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57)화 (57/115)

56화.

“뭔데.”

내 물음에 정일문이 흐흥, 웃음을 터뜨렸다.

“뭐기인~ 너 아직 안 죽었다는 거지.”

“뭐?”

“잘 봐 봐.”

광대를 한껏 올린 정일문이 사진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 손놀림이 어찌나 정확하고 빠른지,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아 단 네 장의 사진만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았다.

이내 정일문은 한 명 한 명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을 줄줄 뱉어 냈다.

“얘는 A급에 아버지가 해군 중장.”

콕.

“얘도 A급인데, 이쪽은 어머니가 변호사 로펌을 크게 해.”

콕.

“이쪽은 B급이고, YVV엔터 외손.”

콕.

“그리고 얜 집안은 별 볼일 없는데, 등급이 S급. 뭐…… 가이드 S급이야 특별한 건 아니지만 우리한텐 네가 재산이니까 높은 등급도 후보에 넣어 줘야지. 예의잖아? 아아, 얘는 또 막 각성한 참이라 다른 에스퍼랑 접촉도 없어. 완전 새삥.”

정일문이 픽픽 웃으며 이어 말했다.

“네 이름값이 있는데, 중고를 어떻게 쓰니.”

나는 정일문을 따라 아하하, 허리까지 접으며 유쾌하게 웃어 댔다. 그러자 정일문도 엉덩이를 들썩이며 박수를 쳐 왔다.

“좋지? 좋지?”

좋냐고? 그래. 너 조질 생각에 아주 좋아 죽겠다. 이 씹어 먹을 똘빡 새끼야.

나는 생글거리던 낯짝을 싹 굳힌 채 유리 테이블을 주먹으로 콰앙! 후려쳤다. 순식간에 쩌적- 금이 갔으나 분이 풀리지 않아 한 번 더 쾅! 내려쳤다. 그제야 테이블이 와장창 부서졌다.

“왜, 딸꾹- 애, 아, 왜…….”

깜짝 놀라 몸을 피하는 정일문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아주 오랜만에 눈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왜?”

나는 소매를 걷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저딴 걸 나한테 들이밀어 놓고, 왜? 그 후론 그냥 눈에 거슬리는 모든 걸 때려 부쉈다.

* * *

“하아, 머리 아파.”

나는 늘 그렇듯 알코올에 찌든 상태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정일문이 내 속을 뒤집어 놔서 나도 놈의 집무실을 뒤집어 놓느라 난리를 친 게 바로 며칠 전이다. 그날,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 으름장을 놓고 와서인지 매일매일 쌓이던 음성 메시지도 깔끔히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작은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당분간은 철저하게 혼자겠구나, 생각하니 마음 어딘가가 이상하게 울렁였다.

사실 정일문의 행동은 잘못된 게 아니다. 비록 언사가 천박하고 배움에 비해 생각이 짧지만, 그는 협회의 이사장으로서 맞는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SS급 에스퍼를 그냥 썩힌다는 선택지는 없을 테니, 반쪽이 되어 버린 내게 짝을 골라 주려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화를 낸 이유는 타인이 멋대로 ‘지선우의 흔적’을 지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건 오로지 내 권리였는데, 함부로 침범해 오기에 눈이 돌았다.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지이이잉- 울렸다. 연락 올 곳이 없는데 누구지? 설마…… 정일문 그 금붕어 새끼가 또?

만약 정일문이 맞다면 내 손으로 손수 불명예은퇴를 시켜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런 기억력으로 이사장직에 앉아 있다는 건 많은 이에게 유감이 될 테니까.

하지만 발신인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세 글자가 담백하게 떠 있었다.

[송여환]

뭐지. 벌써 퇴원한 건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문득 떠오른 그날의 추행에 전화를 받았다. 내가 썩 정의로운 인간은 아니지만 그나마 사람이라면 피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앞머리를 휙 쓸어 올리곤 상대방이 건넬 유죄 선고를 기다렸다. 욕설이든 비난이든 받아들일 마음이었다. 정 원한다면 한 대 맞아 줄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들려온 목소리는 송여환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또렷하고 부드러운 음색.

-반가워요. 낙유성 에스퍼. 여환이 누나 되는 송여희라고 합니다.

‘누나?’

송여희라는 인물이 내게 전화를 건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차를 보내 드릴 테니 내일 아침 바로 병문안을 한 번 더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낙유성 에스퍼가 다녀간 후 여환이 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어요.

송여환의 병실에 내가 재방문하는 것.

