 알려 주는 표정이었다.
「이러면 네겐…….」
탁, 놈이 쥐고 있던 내 멱살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힘없는 몸은 곧장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잡아 주는 사람도, 일어설 힘도 내겐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뱀 새끼를 올려다보는 것뿐.
차갑게 조소하고 있는 뱀 새끼. 일그러진 웃음이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대체 무슨 가치가 남아 있는 거지?」
그가 내 무릎 위로 발을 얹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가치?”
나도 모르게 놈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러나 한국말을 모르는 놈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밟은 발에 더욱 힘을 실었다. 반질거리는 구두가 내 무릎을 완전히 짓눌렀다. 그 의도는 명백한 조롱이었다.
어디선가 ‘큭’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정작 나와 뱀 새끼 사이를 중재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흥미롭게 관전할 뿐이었다.
「아무리 SS급인들 싸우지 못한다면 그저 쓰레기잖아.」
나의 가치.
[ ‘내 불안을 하나씩 없애 주면 돼. 그로 인해 너와 이 아이가 무가치해진다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게. 약속해.’ ]
왜 순간 그 말이 떠올랐을까. 설마 가짜 녀석이 말한 무가치가 이런 거였나? 이 모든 걸 예상했던 걸까? 아, 그렇다면 너무 억울한데.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세상은 여전히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하, 오판이었군. 망가졌다는 소문이 맞았던 거야. 아아! 이럴 줄 알았다면 여환 씨에게 그런 무례 따위 범하지 않았을 텐데. ……젠장. 이봐, 낙유성 씨.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음? 너 때문에 모든 게 꼬였잖아. 내 기대는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뱀 새끼가 고개를 흔들며 짜증을 부려 댔다.
「하아…… 젠냐 저건 또 어떡해야 해? 내 동생이 무슨 뒷골목 창놈 새끼도 아니고. 옮겨 다니면 정말 걸레로 소문이 나서 욕이나 처먹을걸? 응? 우리 젠냐 장가 못 가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내 머리를 손등으로 퍽퍽 밀어 대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쯧…… 아버지만큼 보는 눈을 키우려면 아직 더 분발해야겠군.」
한숨처럼 중얼거린 놈이 내 무릎에서 발을 치우던 순간이었다. 쿠구궁! 커다란 진동과 함께 찢어지는 비명이 회담장을 또 한 번 덮쳤다.
“꺄아아악!”
“으아아아악!”
“모두 도망쳐! 던전 브레이크다-!!”
기이이잉! 포탈 주변으로 커다란 에너지 파동이 일어났다.
던전 브레이크. 에너지가 쌓이고 쌓여 한계치를 넘어서면 아공간이 폭발해 그 안의 존재들이 현실 세계로 나타나는 것을 이른다. 진작 클리어해야 했는데 시간을 너무 지지부진 끈 탓이다.
“이쪽입니다! 대피하세요-!”
나는 평소처럼 맞설 생각도,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해괴한 형태의 괴물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밀지 마!”
“살려 줘요-!”
“아아아아악!”
팔짱을 낀 채 나와 뱀 새끼를 구경하던 에스퍼들은 소란스러워진 주위에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급히 전투 태세를 취했다. 내게 화를 내던 뱀 새끼조차 욕설을 뱉으며 다급히 능력을 끌어 올렸다.
「빌어먹을……. A급 이상이군.」
이내 나를 제외한 모든 에스퍼가 괴물들과 사투를 벌였다.
—쾅! 막 괴물의 머리를 날려 버린 뱀 새끼가 손목을 휘휘 돌리며 이죽거렸다.
「만약 사상자가 발생한다면 그건 다 우리 무능한 유성 씨 덕분인 겁니다? 당신한테 믿고 맡기려다 이 지경이 된 거잖아요? SS급으로 자리한 주제에 벌벌 떨기나 하고, 싸움도 못 한다니…… 그게 사기꾼과 뭐가 달라?」
“…….”
「유성 씨는 에스퍼니까 굳이 도와줄 필요 없겠죠? 그거 인력 낭비잖아. 나는 우리 기자님들 구하러 가야 하거든요. 재밌는 사진도 많이 찍었을 테니까. 아, 그리고 계속 그렇게 등신 새끼처럼 떨고 있을 거라면…….」
쾅, 콰앙-! 덤벼 오는 괴물들의 몸통을 시원하게 날려 버린 놈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혀 깨물고 죽는 걸 추천할게요. 그럼 적어도 기자님들 밥벌이하는 데 도움이라도 줄 수 있잖아. 팍팍한 세상,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지. 안 그래요? 아무튼 건투를 빌게요. 부조금은 엿 먹은 만큼 낼 테니 걱정 말고.」
싱긋 웃으며 말을 끝낸 놈이 저 멀리 달려 나갔다.
