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64)화 (64/115)

63화.

「뭐, 뭐뭐, 뭐……? 저, 저저저, 저런 천박한 말을! 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소리야?」

욕설에 울컥한 건지 꼬맹이가 얼굴이 벌게져 소리쳤다.

「내 이름은 젠냐 아쿠벨, 그리고 우리 형님은 자하르 아쿠벨! 이번 GEC에 초청받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어때. 이제 좀 감이 와?」

“하아…… 가라.”

「내 욕했지? 너 내 욕한 거지? 아쿠벨이란 성을 몰라? 아, 아닛, 설마 GEC가 뭔지도 모르는 거 아냐? 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 아냐고!」

「도련님, 아무래도 배운 게 없는 자 같습니다.」

나는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만약 내가 기억하는 ‘아쿠벨’이 맞다면 하나밖에 없다. ‘유럽 연합 이능력 협회’의 대표 이사. 우리나라와 달리 국가적으로 묶여 하나의 인물이 전 유럽 지역을 관리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뭐? 혼자 살아남기 힘드니 어중이떠중이들끼리 모여 떼를 이루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네 소속을 밝혀!」

「한국인.」

「야!」

「그만 짖고, 꺼져.」

챙강, 칼날을 잡아 똑 부러뜨린 후 바닥으로 던지자 꼬맹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히익! 뭔가 따끔따끔하다 했더니 에스퍼의 기운이었나 봐! ……예, 예고르, 어쩌지?」

「침착하십시오. 도련님! 저자의 수준에 맞게 설명해 주시면 본인의 위치를 알고 도련님께 충성을 보일 겁니다. 아쿠벨의 위대함을 모르는 배움이 짧은 자 같으니, 그…… 자국으로 예시를 들어 보심이 어떠십니까!」

「아! 그, 그런가? 야!」

여기도 텄군. 그냥 정일문에게 방 하나 내달라 해야겠다. 나는 놈들의 부름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짧게 혀를 차곤 장미 정원을 막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굳이 나를 쫓아온 꼬맹이가 앞을 척- 막아선다. 서로 상관 말고 각자 알아서 갈 길 가면 편할 텐데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꾸만 본인이 누군지 알리려 드는 게 꼭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난 철부지 애새끼 같아 우습기 짝이 없었다.

대체 나한테 그걸 인정받아 뭐 하려고? 아, 혹시 내가 넙죽 엎드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픽 비웃었다. 더는 놀아 줄 생각이 없어 마저 지나치려는데, 꼬맹이가 뱉은 말이 내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나는 브릭트스컴트 ‘송여환’ 에스퍼의 약혼자거든!」

……송여환? 의외의 이름이 들려와 천천히 뒤돌아 꼬맹이를 바라봤다. 녀석은 나를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좀 반응하네. 역시 자국의 기업으로 예시를 들어 줘야 하는 건가.」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드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저 ‘약혼자’라는 단어만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 개…… 아니, 송여환의 약혼자라고 이 꼬맹이가? 나는 꼬맹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훑었다.

느껴지는 기운으론 아마 높은 급의 가이드. 외모도 적당히 그럭저럭. 거기다 집안이 아쿠벨이라면 브릭트스컴트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귀족 가문일 터. 그런 두 집안이 약혼을 맺는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인데, 그걸 왜 내가 알아야 하는 거지?

‘네가 꺾여. 난 안 꺾일 거니까.’

그 말은 왜 또 떠오르는 거고?

“…….”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보고 뭐 어떡하라고. 왜 나한테 잘난 듯이 지껄이는데? 송여환이 약혼자가 있든 말든 그게 뭐. ……X발, 왜 자꾸만.

‘다른 건 다해도, 자학은 하지 마.’

나를 위로해 주던 송여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안 그래도 복잡한데 별…… 씹, 젠장!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수직 상승하는 불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주제 파악이 좀 되는 거…… 아악!」

“야.”

휘익! 꼬맹이 녀석의 머리채를 한 손으로 잡아 꺾었다. 작은 대가리가 내 손을 따라 휙휙 사정없이 흔들렸다.

「악!」

높은음의 비명이 흐르고 녀석이 내 손등을 마구잡이로 할퀴어 댔다.

「놔! 놓으라고!」

소리를 질러 대며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긴 하는데 영 요령이 없다. 손등에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으니까. 이건 힘이 약한 건지, 아니면 반항을 해 본 적이 없는 건지.

「도련님!」

황급히 달려오려는 충견 쪽으로 반대쪽 손, 검지를 들어 거기 가만히 있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지금 기분 X같으니까 괜히 나대지 말고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나 하고 있어.」

「아흐, 으으읏! 아파앗!」

「쉬이, 쉬- 소리 그만 질러. 예쁘장한 얼굴 갈아 버리기 전에.」

「으읏!」

「야. 한국에는 관상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꽤 정확하거든? 그러니까 나같이 관상 더러워 보이는 새끼 보면 알아서 썩 꺼져야 해. 득달같이 달려들지 말고.」

「아…… 흐, 놔줘어!」

「여기 올 때 주변에서 내 얘기 안 하디? 안 할 리가 없을 텐데. 나 씹기 좋아하는 새끼들만 천지라……. 낙유성 그 개새끼 뜨면 피하라고 정말 말 안 해 줬어? 응? 하, 너도 인복은 별로 없나 보다. 그런 충고해 줄 사람도 없는 거 보면.」

반항하던 몸짓을 멈춘 아쿠벨 꼬맹이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나를 올려다본다.

