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은혜 갚으러 온 까치?”
녀석에게선 술에 전 나와 달리 포근한 냄새가 폴폴 풍겨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면 제비? 요새 새들이 은혜를 많이 갚나 봐. 늦장 부리느라 박 씨는 못 구했고, 대신 다육이를 구했어. 아, 이거 꽃도 핀대.”
……갑자기 찾아와서 뭐? 지금 꿈을 꾸나? 왜 대낮부터 저 새끼의 헛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지. 나는 대꾸 없이 놈을 위아래로 훑었다. 누가 보면 순진한 애 삥 뜯는 양아치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꺼져.”
간단하게 답해 주고 문을 닫으려는데, 놈이 내 행동을 제지했다.
“어어어! 나 팀원들도 버리고, 친구들도 버리고 여기 온 거다?”
“꺼져.”
“안 꺼져! 우씨, 무슨 ‘꺼져’ 자동 응답기야?”
미친놈이 힘으로 문을 열려고 한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게 무슨 행패야? ……X발, 생긴 건 리트리버면서 힘은 고릴라냐.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그러자 저 맑은 또라이도 ‘으아아아!’ 기합을 외치며 따라 힘을 주기 시작했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싸움이었다.
“이…… 씹, 손…… 안, 놔?”
“너…… 으, 라면…… 놓, 겠냐!”
나와 놈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먹고 힘주면 못 이길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현관문이 비명을 지르다 못해 부서질 게 뻔히 보여 어느 정도 조절을 해야 했다.
한참 힘겨루기를 하던 놈과 나는 아주 잠깐의 휴전을 가지기로 했다. 서로 헉헉 숨을 고르며 눈을 모로 떴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 얻다 대고 눈을 부라려? 어이없는 게 누군데?
“하아…… 제발, 가라. 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 까칠한 태도에 송여환이 쩝, 입맛을 다신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뱉었다.
“어후- 추워. 그래, 알았어. 나도 이렇게까지 거절하는 사람이랑 파티하기 싫어. 근데 내가 곱게 자라서 추위에 내성이 좀 약해. 추위 녹일 동안만 너희 집으로 꺼질게. 둘러봐 봐, 실내가 여기밖에 없잖아.”
당연하지. 우리 집밖에 없는 층이니까.
“지랄 말고 꺼져!”
확실한 거절 의사를 내비쳤는데, 이 미친놈이 방심한 틈을 타 문 틈새로 대가리를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뺨이 눌리고, 산발이 되어 가는데도 놈은 포기하지 않고 끄응! 집요하게 파고들어 왔다.
“시이이잃어어어!”
이…… 이 미친 새끼!
“문 열어어어어어어!”
광기도 저런 광기가 없다. 혹여라도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도대체 우리 집에 뭐가 있다고 저렇게 아득바득 들어오려는 거지? 나는 지지 않고 힘을 주며 놈을 밀어내려 애를 썼다.
그러다 문득 놈이 오래 입원했었던 환자라는 사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힘을 풀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힘을 풀긴커녕 알 바 없다고 바로 걷어찼을 텐데…….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놈이 쭈글쭈글해진 면상으로 눈을 번쩍이며 외쳤다.
“헉, 그래! 라면!”
“뭐?”
“라면 갚으라고! 라면!”
이히히 웃으며 ‘천오백 원!’ 하고 외치는 꼴이 해맑았다.
……징한 새끼. 나는 결국 놈에게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천오백 원을 준다 해도 저 또라이는 안 나갈 걸 무의식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집에 뭐가 있다고. 왜 그렇게까지 들어오고 싶어 하는진 모르겠으나…… 상대 안 해 주면 제풀에 지쳐 나가겠지.
‘그래, 니 X대로 해라.’
나는 한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터질 것만 같은 스트레스를 겨우 다스려야 했다.
“이겼다! 아하하!”
거실 한복판에 서서 승자의 포즈를 취하는 미친놈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입씨름할 생각은 고이 접어 하늘로 날려 보냈다. 대화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거다.
기실 타인이 내 집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불쾌했다만, 송여환은 워낙 하찮다는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아니면 잡았던 손의 온기가 나름 익숙해서인지…… 뭐, 적당히 무시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음을 뒤로한 채 침대로 올라갔다. 힘을 빼서인가? 아까보다 쉽게 잠이 온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놀라울 정도로 몸이 나른했다. 평소와 달리 포근히 느껴지는 침대가 썩 마음에 들었다. 이불도 푹신하고, 베개도 편한 게 아주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뒤척임 한번 없이 깊은 수마로 빠져들었다.
* * *
‘나 진짜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구나.’
송여환은 팔짱을 낀 채 넓은 거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무릇 ‘좋아하는 사람의 집’이라 하면 집 안 곳곳에서 풍기는 체취에 설레거나, 평소 보지 못한 모습에 설레거나, 알 수 없던 취향을 발견해 설레거나 하는 ‘두근두근 특별 이벤트’라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낙유성의 집은…… 아무리 봐도 ‘두근두근 특별 폐허 체험’이었다.
