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역시 그대의 힘을, 나는 지키고 싶어.」
괴물의 눈이 번뜩이며 무언가의 다짐이 엿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며 놈을 조준했다. 안타깝게도 화염구를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벅찼다. 저 개자식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초조한 마음으로 온몸을 부들거리며 놈을 겨냥했을 때였다. 공격을 피하려는 괴물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막았다.
[까꿍~]
꽈아아악! 괴물의 허리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붙든 이는 피범벅을 한 은발이었다. 놈은 시뻘겋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미친놈처럼 웃어 댔다. 완벽히 복구되지 않은 몸은 보기 징그러웠지만 그런 기괴한 꼴로 잘도 괴물을 붙들고 있었다.
「더러운 놈이……!」
[으응, 나 한 번 죽였으니 너도 한 번 죽어야 계산이 맞지. 이 빌어먹을 새끼야! 하하!]
은발은 나를 보고 어서 던지라며 쾌활하게 웃어 댔다. 자칫하다간 같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시간 없어, 던지라고 얼간아!]
한 번 더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X발, 누가 얼간이야? 나는 이를 악문 채 괴물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화염구를 집어 던졌다.
번쩍!
콰아앙!
눈앞의 세상이 몇 초간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더니 곧 거대한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지선우도, 송여환도, 은발도 모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괴물을 제대로 죽인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는데.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즘 바람이 사라졌다.
“…….”
팔을 내리자 괴물이 있던 자리가 움푹 파여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하.”
끝이 났다.
“하, 허억, 젠장, 제길…… 하.”
나는 눈을 한 손으로 쓸어 내며 숨을 헐떡였다. 이겼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잃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송여환과 은발을 찾았다. 다행히 송여환은 저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시체라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질질 끌고 다가갔는데, 놀랍게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두 곳의 관통상. 장시간의 출혈.’
송여환의 상태를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그를 안아 올렸다. 몇 번이나 삐끗거렸지만 내 고통보단 녀석의 보호가 먼저였기에 이를 악물었다. 색색- 곧 꺼질 숨소리가 품 안에서 들려왔다.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미안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때 못한 사과를 결국 이렇게 했다. 송여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하는 건 의미가 없어. 전사를 모욕할 뿐이지.]
은발이 엉망진창의 꼴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살아 있었나. 나는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바퀴벌레 새끼.”
[칭잔이야? 그대로 돌려줄게.]
“살 만한가 보지.”
[글쎄,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큭, 엿 같긴 한데.]
놈이 씩 웃으며 피로 떡 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설마 우는 건 아니지?]
은발이 송여환을 가리키며 고개를 까딱였다.
“…….”
[적당히 묻어 줘. 너랑 난 남은 치정 싸움 벌여야 하니까. 바쁘다고?]
짧았으나 낮과 밤을 함께했던 사람인데도 놈은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작은 안타까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송여환을 위해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니까. 똑같이 사회화가 덜 된 사이코패스 주제에 누굴 욕하겠는가.
[뭐 해? 짐 덩이 들고 다닐 거야? 선우를 찾아야 하니까 빨리 묻어.]
“살아 있어.”
혹시나 은발이 송여환을 빼앗아 갈까 봐 그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퍽이나.]
놈은 픽 웃으며 몸에 묻은 먼지를 팡팡 털어 냈다.
[강아지는 나랑 달라. 그 정도 부상이면 죽는 게 당연하지. 너도 죽기 싫으면 안간힘 그만 쓰지 그래? 덜덜덜 떠는 꼴이 봐주기 엿 같은데.]
시큰둥한 목소리가 기분 나빴다. 말하는 내용은 틀리지 않았지만 별로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 송여환은 아직 죽지 않았다. 반박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죽지 않았다.
나는 부러 담담한 척 은발을 향해 말했다.
“살아 있어.”
목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며 차올랐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래그래, 명복을 빌어 줄게.]
“못 들었어? 숨 쉰다고.”
[왜 고집을 부려? 곧 죽을 거란 거 알잖아. 고른 땅이나 찾아 주는 게 더 현명할걸.]
“안 죽었어.”
은발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곤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 물빛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뭐야, 도련님.]
“…….”
[슬프구나? 생각보다 감성적이네.]
중얼거린 놈이 어깨를 으쓱였다.