「나, ……낙유성? 네가- 아악!」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쥐고 있던 머리채를 던지듯 놓았다. 녀석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도련님!」

황급히 뛰어와 꼬맹이를 얼싸안는 녀석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뭐 급소라도 다친 줄 알겠네.

「밥 좀 잘 먹여. 애가 영 시원찮다.」

내 조롱에 놈이 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물론 그러든 말든 나는 입꼬리를 올리곤 미련 없이 자리를 떴지만.

나름대로 화풀이를 해 봤지만 엿 같은 기분은 풀릴 생각을 않는다. 나는 답답한 속에 머리를 헤집었다. ……젠장, 쉬고 싶어. 나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일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방 하나만 잡아 놔.”

용건을 전한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 만약 10분 이상 기다리게 한다면 당장 이사장실로 찾아가 패악질을 부릴 생각이었는데 다행인지 유감인지, 정일문은 정확히 5분 만에 비서를 보내 커다랗고 조용한 방을 내주었다. 정말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다.

그렇게, 독립된 공간을 얻고 나서야 나는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해 죽겠네.’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깊은 휴식을 취하며 한참을 빈둥거린 나는 잠시 잠이 들었다 깼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느지막이 시간을 확인하니 네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도 여섯 시가 안 됐다니 믿을 수가 없다.

“젠장, 시간 한번 더럽게 안 가네.”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고 의미 없는 생각에 잠겨 갈 즘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야 할 방문이 노크도 없이 덜컥 열렸다.

“꺼져.”

상대 쪽이 먼저 무례를 범했으니 나도 예의를 차릴 이유가 없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축객령을 내렸다.

“…….”

그런데 상대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뚜벅뚜벅, 숨길 생각도 없는 발소리가 우스웠다. 대놓고 습격하겠다는 거야 뭐야? 왜 이렇게 성의가 없어? 적어도 기척 정도는 숨겨야 하는 거 아닌가. 아, 혹시 그냥 나랑 한판 해보고 싶은 머저리인 건가?

회담으로 인해 여러 나라에서 날고 긴다는 놈이 한 트럭 들어왔을 테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에스퍼란 누가 위고 아래인지 겨뤄 보길 좋아하는 짐승들이니까.

다만…….

‘나를 상대로?’

굉장한 자신감이네.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나는 상대가 더 가까워졌을 때를 노려 먼저 선공을 치려 했다. 그런데 막 힘을 끌어 올리기도 전에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건드려 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 냄새였다.

‘제길, 하필이면.’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자마자 미간을 팍 찌푸렸다. 자동 반사로 그럴 만큼 지금 가장 만나기 불편한 사람.

“안 자는 거 다 아는데~”

송여환.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결국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역시나 내 감이 맞았다. 눈앞에 서 있는 놈은 송여환이었다.

“안녕.”

눈을 접으며 발랄하게 인사해 오는 망할 녀석. 나는 인사를 무시하며 송여환의 복장을 훑었다. 검은 정장과 리시버. 왜 송여환이 경호 복장을 하고 있는 거지? 정일문이 미치지 않고서야 S급 에스퍼를 회담 경호원으로 쓸 리가 없을 텐데. 그것도 브릭트스컴트라는 배경을 달고 있는 놈을.

내가 의문을 제기하려던 찰나, 놈이 먼저 선수를 쳐 왔다.

“오늘 되게 예쁘네? 유성이 형.”

“돌았냐?”

놈의 충격 발언으로 인해 물으려던 질문이 저 멀리 날아갔다. 이게 모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예쁘다’라니. 빈말을 하고 싶더라도 좀 어울리는 단어를 써야지, 예쁘다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닌가? 놀리고 싶은 거라면야 성공이지만, 아니라면…….

‘이 새낀 보통 변태가 아닌 걸 수도.’

나는 제정신이냔 표정으로 놈을 쳐다봤다. 그러자 송여환은 ‘이게 아닌가?’ 싶은 얼굴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더니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정답! 천사?”

진짜 한 대 쳐 버릴까.

“개소리 말고. 네가 여기 왜 있어?”

놈의 등장으로 평화를 빼앗겨 버렸다.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그런데 이 새끼가 제 귀를 톡톡 두드리더니 뭘 물어보냐는 듯 태평히 대꾸해 왔다.

“보시는 대로.”

“경호? 네가 왜.”

“어. 별거 아니고, 누구 손가락이 부러진 거 같아서 지켜 주려고 왔지.”

“…….”

“근데 멀쩡해 보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