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널 업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느긋하게 손을 든 은발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놈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마치 구룡성채 같은 요새가 있었다. 낡고 거대한 건물들이 한데 얽혀 밀집해 우중충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겨 대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노을조차 그 우울한 기운을 포용하진 못했다.
은발은 나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동경이다.]
* * *
자얀은 낙유성을 보며 지금까지의 시간을 떠올렸다. 맨 처음은…… 그래, 저 갈색 강아지가 피투성이의 도련님을 안고 달려왔을 때부터다.
어디서 얻어터지고 온 건지 대가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진 도련님과 그보다 더 창백한 안색으로 손을 덜덜 떠는 강아지. 워낙 시끄럽게 굴어 잠에서 깨어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발, 제발!’
갈색 강아지가 도련님의 머리를 지혈하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꼴이 제법 재밌었다. 일단 그래도 아리아가 희망이라 부르는 존재기에 죽으면 곤란해서 뭐라도 도울까 싶었는데, 문득 있어야 할 꼬맹이가 없어진 데 초점이 맞춰졌다.
순간 그는 어라? 싶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자얀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그들이 뛰어왔던, 그러니까 보초를 섰던 건물까지 단숨에 뛰어갔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선우, 그 망할 게 또 사라진 거다.
‘[하아, 하…… 선우야. 지선우!]’
현실을 부정하듯 웃으며 크게 외쳤으나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나와. 어디 있니? 응?]’
자얀의 눈이 뒤집힌 건 그때부터였다. 아리아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가 사라졌다는 걸 인지했을 때부터.
‘[……선우.]’
‘[선우, 선우…… 지선우, 선우야!]’
‘[나와, 이 씹……!]’
분노한 그의 눈동자는 마치 피를 한껏 맛본 짐승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이를 악문 자얀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이봐, 작은 꼬마는 어디 있지?]’
기절한 낙유성을 향해 자얀이 물었다. 답이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기대를 하는 건지, 빨리 대답하라며 말도 안 되는 재촉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답지 않게 초조한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입술을 마구 질겅거리고 손가락을 정신 사납게 까딱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낙유성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대답하라고 보챘다.
같은 장소에 있으나 자얀과 송여환은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맥박 체크하고, 체온, ……하, 떨지 마. 송여환 이 새끼야. 제발, 침착해. 침착해.’
송여환이 혼자 중얼거리며 낙유성을 치료하자, 자얀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염병 떨지 말고 일어나!]’
자얀은 입꼬리가 굳어 가는 걸 느꼈다. 여유를 잃은 기분은 오랜만이었으나 여전히 불쾌하고 낯설었다. 자얀은 손을 뻗어 낙유성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환자고 나발이고, 아리아를 영영 못 볼지도 모르는 상황에 눈이 돌아 버렸다.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 하하, ……X팔. 이 개고생을 하는 이유가 뭔데……. 응?]’
짜악! 자얀은 머뭇거림 없이 그대로 낙유성의 뺨을 후려쳤다. 축 늘어진 몸이 크게 흔들렸다.
‘[눈 떠. 당장 일어나서 망할 꼬마 녀석이 어디로 간 건지 말해. 그래야 내가 뭘 할지 정할 거 아냐.]’
내뱉는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매우 거칠었다. 능력도 좋은 새끼가 왜 그 망할 꼬마 하나를 놓치냔 말이다. 왜. 속에서부터 천불이 일었다. 아리아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 한 번 이루기 더럽게 힘들고 거지 같았다. 하나를 해내면 하나가 삐끗한다.
‘X발! 미친 새끼가 돌았나!’
자얀이 또 한 번 손을 휘두르려 들자 송여환이 팔목을 잡아챘다. 그의 입에선 어울리지 않는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유감스러운 건 자얀이 그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점 정도일까.
‘…….’
‘[…….]’
서로의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강한 힘의 충돌이 이어졌다. 둘 모두 색소가 옅은 눈동자였는데, 그 안에 담긴 살기만큼은 무엇보다 진했다. 짐승이 각각 성난 송곳니를 드러냈다.
‘놔. 두 번 말 안 해.’
‘[반항기야? 기분 X같으니까 알아서 처박혀 있어.]’
쓰러진 용을 사이에 둔 범과 범의 싸움이었다. 각자 본인의 소중한 것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시체라 해도 믿을 만큼 너덜너덜한 모습의 낙유성이 몸을 일으켰다. 피로 떡이 된 머리와 부들거리는 몸, 창백한 얼굴은 그가 한 번 죽었다 깨어난 게 아닌가 싶은 의문을 들게 했다.
