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부엌으로 가는 길. 계속해서 발에 차이는 많은 술병을 보자 픽 웃음이 터졌다. 아주…… 대단한 열부 나셨군.
달칵. 1L 생수병을 따서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느 정도 목을 축인 후 나는 천천히 주변을 훑어봤다.
보이는 풍경은 어제나 그제나 변함없이 똑같다. 넓은 통창과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퍽 익숙해야 할 집이 여전히 낯설다. 왤까? 가장 중요한 존재가 사라져서 그런가.
“청승은…… 씹.”
어이가 없어진 나는 비아냥거리며 바닥으로 빈 페트병을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까 들었던 음성 메시지가 문득 떠올랐다. 발신인은 ‘정일문’ 협회 이사장. 징글맞은 새끼가 나를 말려 죽이려 작정을 했는지 지긋지긋하게도 연락을 보냈다.
아예 차단해 버릴까 고민했지만 그러다 또 부모님 댁으로 연락을 돌릴까 싶어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물론 한 번 더 그딴 개짓거리를 하면 아예 태워 버리겠다는 경고를 전하긴 했지만, 멍청한 정일문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쏴아아아아아.
나는 비가 쏟아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넓은 유리창 너머 보이는 세상은 마치 회색 도시 같았다. 특히 곰팡이처럼 퍼진 우울한 먹구름이 그러했다.
제길, 빌어먹을 비. 나는 손을 들어 괜스레 머리를 털어 냈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냉기가 가득한 집 안은 내 남은 온기마저 빼앗아 갔다. 심각할 정도로 춥고 조용한 공간에 정일문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둥둥 떠다닌다.
‘─ [벌써 장례도 끝났는데…….]’
장례식. 지선우의 장례식을 말하는 거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형을 배웅하지 못했다.
눈을 뜬 후 한 일이라곤 그저 나를 보며 오열하는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아 준 것뿐. 아버지께 듣기로 나는 대략 한 달 정도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의사의 말로 깨어난 게 기적이라나 뭐라나. 뭐, 크게 틀린 말도 아닌 게 같이 돌아온 생존자, 송여환은 아직 혼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송여환의 소식을 듣고 퇴원 후 며칠이 안 되어 찾아갔지만, 입구에서 거절당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가 봤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마 몸이 성치 않으니 외부인의 병문안엔 예민할 시기라 그런 게 아닐까. 아니면 그냥 내 존재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SS급이 되어서 제대로 지켜 주지 못했으니까.
사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송여환이 나를 구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한 번 더 몸이 꿰뚫리는 일도 없었을 터. 그럼 S급답게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거다.
“내가 뭐라고…… 미련한 새끼.”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상하게 자도 자도 끝없이 졸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인간의 뇌는 참 똑똑해서 본인이 참을 수 있는 스트레스의 한계치를 뛰어넘을 때, 알아서 모든 기능을 꺼 버린다고 한다. ……그럼 현재 내 몸도 그런 상태인 건가.
“…….”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아아. 망할 놈의 빗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X발, 개 같은 비. 잊고 싶은 것을 또 생각나게 한다. 나는 팔뚝으로 눈가를 가렸다.
“먼저 가서 좋냐?”
잠긴 목소리로 곱지 않은 말이 갑작스레 툭 튀어나왔다.
“좋아 죽겠냐?”
뒤이어 나온 말에도 원망이 서린다.
“누가 나 살려 달랬어? 항상 다 너 좋을 대로지. 미워하게 할 거면 끝까지 밉게 굴던가.”
원망은 곧 그리움이 되었다가 금세 분노로 뒤덮였다.
“젠장, 젠장, X팔, 개 같아!”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고, 눈두덩이로 열이 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 났다. 끝까지, 죽어서도, 기어코 나를 개새끼로 만들어 버리는 지선우. 장례 정도는 나 좀 기다려 주지 그랬냐.
“비겁한 새끼.”
나는 모진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욕설을 중얼중얼 뱉어 냈다.
“내가 화내고 따지는 건 듣고 가야지. 그렇게 나 하나 홀라당 살려 놓고 가 버리면 난 뭐 어쩌라고? 네가 나한테 먹인 엿이 도대체 몇 개인데 그러고 가. 적어도 나랑 하루, 이틀, 일 년은 찌질하게 싸워 주고 가야 할 거 아냐.”
울분이 터진다.
“형은 아주 좋겠다. 나를 살인자로 만들어서. 어? X팔 퍽이나 후련하겠다!”
왜? 내가 울고불고 너 하나 그리워하면서 청승이나 떨 줄 알았냐. 이렇게 원망할 줄은 몰랐지?
“웃기지 마.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해.”
억지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태생이 못돼 처먹은 새끼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난 전혀 안 고마워. 평생 원망할 거야.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선택을 한 거라고, 형은.”
나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새까만 악을 토해 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가 내린 선택에 대해 몇백 번이나 곱씹었지만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냥 미웠다. 후에 내가 얼마나 아파할지, 괴로워할지, 끝내 내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거라 그렇게 정의 내렸다.
“……욱!”
