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송여환이 다녀간 뒤로 일주일이 흘렀다. 내 일상은 여전했지만 하나 바뀐 게 있었으니.
─ [잘 잤어?]
─ [오늘 하늘 완전 좋아. 너는 뭐 하고 있었어?]
─ [시간이 없어서 김밥 한 줄 사 먹었는데, 여기 괜찮다. 맛있네. 나중에 먹으러 오자. 일 끝나고 간단하게 점심 때우기 좋아 보여.]
─ [패, 팩! 하그으 잇으스, 말이이이…… 흐흐, 즐즈…….]
음성 메시지부터.
부재중 46통.
[협회 송여환]
전화에.
징- 징- 징- 징- 징-
[(셀카)] 1
[ㅋㅋ모해] 1
[???????] 1
[오늘도 안 봐 ㅠㅠ?] 1
[님 뭐하심] 1
[앗ㅎ 영화관 놀이동산 수족관 티켓이 잇네ㅋ] 1
[(셀카)] 1
[(셀카)] 1
[뭐가 예뻐? 다 예뻐ㅎ?] 1
[보고싶다] 1
[혹시손ㄱ가락다쳣음?] 1
쌓이는 메신저까지.
“X발.”
……이 정도면 스토킹 행위 아닌가. 며칠 내내 이어진 송여환의 끈질긴 집착에 고개를 내저었다. 짧게 혀를 찬 나는 메신저 맨 아래에 도배된 ‘♥’를 보고 조용히 창을 내렸다.
솔직히 그냥 차단하거나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면 될 텐데, 나는 그저 귀찮은 놈이라 욕하며 무시하는 걸로 반응을 일관했다. 물론,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우연찮게 송여환이 아닌 다른 이의 음성 메시지를 틀게 됐다. 내 눈치를 살피며 스리슬쩍 연락을 취해 오던 정일문이었다.
보내온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그날 내가 전부 실수했고 잘못했으니 그만 기분을 풀어 달라, 이번 달 셋째 주에 개최하는 세계 에스퍼 회담 한국 대표로 꼭 나와야 한다’ 등등……. 따지자면 그냥 개소리였다.
나는 늘 그렇듯 못 들은 척 꺼 버리려다 정일문이 뱉은 한 단어에 꽂혀 손가락을 멈췄다.
‘휴가.’
삑- 정일문이 남긴 음성메시지를 다시금 재생했다.
─ [진짜 반성하고 있다니까? 제발 좀 믿어 줘! 다시는 그런 행동 하지 않을게. 내 전부를 걸 수 있어. 응? 유성아, 으응~? 아아, 그리고 너 이번 한국 대표로 나와 주면 그으…… 그, 그래! 그 휴가! 어! 휴가 줄게, 휴가! 1년 동안 저얼대 안 건드릴게! 나 진짜 지장도 찍을 수 있어!]
‘1년…….’
나는 고민하다 정일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사실 당장 필요한 건 휴가, 그러니까 휴식이라는 개념보단 ‘1년’간 누구도 날 건들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각설하고,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것도 ‘완벽한 고립’으로.
그러니 정일문이 내게 제시한 조건은 썩 나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말도 없이 잠적을 타는 방법 또한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정일문뿐만 아니라 부모님까지 나를 수시로 들쑤실 게 뻔했다. 전자는 패악을 부려 닥치게 할 수 있으나 후자는 그럴 수 없으니까 그냥 부모님도 납득할 명분을 만드는 게 좋았다.
나는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앞뒤 설명 하나 없이 단호한 한마디를 뱉어냈다.
“약속 지켜.”
정일문은 전화기 너머로 그러겠노라며 웃었다. ……능구렁이 새끼. 1년, 그 시간 동안 나는 외국으로 나가 있을 생각이다. 아무도 찾지 못할 그런 곳으로 말이다. 특히 송여환 그 녀석이…….
‘……아니. 그러면 내가 일부러 피하는 것 같잖아. ……맞나?’
피하냐, 피하지 않느냐로 따진다면 피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피하고 싶다는 게 맞는 걸까? 젠장, 모르겠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이런 고민까지 해야 하지? 그것도 송여환 때문에?
불쑥 짜증이 솟아올라 이젠 사적으로 주절거리는 정일문의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그래, 됐다. 어느 쪽이든 이제 와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혼자 있게 되면 전부 정리될 텐데.
그 순간, 며칠 전 녀석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네가 꺾여. 난 안 꺾일 거니까.’
“……하, 헛소리.”
나는 중얼거리며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세계 에스퍼 회담, 일명 ‘GEC’가 개최되는 당일이 됐다.
“어때? 완전 죽이지!”
눈을 반짝 빛내며 내 주위를 빙빙 도는 정일문은 어느 때보다 기뻐 보였다. 나는 귀찮음에 대충 고개만 끄덕였을 뿐인데 정일문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떠들어 댔다.
“아무나 손수 지어 주는 그런 가게가 아니라고! 국가 원수나 고위 관계자, 총통, 내로라하는 세계 스타들만 상대하는 그런 테일러 숍이야.”