싸우느라 혹은 도망치느라 모두가 생사의 기로에 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만이 홀로 동떨어져 있었다. 유일한 정적은 괴괴하기까지 했다.
나는 뱀 새끼의 말대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멍하니 주저앉아 ‘가치’라는 단어만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동시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론 ‘살아갈 이유’가 아닌 ‘살아도 될 가치’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물었다.
‘나는 살아도 되는 걸까?’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으나 꼭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지선우를 대신해서?’
아슬아슬 버티고 있던 마음의 댐이 우르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그 안에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현대로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형에 대한 미안함, 모른 척 피하고 있던 죄책감,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 욕망, 전부 포기하고 싶다는 우울감, 뭐 그런 것들이었다.
‘왜 진작 생각하지 않았을까.’
새삼 정답을 알고 나니 모든 게 부질없어 보였다.
‘……맞아. 그렇지.’
나는 죄책감에 시달릴 게 아니라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게 맞았던 걸지도 모른다. 타인의 목숨으로 연명한 세계. 형에 대한 속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그러라고? 그러다 가끔은 웃기도 하고? ……그런 삶을 나 혼자서 누리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너무하잖아.
‘나는, 나는 말이야. 실은…… 살아선 안 되는 거 아닐까?’
누려서도 안 되고, 누릴 수도 없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잘 살아갈 용기가 내겐 없었다. 혼자서 평범한 삶을 되찾을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 일종의 패배 선언이었다.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아. 싫어.’
그냥 그게 전부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힘없이 큭큭 웃어 댔다.
바로 그때, 그르르륵— 산짐승 같은 날카로운 발톱을 뽐내며 거대한 괴물 한 마리가 다가왔다. 사자의 갈기와 뱀의 비늘, 코뿔소의 뿔이 달린 키메라였다.
평소라면 바로 한 줌의 재로 만들었을 더럽고 하찮은 존재를 보며 나는 몸의 힘을 주욱 뺐다. 마치 ‘잘 준비된 음식’처럼 쉽게 잡아먹힐 수 있도록.
“……뭐 해.”
그르르르르-!
“씹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력함은 덤이었다. 그러나 덤덤한 겉모습과 달리 나는 진심을 다해 소원했다. 어서 다가와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기를.
그렇게 짧은 대치가 이어지더니 그르르르륵-!! 한층 더 사나워진 울음소리와 함께 괴물이 육중한 몸을 날려 내게로 돌진해 왔다.
무섭냐 묻는다면 글쎄, 이미 스물세 번이나 죽어 봤는데 이 정도쯤이야.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것보단 다른 게 두려웠다. 혹여나 내가 또 이 질긴 목숨으로 살아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끝이겠지? 제발, 이렇게 빈다. 다시는 살아나지 말아라.’
눈을 감고 기도 아닌 기도를 올리며 숨이 끊어지길 기다린 순간이었다.
—핏!
섬광 같은 무언가가 나를 지나쳐 거대한 괴물의 중앙부를 뚫어 버렸다. 촤아아아악!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와 내 얼굴을 푹 적셨다. 당장에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던 괴물이 신음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학살의 신호탄이었던 듯.
핏-! 핏—! 슈와아악!
차마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의 공격들이 사방에서 매섭게 쏟아졌다. 잔상을 남기며 하늘에서, 땅에서,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부터 날아온 공격이 괴물들의 머리를 쭉쭉 터뜨리고 심장을 박살 내 갔다. 회담장 곳곳을 장악한 괴물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유쾌하다고 표현될 만큼 상황은 빠른 반전을 맞이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르릉쾅! 억센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남자를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아마 이곳 모두가 알 것이다. 두 번째 국가 레벨 에스퍼.
“너 지금-”
코드 번호 858-N-002.
“뭘 포기하려 한 거야.”
송여환.
“낙유성.”
낮게 울리는 목소리, 붉게 충혈된 눈동자. 녀석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하고 있었다. 바로, 내게.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