한참이나 성을 내던 나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토기에 몸을 급히 일으켰다.
우당탕! 여러 번잡스러운 소음을 일으키며 화장실로 향해 변기 커버를 부여잡고 우웩, 에윽, 컥컥! 속에 있는 모든 걸 비워 냈다. 나오는 거라곤 투명한 소주와 노란 위액뿐이었지만 그래도 뭘 뱉긴 뱉었다고 속이 한결 편해졌다.
“하아, 하…….”
화장실에 주저앉아 지친 숨을 고르는데, 돌연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일문의 말대로 폐인 그 자체였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등을 들썩이며 유쾌하게 웃어 댔다. 망가짐을 인정하니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내 우울함의 근원은 죄책감이 아닌 원망이니까.
“지선우……. 네가 그렇게 희생하면 내가 뭐, ‘형이 준 목숨은 소중하게!’ 이 지랄하며 등허리 꼿꼿이 펴고 바르게 살 줄 알았냐?”
지선우에 대한 원망에 자꾸만 입이 열렸다.
“착각하지 마. 매일 술 처먹고, 사고 치고, 아주 네 속이란 속은 다 뒤집어 놓을 거야. 두고 봐. 내가 형 가는 길, 곱게 보내 줄 거 같아? 마음에 걸리고 걸려서 절대 편히 눈 못 감게 할 거야.”
구시렁구시렁, 깨지 않는 취기를 벗 삼아 지선우에 대한 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띵- 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우중충한 날에 찾아온 손님이라니. 설마 좀 씹었다고 지선우가 때리러 온 걸까? 아, 그거 재밌네. 그럼 붙잡아 놓고 욕을 한 사발 퍼부어 줘야지. 나는 픽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을 뭉그적거리자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다. 성격 급한 거 보니 진짜 지선우 같았다.
“X발…… 괜히 반갑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흐린 정신을 깨우고자 손등으로 뺨을 짝짝 후려치곤 현관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이곳저곳 여러 번 몸을 부딪치기도 했지만 별로 아프진 않았다. 나는 팔뚝을 슥슥 문지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끽해야 협회 관계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서 있는 이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낙유성 에스퍼님 맞으십니까?”
뭐야, 이 새끼. 안경을 추켜올린 새끼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각 잡힌 깔끔한 검은 정장,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동작. 술 냄새나 풀풀 풍기는 나와 비교됐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이 집의 주인을 내가 아닌 저 새끼로 착각할 만큼.
“안 사. 꺼져.”
나는 냉담히 한마디를 뱉고 문을 닫으려 했다. 잡상인인지 사이비인지 모르겠지만 최상층까지 꾸역꾸역 올라온 실력 하나는 칭찬하고 싶었다. 여기 출입증 없이는 힘들 텐데.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며 픽 입꼬리를 올렸을 때였다.
닫히던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멈췄다. 뭔가 싶어 쳐다보니 안경 낀 놈이 문을 잡고 씩 웃고 있었다.
아, 그냥 또라이구나. 나는 대꾸 없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소주병 하나를 흘끔 바라봤다. 몇 번 후려치면 알아서 꺼지겠지. 그렇게 막 소주병을 잡으려 허리를 숙인 순간, 놈이 잽싸게 말을 던졌다.
“안녕하십니까. 송가(家)의 집사장, 오문태라 합니다.”
‘송가’. 몽롱했던 내 정신을 깨우기에 아주 좋은 말이었다.
“아. ……송여환.”
* * *
‘송여환…… 죽었습니까?’
‘허허, 무슨 그런 불경한.’
오문태라는 사람은 가볍게 내 말을 넘기곤 송여환이 입원한 병실 호수와 면회 시간을 알려 줬다. 계속 거절해 놓고 왜 이제 와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따질 생각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 송여환을 보러 간다.
내가 아무리 철면피 깔고 사는 놈이라지만 나 지키겠다고 쓰러진 놈 병문안 가는데 술 냄새를 풍길 수는 없어 며칠 금주했다.
그런데 그 여파가 굉장했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되레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술에 절어 있을 땐 몰랐던 세상의 관심이라든지 모른 척했던 여러 생각과 감정이 한 번에 밀려들어 온 탓이다.
‘젠장, 어지러워.’
끼이이익-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풀어냈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자꾸만 숨통을 틀어막았다. 손이 달달 떨렸다.
“X발…….”
욕설을 중얼거리며 핸들로 머리를 박았다. 집으로 가서 죽은 듯 잠만 자고 싶었다. 아니면 술을 먹든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맑은 하늘, 수많은 차, 빽빽한 빌딩. 그야말로 사람 사는 도시였다. 하지만 내겐 시야에 담긴 풍경 하나하나가 모두 불편했다. 온 세상이 CCTV처럼 느껴졌다. 아니, 감옥일까.
계속 아니라고 부정해 왔으나 사실 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죄책감’. 아무리 외면하고 모른 척해 봐도 나는 지선우에 대한 원망 아래,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 혼자 멀쩡히 살아간다는 자각이 들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자기혐오가 나를 야금야금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