정일문은 당당히 가슴을 내밀며 계속해서 자랑질을 해 댔다.
“내가 특별히 몇 달 전부터 예약해서 오늘 새벽 비행기로 받아 온 거지. 한마디로 유성이 네 맞춤 정장. 어때? 진짜 끝~ 내주지 않니? 하아앗, 어떡해! 너무 멋지다. 거기서 우리가, 아, 아니! 네가 제~ 일 빛날 거야. 으흐흐.”
정일문은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확실히 놈이 떠드는 대로 옷 핏 자체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걸 정장이라 부르기엔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정장보단 제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클래식한 흰 셔츠에는 타이가 없는 대신 옷깃이 체인으로 연결돼 있다. 그 위로 걸친 재킷은 목부터 허리선까지 사선으로 잘 빠졌으며, 어깨엔 금색 견장이 달려 있다. 또한 라펠에는 협회의 이니셜을 박아 넣은 작은 휘장도 부착되어 있었는데, 현대에서 갖추어 입을 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하나하나 보자면 너무도 사치스럽고 화려할 정도로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나 전체적인 조합으로 보자면 흠잡을 곳 없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한마디로 기품이 있단 소리다.
“커프스에 달린 보석은 네 탄생석으로 맞췄어. 예쁘지?”
탄생석은커녕 보석 자체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나지만 소맷단에 달린 보석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지선우에게 고백할 적 맞추었던 반지에도 달려 있던 거니까. 제일 흔하고 제일 유명한 보석. 다이아몬드.
나는 투명하고 반짝이는 돌을 내려다보며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과거 좀 떠올렸다고 바로 반응이 오는 유약한 멘탈이 우스워 픽 입꼬리가 올라갔다. 등신 새끼, 머저리 새끼, 나가 죽어라 제발.
‘빌어먹을…….’
또 불안 증세가 시작되었다. 두통, 이명, 매스꺼움, 가빠지는 호흡.
“……X발.”
거칠게 재킷을 벗어 던지곤 소파로 걸어갔다. 정일문이 뒤에서 으악 비명을 내지르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야, 야아! 이게 얼마짜린데!”
“짖지 마. 골 울려.”
“어후! 어후, 증말! 못살아 진짜…….”
“몇 시부터야.”
“여섯 시부터. 음, 세 시간 정도 여유 있네. 왜? 컨디션 별로야? 가서 차 좀 내오라 할까?”
“아니. 됐어.”
“어디 가게?”
“어.”
“어디? 어디이! 야, 야! 유성아!”
여섯 시 전까진 홀로 머리라도 식힐 생각에 소리치는 정일문을 향해 따라오지 말라는 눈빛을 던졌다. 바깥바람을 쐬면 어지러운 두통이 좀 가라앉겠지.
그렇게 도착한 곳은 협회 건물 뒤 장미 정원이었다.
사치 부리기 좋아하는 정일문답게 그가 만든 장미 정원은 SNS에서도 화제가 될 만큼 크고 화려했다. 거기다 고위 관계자들만 이용이 가능해서 사람도 적어,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종종 찾는 곳이었다. 꽃 냄새를 크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식물들이 주는 안정감만큼은 인정하는 편이므로.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사색에 잠겼다. 바로 그때.
─휙! 쿠당탕!
「악!」
웬 다람쥐 같은 놈이 툭 튀어나오더니 내 몸에 부딪혀 날아갔다. 나는 전혀 미동도 없었는데, 달려와 부딪친 녀석은 혼자 나동그라지고 난리도 아니다.
나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산책을 방해하는 놈을 내려다봤다. 빨리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
「아, 으으으! 야! 너 뭐야! 앞을 잘 봐야 할 거 아냐!」
놈이 부들거리며 일어나더니 영어로 소리를 질러 댔다. 다시 말하지만 난 가만히 있었다. 굳이 가만있던 사람에게 달려와 부딪친 건 저쪽이란 말이다.
“지랄.”
어이가 없어진 나는 코웃음을 치고 녀석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치워.”
내 목에 닿은 칼날만 아니었다면.
‘정일문 이 새낀 관리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지.’
이젠 아무나 막 기어들어 오나?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시선만 돌려 겁대가릴 상실한 안타까운 놈을 쳐다봤다. 꼬맹이의 보호자 격인가. 아니면 충견? 뭐, 아무튼 뒈지고 싶다는 마음은 잘 알겠다.
나는 손가락으로 칼날을 툭 건드리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 있어?”
어차피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면 이곳에 나를 제외한 에스퍼는 없다. 꼬맹이는 가이드, 이놈은 일반인. 배짱이 큰 건지 무식한 건지. 뭘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다.
「으이씨. 야! 눈이 달렸으면 제대로 보고 다녀야 할 거 아냐! 예고르가 손 한번 봐 줄까, 어?!」
아……. 무식한 쪽이네.
「아가리 닥치고 이거나 치워. 쌍으로 태워 버리기 전에.」
나는 놈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같은 언어를 사용해 말해 주었다. ‘나는 갈 길이 있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비켜라’는 신사적인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