개소리. 나는 미간을 찌푸리곤 송여환을 허겁지겁 추슬러 안았다. 미련 같은 건 아니다. 슬픈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이놈이 나랑 무슨 관계라고. 그저 이제껏 한 번도 져 주지 않은 게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한 번 정도는 모른 척 져 줄걸. 그때 키스도 제대로 사과할걸.’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색색 밭은 숨을 내쉬는 송여환을 보며 살릴 방법은 없을지 생각했다. 동시에 으깨져 너덜너덜한 손으로 송여환을 더욱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때, 저 멀리서 아주 작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얀?” ]
반응을 한 건 은발이었다. 나와 송여환을 무미건조하게 쳐다보던 놈이 빠른 속도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보이지 않는 꼬리가 보일 정도로 놈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아리아? 아리아! 젠장! 맞아. 나야, 아리아!]
놈은 사방을 향해 쩌렁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아리아-! 넓은 공간을 메아리가 가득 채웠다.
[나 여기 있어! 괜찮으니까 나와, 아리아! 나야, 제발!]
간절히 외치던 은발은 허억, 헉…… 숨을 몰아쉬며 돌아올 답을 기다리다 갑작스레 어느 한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양팔을 벌리고서 반달로 접은 눈과 씨익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같아 보였다.
[아리아!]
[ “자얀!” ]
포옥! 놈의 듬직한 품으로 작은 체구의 인영이 안겨 들었다. 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음에도 은발은 무리 없이 지선우, 아니, 가짜를 받아 냈다. 가짜를 끌어안은 은발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연신 빙글빙글 춤을 추듯 몸을 돌렸다.
[하아, 아리아. 너무 좋아. 으응, 착하게 기다린 내게 주는 선물인가?]
은발이 가짜의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은발과 가짜의 재회를 보고 있었다. 평소대로 지선우의 몸으로 헛짓하지 말고 떨어지라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지선우가 진짜가 아닌 가짜여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진심이었다. 지금은 지선우를 보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아무튼 가짜를 만난 건 다행이었다. 물어볼 게 산더미였으니까.
‘저 녀석…… 저번처럼 내 몸을 낫게 한 그 꿀이 어디 있는지 알겠지.’
동경의 지하 감옥에서 탈출했을 때 죽어 가던 나를 살려 놓은 그 던전. 내가 핵을 처치해 없애 버렸으나 그것과 비슷한 걸 알지도 모른다. 거기라면 송여환의 상처도 조금은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숨만 붙여 놓으면 된다. 혹시 후유증이 생긴다면 내가 책임져 주면 되고.
[ “자얀, 나를 위해 노력해 주었구나.” ]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송여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정말로 고마워.” ]
가까이에 있다면 좋을 텐데.
[ “그동안…….” ]
이 녀석을 치료한 후 돌아갈 방법에 대해 물어봐야지.
[ “수고 많았어.” ]
원래 몸을 찾을 거라 했으니까, 지선우 몸도 돌려주-
푸욱!
[ “잘자, 내 사랑.” ]
……어? 기이한 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정말 이상했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가짜가 은발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채 웃고 있는 걸까.
[ “아, 드디어 끝났네. 너무 오래 걸렸잖아.” ]
하아,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가짜가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얀 뺨에 묻은 동그란 핏자국을 엄지로 슥 쓸어 내며 예쁘게도 웃는다. 그러다 으읏- 뻐근한지 기지개를 펴기도 하는데, 그 이질감이 어마어마했다.
뭐지? 나는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봤다.
[쿨럭, 컥! 쿨럭, 쿨럭!]
은발의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내렸다. 놈은 멍한 표정으로 가짜를 쳐다보다 덜덜거리는 손으로 심장에 꽂힌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힘을 주면 줄수록 칼은 깊게 박혀 들어갈 뿐, 반대로 뽑힐 생각은 전혀 하질 않았다.
말이 없는 놈의 몸이 덜컥덜컥했다.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왜?]
겨우 내뱉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신체적 고통보단 정신적 충격이 더 커 보였다.
[ “힘 빼지 마. 그거 고대 유물이니까, 자얀 네가 아무리 힘을 줘도 빼낼 수 없-” ]
[왜?]
칼을 뽑는 걸 포기한 듯 손을 축 늘어뜨린 은발이 가짜의 말을 끊어 냈다. 놈은 죽는다는 사실보다 가짜가 칼을 박아 넣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해 보였다.
가짜는 무표정하게 은발을 내려다보며 한숨처럼 답했다.
[ “미안해.” ]
마지못해 뱉는 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