낙유성은 초점 없는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자얀과 송여환을 쳐다봤다.
‘[아하…… 튼튼한 게 도를 넘는 군, 도련님.]’
자얀이 감탄을 빙자한 이죽거림을 날렸다.
‘[이제 사건을 좀 정리해 보자. 응? 돌아 버리기 직전이니까 말 좀 들어 줘, 아가.]’
‘…….’
‘[얘기해 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꼬마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말이야.]’
웃는 낯이었지만 그의 목줄은 투박하게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유성은 엉뚱한 대답을 꺼냈다.
‘힘을…… 줘.’
완벽한 동문서답. 바싹 마른 입술 새로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자얀이 당장 터질 풍선처럼 아슬아슬한 분노를 보이고 있었다면, 낙유성은 당장에라도 꺼질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자얀이란 남자는 겨우 그런 꼴을 했다고 쉽사리 동정해 줄 만큼 인간적이고 착해 빠진 사람이 아니었다.
‘[자꾸 개소리하지 말-]’
어이없는 대꾸에 자얀이 다시 한번 화를 내려던 찰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촉……. 삭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젖은 소리가 울렸다. 낙유성이 자얀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그는 목이 마른 들짐승처럼 거침없이 자얀의 입안을 탐했다. 젖은 살덩이가 얽히는 적나라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자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만큼은 범이 아닌 놀란 토끼 같았다.
‘[……하아, 읍……?]’
제 뺨을 한 손으로 쥐어 잡고 자연스럽게 입술을 포개는 애새끼 때문에 인생이란 시궁창에서 구르고 굴러, 한참 닳은 사내가 당황해 굳고 말았다. 본인의 능력답게 몸에 열이 많은 건지 유독 도톰하고 뜨거운 살덩이 하나가 자얀의 혀를 마구잡이로 농락했다.
반면, 두 사람의 키스를 본 송여환의 눈은 어느 만화에서나 볼 법한 조그만 콩알처럼 변해 버렸다.
‘끄어어억-?!’
그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퍽, 도 아닌 뻑 소리가 날 만큼 강한 힘으로 두 사람-정확히는 자얀-을 밀쳐 냈다. 그러곤 해괴한 표정으로 낙유성을 붙들었다.
‘나, 나, 나, 나랑은 실수라더니-!’
지금 와서 따질 건 아니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완벽한 수라장. 그중 제일 빠른 속도로 이성을 되찾은 건 자얀이었다.
‘[퉷, 이봐……. 지금은 네 혀 빨아 줄 생각 없는데?]’
자얀은 바닥으로 침을 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머리를 맞았다더니, 진짜 회까닥한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그가 낙유성의 뺨을 한 손으로 콱 쥐어 잡았다.
낙유성은 자얀의 손을 따라 순순히 고개를 움직였다. 그 모습에 자얀은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까칠한 놈이 순종적으로 구는 게 뭔가 간지럽고 싫었기 때문이다.
‘[싸구려 애교는 집어치워. 내가 원하는 건-]’
‘하아…… 제발, 부족해…….’
으르렁거리던 자얀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머리를 맞아서 미친 거야? 아니면 뭐, 발정기라도 있나?]’
자얀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린 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낙유성이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자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입안을 쪽쪽 빨아 대는 낙유성을 쳐다봤다.
작게 인상을 쓴 얼굴은 소년미가 남아 있었으나 선이 굵고 또렷해 꼬마와는 다른 예쁨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잘생겼다가 맞겠지만, 그에게는 예쁘든 잘생겼든 다 똑같은 표현이었다. 자신 말고는 전부 사내로 보지 않았으니까. 늘 우두머리만 하던 남자의 단순한 생각이었다.
자얀이 낙유성의 헛짓을 방치하고 있자, 송여환이 벌게진 얼굴로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놨다. 눈에 흙이, 아니, 자갈이 들어온대도 절대 내버려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진짜!’
송여환이 낙유성의 허리를 감싸 제 품에 가두자 자얀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엄지로 입술을 닦아 냈다. 그러곤 하,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강아지야.]’
‘이이쒸-! 한쪽이 모럴이 없으면 다른 한쪽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이거 영 상태가 맛이 간 거 같지 않아?]’
자얀이 고갯짓으로 낙유성을 가리켜 말했지만,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송여환은 알아듣지 못한 채 제 할 말만 빽빽 소리쳤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의미 없는 말씨름을 하던 중 낙유성이 이번엔 송여환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 어? 뭐, 뭐, 나…… 나도 해?’
삑사리를 터뜨리며 하지 말라고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어 봐도 적극적이지 않은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