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젠냐는 낙유성이란 시정잡배 같은 놈보단 몇 번 본 적 있는 송여환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섬세하고, 매너가 있었으며, 가이드를 아낄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자하르가 약혼이란 단어를 꺼냈을 때도 내심 기뻐했었다.
거기다 얼굴도 몹시 잘생겼고 말이다. 취향으로 따지자면, 그 허옇고 우울해 보이는 낙유성보단 당연지사 송여환이었다.
‘짜증 나.’
젠냐가 몰래 입술을 부루퉁이 내밀었다.
「젠냐. 저들이 보이니?」
앞서 걷던 자하르가 말했다. 젠냐는 건물 아래,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모두 협회 소속 에스퍼였다.
「네에.」
「저 많은 에스퍼가 네 부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모두 재가 되어 버리지. 아, 벌써 기대가 돼. 빨리 우리의 패밀리로 맞이하고 싶구나.」
「형님. 그럼 낙유성이란 자가 형님보다 강한가요?」
젠냐는 작은 심통을 담아 질문했다. 등급이 어떻든 자존심이 센 자하르가 인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는 유럽 연합의 대표를 맡은 만큼 매우 강한 에스퍼였으며, 쉬이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고고한 성격이었으므로.
그러나 자하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대꾸했고, 그 대답은 젠냐의 생각을 완전히 부숴 놓고 말았다. 그 정도로 의외인 반응이었다.
「그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조차 영광이지.」
「…….」
「젠냐. 절대 그를 길들일 생각 마라. 네가 길들어야 해.」
「네……. 형님.」
어느새 그들은 귀빈실만큼 커다란 방문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국의 비서가 막 문을 열려던 찰나, 안에서 커다란 말다툼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덜컹! 하고 문이 열렸다.
“야, 송여환!”
“가서 물어보겠다고, 그게 무슨 소린지!”
젠냐의 기준, 전 약혼자 송여환과 현 남편이 될 낙유성이 함께 문을 열고 나왔다. 특히나 송여환은 아주, 매우,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젠냐와 자하르를 발견하자마자 누구도 말리지 못할 만큼 빠르게 다가왔다.
이로써 젠냐는 하루 만에 벌써 두 번이나 타인의 이면을 보게 됐다. 젠냐의 기억 속 송여환은 마치 카페라테처럼 부드러웠는데, 지금 그는 한껏 성이 난 호랑이가 되어 자하르의 멱살을 잡아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무례? 하, 장난질을 먼저 친 게 어느 쪽인데 무례를 입에 담아?」
송여환은 부러 예의에 어긋나는 강한 어조와 단어들을 사용하며 자하르를 향해 사납게 쏘아붙였다.
「이 자리에서 제대로 설명해 줘야 할 거야, 자하르 아쿠벨. 나도 모르는 내 약혼이 뭔지.」
그러더니 옆에 있던 젠냐를 향해서도 눈을 부라렸다. 가이드에게만큼은 솜사탕처럼 굴던 남자가 말이다. 대외적으로 보여 주던 신사적인 면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 우습게도 송여환이 내비치는 감정은 명백한 질투였고,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또렷했다.
‘에스퍼가, 에스퍼를?’
충격을 받은 젠냐와 달리 자하르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송여환의 손을 거칠게 쳐 낸 후 당당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정리할 게 있어서 부러 찾아왔습니다. 이왕 자리하신 거, 같이 들으시면 되겠네요. 기뻐하세요. 다행히도 송여환 씨를 불쾌하게 할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우리 젠냐 아쿠벨은 브릭트스컴트의 송여환 씨와 약혼할 게 아니라…….」
자하르는 송여환을 지나쳐 낙유성을 향해 쭈욱 손을 뻗었다.
「낙유성 씨, 당신께 청혼할 거니까요.」
간사하게 웃은 그가 어서 잡으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청하겠습니다. 낙유성 에스퍼, 부디 젠냐 아쿠벨의 부군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은 아쿠벨의 새로운 패밀리가 되어 진정한 하늘이 되는 겁니다.」
* * *
‘부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자꾸만 원치 않는 일이 생긴다. 나는 손을 내민 놈을 무시하며 대신 난리를 쳐 대고 있는 송여환을 바라봤다. 한껏 성이 난 등을 보자 몇 분 전, 진심으로 억울해하던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혼은 무슨 약호온!’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며 절대 모르는 일이라고 방방 뛰던 놈은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대로 뒷목을 잡았다. 그 후, 제대로 각성하여 현재 한 마리의 익룡으로 빙의해 나 대신 다소 어이없는 이 상황에 전면으로 맞서는 중이다.