-주치의 소견으론, 보다 높은 등급의 기운이 흐름을 잡아 주었을 확률이 크다…… 라네요. 우리 여환이도 참 재밌는 아이죠? 가이드의 가이딩보다 에스퍼의 기운이 더 효과 좋다니.

“…….”

-거절하시면 저희가 많이 섭섭할 거 같네요.

여기서 ‘저희’란 브릭트스컴트를 말하는 거겠지. 평소의 나였다면 대기업이고 나발이고 협박 말고 꺼지라며 화를 냈겠지만 다른 이도 아닌 송여환에 대한 부탁이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말이다.

아직 놈에겐 갚지 못한 빚이 꽤 쌓여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짧은 인사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전화를 끊었다.

“하아…….”

가이드의 가이딩보다 에스퍼인 내가 놈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웃겼지만, 그보단 빨리 도움을 주고 마음의 짐을 다 덜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제발, 내일 볼 때는 저번처럼 이상 증세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잠시 내려 두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딱 이것까지만 비우…… 하, 젠장. 못 마시잖아. 나는 짜증스럽게 술병을 집어 던지곤 팔뚝으로 눈가를 가렸다. 또다시 시작된 망할 금주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잘 오지도 않는 잠과 싸우느라 최악의 컨디션을 찍은 나는 이른 시간부터 송가(家)의 안내를 받아 병실로 발을 들여놓게 됐다.

송여희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송여환의 혈색은 저번보다 좋아 보였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몇 분 후 들어온 담당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음……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아무래도 도련님께서 등급이 높기 때문인지 가이딩도 효과는 있었지만…… 보다 확실히, 같은 에스퍼의 파장이…… 자, 큼, 자극이 되어……. 그으 높은, SS급의 그것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하는 의사에게 대충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확 밝아진 얼굴로 여러 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병실을 나섰다.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바꿀까 재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뒷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다.

아마 저들도 죽을 맛일 거다. 천하의 브릭트스컴트가 매일매일 살려 내라며 압박을 가하는 와중 발견한 작은 희망이 하필 나여서.

일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에스퍼에게 가이드를 들먹이는 건 여러 의미가 된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어찌 보면 송여환보다 높은 등급인 내게 가이드와 비슷한 역할을 하라는 건데…… 이걸 다른 에스퍼들이 보았다면 내가 머리에 총을 맞은 게 아닌지 진심으로 궁금해했을 거다. 그 정도로 모욕적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에스퍼에게 가이드란 무척 소중한 존재여서 좋게 받아들이는 놈들도 있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의미가 갈린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 ‘너 너희 아버지 닮았다’는 말에 웃으며 ‘고마워’ 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이 X발 새끼가!’ 하고 욕을 박는 놈도 있듯 에스퍼, 가이드 역시 똑같다.

물론 송여환이 내게 저주처럼 항상 퍼붓던 ‘가이드나 될 것이지!’는 후자였겠지만.

아무튼 병원 측에서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하다는 뜻이다. 만약 내가 이 모든 상황을 모욕으로 받아들여 협회까지 끌고 오게 된다면 사건만 커지게 될 테니까. 그럼 병원은 꼼짝없이 브릭트스컴트와 이능력 협회 사이에 낀 말라비틀어진 새우가 되리라.

다행히 나야 뭐, 송여환에게 진 빚도 많고 해서 딱히 기분 나쁠 일은 없었다. ……그래. 분명 없었는데, 이 짓거리가 장기간 지속될 줄은 또 몰랐다.

이젠 놈과의 스킨십이 어색하지도 않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병실에 도착해 송여환과 두세 시간 정도 스킨십을 나눴다. 조금 뉘앙스가 이상하긴 한데 거창하게 뭘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손을 잡은 채 멍 때리는 게 전부다.

이틀째까진 혹시나 또 그 증세가 나타날까 걱정이 돼 마음을 편히 놓질 못했는데 나흘째부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은 조용하고, 전해지는 체온은 따뜻해서 졸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늘도 별다르지 않은 날. 송여환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꾸벅이고 있는데, 무언가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뜨며 그 시선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갈색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우린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 침묵을 유지하며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문득 내 손에 잡혀 있던 손이 슬며시 깍지를 껴 온다. 나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그냥 언젠가 놈이 내게 전했었던 인사를 그대로 되돌려 주기로 했다.

“안녕, 송여환.”

놈이 배시시 웃는다. 계속 잠들어 있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눈을 둥글게 휘어 웃었다. ……여우 새끼,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나는 잡힌 손을 작게 흔들며 물었다.

“잠은 푹 잤냐?”

내가 듣기에도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송여환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보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마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소리를 내는 게 어색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하는 말이…… ‘밥 먹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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