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허억! 하악, 학!”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제 열둘.」’
괜찮아. 괜찮아. 살 수 있어. 괜찮아. 살았어. 내가 이겼어. 아니야. 제발.
‘「피가 쏠려? 이제 네 몸을 반으로 가를 거다. 마음껏 비명을 질러도 좋아. 그게 네게는 유일한 피난처일 테니까.」’
“흐, 으!”
눈이 부릅떠지며 가슴에서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악!”
절로 허리가 굽어지고 입 밖으로 침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나는 컥컥, 거센 기침을 뱉어 냈다. 어째선지 이미 죽었을 그 괴물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나를 찢고, 가르고, 갈고, 갉아 먹고, 쪼개고, 태우고, 녹이고, 뭉개 버리던 그놈. 그놈의 목소리였다.
‘「끓는 기름이다. 그래, 더 크게 벌려야지. 식도가 타들어 가는 고통은 생각보다 버티기 힘들거든.」’
우욱!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토사물이 역류해 그대로 바닥을 적셨을 거다. 젠장, X발! 눈이 핑핑 돌았다. 내려다보는 손끝이 착각인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진심으로 졸도해 버릴 것만 같다. 진정하라고 스스로를 달래 봐도 소용이 없었다.
‘죽을 거 같아. 아니, 죽고 싶어……. 맞나? 맞는 건가. 그게 맞나.’
정신이 몽롱해지던 그때, 쩌렁한 목소리가 회담장을 울렸다.
「여러분 모두 침착하십시오! 비록 던전이 열렸지만 이곳엔 수많은 에스퍼가 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은 아쿠벨의 뱀 새끼였다. 놈은 가슴을 곧게 펴고 연설하듯 말을 뱉었다.
「저까짓 괴물 놈들에게 겁을 먹어 도망치실 이유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곳에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에스퍼들이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웅들이 지키는 한, 누구도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확신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특히 우리에겐 기적이라 불리는 SS급 에스퍼 낙유성 씨가 있지 않습니까! 자아! 그의 활약을 여러분들이 세계로 더, 더, 더어! 자랑스럽게 퍼뜨려 주시는 겁니다!」
선거 후보라도 되는 듯한 화려한 언변이었다. 나로서는 이해 못 할 뜬금없고 독단적인 쇼였으나 다른 사람들에겐 꽤 먹히는 액션이었는지 그 효과가 굉장했다. 놈이 허리를 숙이자마자 우렁찬 갈채가 쏟아졌다.
그리고 이어 터진 플래시 하나.
—반짝!
연달아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이내 바뀌었다. 공포는 희망으로, 두려움은 믿음으로, 겁은 기대로. 나를 향하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겨우 잠재운 구역질이 다시 올라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돌연 누군가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책임감 없는 응원을 보냈다.
“힘내요!”
군중심리란 그런 건지, 한 명이 길을 열자 수십 명이 똑같이 따라왔다.
짝짝짝짝!
“파이팅!”
“할 수 있다!”
“다치지 마세요!”
커다란 박수 소리와 열렬한 함성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팔짱 낀 채 한 발 떨어져 있는 이들의 시선은 명백한 경계와 조롱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원체 삐뚤어진 인간이어서 그런지 내게는 응원이 썩 달갑지 않았다. 오히려 끔찍한 비명 같았다. 울렁, 울렁, 울렁. 세상이 나를 두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몸의 중심이 자꾸만 뒤로 넘어가는 느낌은 가히 최악이었다. 머리도 무겁고 눈가로는 열이 몰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하악, 하, 하아…… 하아.”
똑, 턱 아래로 무언가가 흘러내려 손등으로 그것을 황급히 닦아 냈다. 땀인지, 침인지, 아니면 코피인지. 정체 모를 액체가 잔뜩 묻어났으나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하아. 흐으.”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사람, 사람. 왜 자꾸 X발 나를 보는 거야. 손발의 끝이 저릿해지며 부정맥이라도 온 것처럼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기분 나쁜 감각이다.
그러다 문득 내게 쏠린 시선들을 보자 동경에서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를 둘러싼 개자식들, 이어지는 불쾌한 손길, 따라오는 고통, 그리고 그런 나를 흘끔흘끔 지켜본 수십 명의 눈동자.
‘보지 마, 보지 말라고!’
기억을 잊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으나 또 다른 괴로움만 이어질 뿐이다.
짝짝짝짝-!
여전히 들려오는 저 박수 소리. 경쾌하다 못해 우렁차게 쏟아지는 박수 소리는 마치 거센 소나기 소리와 같아서, 내 모든 것을 잃은 그날의, 그놈의, 그 빗소리처럼 들렸다. 그래, 지선우를 빼앗아 간 뤙 바오치호의 빗소리…….
“으윽……!”
각인이 깨진 그때처럼 온몸이 아팠다. 겨우 한 번 떠올렸다고 이러는 게 말이 되나? 억울함에 혀를 깨물 지경이다. 거기다 뒤죽박죽 얽힌 머릿속은 한계였다.
오메가, 고문, 지선우, 동경, 고문, 스물세 번, 집으로, 뤙, 각인, 서블, 이제 몇 번? 제발, 그만…… 생각이 끝으로 다다르던 순간.