「이이익!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디서 개수작질이야악!」
물론 내게 손을 내민 뱀 새끼도 지지 않았다.
「눈 너무 부릅뜨지 마세요. 먼지 들어갑니다.」
놈은 웃던 낯 그대로 태연히 말하곤 송여환의 눈에 호- 입바람을 불었다. 송여환은 바로 ‘히앗!’ 하며 얼굴을 꾸깃꾸깃 구기더니 비틀비틀 내게로 매달려 왔다.
“유성이 혀엉, 눈이 따가워어어.”
「낙유성 에스퍼. 어서 제 손을 잡으시죠. 젠냐, 뭐 하는 거지? 인사를 올리지 않고.」
「남, 남편을 뵙습니다아…….」
X발. 내 생애 이토록 기가 빨려 본 적은 처음이었다. 회담이고 나발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알리는 경고음이 삐- 삐- 소리를 내며 머릿속에서 울려 댔다.
그렇게 더러운 성깔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던 때.
“낙유성 에스퍼님-!”
저 멀리서 구원자가 등장했다.
“엇? 다른 분들도 여기 계셨네요? 잘됐다. 다 함께 이동하시죠! 이제 슬슬 가셔서 자리하셔야 합니다!”
정말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 * *
‘싫어어! 나도 같이 있고 싶어어!’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던 송여환, 그 시끄러운 녀석을 떨궈 내느라 2차로 진땀을 빼내고 어영부영 도착한 회담장은 생각보다 더 굉장했다.
커다란 샹들리에, 반짝이는 대리석, 돈 냄새 나는 것은 전부 처발라 놓은 ‘사치의 장’, 그 안에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쫙 깔린 기자들과 그들의 손에서 터져 나오는 강한 플래시, 인공적인 빛의 세례를 받으며 등장하는 각국의 대표 에스퍼들과 협회진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의 향연까지.
‘하, 지랄. 초면인데도 제법 싸가지가 없는 새끼들이네.’
나는 나에게 집중되는 사나운 기운들에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성질 같아선 죄다 밟아 놓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젠장, 벌써 탈주하고 싶네. 정신은 사납고 가슴은 답답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찍을 건데.”
“회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러니까 웃어.”
옆에 선 정일문에게 속삭이자 이 빌어먹을 놈이 복화술로 답을 해 온다. 나는 당장 미치기 일보 직전인데 이 새끼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연신 실실댔다.
‘너만 즐거우면 다냐? ……빌어먹을. 하아, 참자. 참아.’
뒤집히는 복장과 달리 나는 1년간의 자유를 위해 어떻게든 이 분노를 억눌러야 했다. 그러고 보니 주변 새끼들도 전부 미소를 띠고 있다. 이 자리가 불편한 건 나 하나뿐인 것 같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안내해 주는 자리에 착석했다. 어차피 토론이야 정일문이 알아서 할 거고, 나는 입 닫고 조용히 자리만 채워 주면 된다. 여기서 내 역할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니까.
그렇게 속으로 빨리 끝나라, 끝나라 염불을 외던 중이었다.
—오싹.
등허리로부터 미세한 소름이 전해져 왔다. 감지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덜컹! 덜컹! 회담이 시작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참석한 에스퍼 전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건 본능이었을 터다. 아찔한 침묵이 0.3초 정도 흘렀을까?
…쿵.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고.
……쿵.
이내 커지더니 곧.
콰아아아아앙!!
건물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던전이다—!”
다급한 상황 속 누군가의 외침으로 인해 정숙하던 회담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무너진 천장 위, 생성된 거대한 포탈에선 웅- 웅— 웅-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음습한 기운이 뚝뚝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략 A급,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던전이었다.
‘던전.’
‘던전.’
‘……던전?’
나는 일렁거리는 던전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근두근, 피가 전신을 빠르게 돌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전투를 앞에 둔 흥분이라기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알 수 없는 긴장감, 소변이 마려운 듯한 초조함, 오그라드는 손과 발, 흘러내리는 식은땀, 여러 말소리가 머릿속으로 밀어닥치고, 귀로는 삐- 강한 이명이 찾아온다. 나는 고개를 휙휙 흔들며 제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윽, 흣…….”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호흡이 무너지며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어려워.’
언젠가 한 번 비슷한 증상을 겪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은발 녀석과 단둘이서 장작을 구하러 갔을 적 같긴 한데……. 그때는, 어떻게, 멈췄더라……?
“힉, 흑…….”
턱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다급히 닦아 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자꾸만 몸이 비틀비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제길…….’
그러던 중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라지.」’
“……!”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공포가 스멀스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