“와, 이건 진짜……. 여러 의미로 심장이 두근두근하네. 허, 술병이 도대체 몇 개야?”
송여환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지어 내가 광고 모델 한 것도 있네…….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이 정도면 간이 작살나고도 남았겠다. 아이고, 인간아…….’
환기는 도대체 언제 시킨 건지 알 수 없는 술 전 내와 굴러다니는 쓰레기들의 향연은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박수가 절로 나온다.
‘일단…… 여기 있거라. 유성 2세야.’
송여환은 햇볕이 잘 드는 한곳에 다육이를 올려 두며 팔을 걷어붙였다. 자고로 상남자란 외조를 떠나 내조까지 완벽히 할 수 있는 자란 말이다.
‘자, 보거라. 나의 이 ‘형과 누나 방 대신 치워 주면 10만원’으로 길러진 실력을!’
칭찬받을 미래를 떠올리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흥흥흥~~~”
송여환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집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분리수거, 음식물, 바닥 청소, 욕실 청소, 유리 닦기 등등. 쉴 틈 없이 바지런히 움직였다. 주부 9단이 온다 해도 밀리지 않을 꼼꼼함은 덤이었다.
그렇게 마물들이 ‘어이구, 수고 많으십니다’ 하며 들어와 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집이 반짝반짝 새집으로 바뀌었다. 송여환은 땀을 닦으며 뿌듯함에 셀카를 찍었다. 나중에 잘되면 별스타에 #상남자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 #내조는 행복 따위를 올려야 하니까 말이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이제 로맨틱한 분위기도 어찌어찌 만들 수 있겠지.’
송여환은 낙유성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가지고 온 가방을 뒤적였다. 안에는 책, 큐브, 껌 등등 간단히 가지고 놀 만한 것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그중 그가 고른 건 블루투스 마이크였다.
“헛, 큼큼!”
아주 약~ 간은 낙유성이 빨리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른 선택이기도 했으나 훗날 부를 세레나데를 위한 연습이기도 했다.
“후우~”
송여환은 그렇게 장장 두 시간이나 ‘남자라면 불러야 하는 명곡’을 줄줄 열창하며 신나게 흔들어 젖혔다. 그 와중에 혹시라도 잠에서 깬 낙유성이 들을까 목소리를 쫙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그냥 헛짓이었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확실히 낙유성이 예쁘긴 하지. 젠장, 이런 면까지 귀엽고 난리다. 송여환은 어두워진 바깥을 바라보며 낙유성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슬슬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빈속에 자꾸 잠만 자면 속 다 버리는데.’
끼익, 송여환은 닫힌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날아올 주먹과 욕설 혹은 그 외 다른 무언가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냄비 뚜껑을 들고서.
‘조용하네?’
차마 불을 켤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차라리 사자 우리에 들어가서 일대일로 맞짱을 뜨는 게 덜 무서우리라. 송여환은 침을 꼴깍 삼키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금세 적응한 눈으로 푹 잠든 낙유성이 보였다.
‘진짜 피곤했나 보네.’
SS급인 만큼 귀신 같은 감각을 지녔을 남자가 저리 무방비하게 있다니……. 그는 살금살금 다가가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흔들어 봤다.
“낙유성.”
미동이 없다.
“유성아?”
또 한 번 조심스레 그를 부르며 흔들어 봤으나 여전했다. ……그렇다면?
“……자기야?”
홋. 광대가 씰룩였다.
‘고자극.’
어디 어디 한 번 더…….
“여보…… 야?”
“으응…….”
~꺄홀.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입을 옹졸하게 모으고 침묵의 아우성을 질러 댔다. 방금 여보라고 인정한 거지? 어, 몰라. 암튼 그런 거야. 안 돼. 빠꾸 없어. 이제 안 바꿔 줘.
“큼, 큼! 여보야. 일어나서 식사하셔야죠.”
송여환이 헤벌쭉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속삭인 순간이었다.
“엇, 어억!”
침대에 푹 파묻혀 있던 낙유성이 팔만 뻗어 송여환을 휙 채 갔다. 큰 덩치가 가볍게 끌려갔다.
“조금만…… 응, 더…… 자자…….”
“……!”
목덜미와 어깨, 등허리까지 찌르르한 소름이 삭 훑고 지나갔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몸을 작게 떨며 송여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힛’, ‘앗’ 같은 이상한 소리를 뱉어 냈다.
‘……이, 이게 그건가? 귀르가즘이라 하는 그거냐고!’
그는 태어나 처음, 목소리만으로 흥분해 버렸다.
‘이거, 잘하면…… 한 발 정도는 무리 없이……. 헉. 잠깐. 혹시 이거…… 포상?’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송여환은 꿈질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낑차낑차 움직여 낙유성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