‘유성아.’
늘 나를 지탱해 주던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라면 잘해 낼 거야.’
대단하다, 지선우. 너는 나를 기어코 무너뜨리는구나.
“아…….”
……개 같네, 진짜.
기우뚱, 버티지 못한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괴물들의 포효보다 테이블과 함께 우당탕 엎어진 내가 더한 이목을 끌었다. 나는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한 알레르기라도 도진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며, 목 안쪽이 따끔했다.
컥, 컥!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 기침을 쏟아 내는데 찰칵,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반짝였다.
……찰칵, 찰칵.
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
둥근 카메라 렌즈 뒤, 많은 사람이…… 웃고 있었다.
찰칵찰칵찰칵찰칵, 찰칵찰칵찰칵찰칵!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힘내라며 열정적으로 응원을 던지던 이들과 앞다투어 나를 찍어 대기 바쁜 이들을 과연 동일하다 볼 수 있는 걸까? 홍조까지 오른 그들의 표정은 영웅을 바라는 시민이 아닌, 그저 ‘특종’을 찾아낸 기자일 뿐이었다.
바로 그때, 내게 천 쪼가리 하나가 내밀어졌다. 느릿하게 시선을 맞추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쿠벨의 꼬맹이가 보였다. 머리 색이 달라져서 순간 헷갈렸으나 분명 예의 그 망할 꼬맹이가 맞았다.
“하아, 하…… 뭐, 야…….”
「바, 받, 받으세요.」
아쿠벨 꼬맹이가 손수건을 거듭 내밀었다. 그러나 배려를 베푸는 사람이라기엔 안색이 심히 나빴다. 하얗게 질린 손끝과 입술을 보자니 당장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서운 게 나인지 던전인지 잘 모르겠지만 저 정도로 겁이 난다면 그냥 도망가면 될 것이지, 왜 굳이 다가와서 손수건을……? 내가 막 의문을 품으려는데 찰칵찰칵, 카메라 소리와 함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세상에……. 벌써부터 남편을 챙기는 거니, 젠냐? 천사 같은 마음씨가 너무 예쁘구나.」
나와 꼬맹이를 내려다보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뱀 새끼. 아, 저 새끼가 시킨 거구나. 나는 그제야 꼬맹이의 행동이 이해 갔다.
뱀 새끼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춰 왔다.
「아직 컨디션이 저조하신가 봅니다. 아, 최근 큰일을 겪으셨다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거기다 가이딩도 받고 계시지 않다고. 하긴…… 가이드를 잃었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실지 감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요.」
카메라를 등진 채 녀석이 입꼬리를 올렸다. 역광으로 인해 놈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은근한 역겨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괜찮다는 것을 증명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보세요. 주저앉아 계시니 저 버러지들이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고 있잖아요?」
“……하아, 하…….”
「자기들을 구해 줄 영웅의 실수를 기회랍시고 찍어 대다니. 이래서 머리 빈 서민이란…… 쯧. 걱정 마세요. 저깟 사진쯤이야 제가 막으면 되니까. 그러니 우리 낙유성 에스퍼님께선 별다른 걱정 말고 원래의 응? 그 대- 단한, 힘을! 제게! 보여 주시면 되는 겁니다.」
놈은 그렇게 말하며 꼬맹이의 어깨를 꽈악 잡았다.
「우리 젠냐 아쿠벨과의 기적을 통해서 말이죠. 좋잖아요? 드라마틱하고, 아까 그 사진보단 이쪽이 훨씬 더 보기 괜찮을 것 같은데. 짝을 잃고 힘들어하던 영웅에게 나타난 새로운…… 사랑? 새로운 날개라 해도 좋고.」
껌을 씹듯 중얼거리며 픽 웃은 놈이 꼬맹이를 내게로 밀쳤다.
「그러니 아쿠벨의 신성한 가이딩을 듬뿍 받으시길 바랍니다. 때 타지 않은 새 상품이니 맛은 좋을 겁니다. 젠냐, 뭐 하니. 어서 네 부군을 챙겨드리지 않고?」
「아…… 아아. 네, 네…….」
잔뜩 주눅이 든 꼬맹이가 손을 뻗어 왔다.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 행동이나 창백하게 질린 안색 따위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사실 말이 좋아 가이딩이지, 이건 강제성이 다분한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다. 요즘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거기다 나는 지선우를 제외한 다른 가이드는 만들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이 개 같은 짓거리에 어울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손, 허억, 대지 마……. 죽, 여 버리기 전에!”
찰싹! 다가오는 작은 손을 매섭게 쳐 냈다.
「으읏!」
꼬맹이가 어깨를 움츠리며 황급히 손을 떼어 냈다.
「형니임…….」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쭈글쭈글 변했다. 뱀 새끼는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꼬맹이를 흘겨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만 보자면 당장 소리를 내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카메라를 의식한 건지 정작 속삭이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그래…… 젠냐.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랑스러운 내 동생. 많이 당황했구나? 그럴 수 있지. 낙유성 씨가 상당히 오랜 시간 가이딩을 받지 않아 꽤 예민한 상태시거든. 하아…… 좋아, 오늘만큼은 이 형님이 도와주도록 하마.」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