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뜨끈한 무언가가 이마를 타고 내려온다. 아마, 피겠지.
“나한테서, 그 애를 빼앗고…… 내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서, 이따위, 흑…… 짓을, 으…… 내가, 나는…… 그 애한테 미안해서 어떡, 해…….”
내 얼굴로 지선우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진심, 흐윽…… 으로…… 널, 좋아했…… 는데…….”
그가 높이 손을 올렸다.
“……용서 못 해.”
‘야, 낙유성. 언제까지 드라마만 볼 거야. 나랑 놀아.’
“죽어 버려.”
‘사랑해. 유성아.’
눈가는 뜨거웠는데 어째선지 웃음만 나왔다. 문득 ‘아, 이제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뭘 했던 걸까? 겨우 이런 결말을 맞으려 당신을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을 받아들였던 게 아닌데. ……정말, 아니었는데.
내 다짐이, 각오가, 추억이, 사랑이, 전부 부정당했다.
“죽어! 죽어서 사죄해!”
뻐억! 끝내 또 한 번의 충격이 내게 가해졌다.
* * *
낙유성과 보초 교대를 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와서도 잠은 오지 않았다. 익숙해지지 않는 노숙 때문만은 아닐 거다. 도련님처럼 대접받고 살아왔으나 송여환은 생각 이상으로 털털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런 털털한 인간인 그가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당연하다는 듯 낙유성을 따라간 한 사람 때문이다.
송여환은 아닌 척 비어 있는 자리를 흘끔거리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네!’
이젠 억울할 지경이다. 신경 쓰지 말자 되뇌어 봐도 빌어먹을 머리통에선 두 사람이 홀딱 벗은 채로 19세 미만은 볼 수 없는 한 편의 영화를 찍어 대었다. 와중 낙유성의 나체만 유독 화질 좋게 재생되고 있다는 건 비밀이다.
송여환은 멋쩍은 듯 쓱 웃었지만 음흉한 눈동자는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낙유성이 본다면 질색을 할 얼굴이었다.
아무튼 낙유성과 별로 좋지 않은-굳이 따지자면 머릿속에서 픽셀이 깨진-상태의 지선우를 가지고 애먼 상상을 하던 송여환은 불쑥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암 나, 누가 뭐, 질투 난데? 난 그냥 보초를 잘 서야 모두가 안전한 거니까 이러는 거지.’
절대 둘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이건 오랜 시간 팀의 책임자를 해 온 습관일 뿐이다. 그는 좀생이 같은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 냈다.
“큼…….”
송여환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자얀에게로 슥 향했다. 자얀은 잠든 듯 눈을 감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숙면을 확인하자마자 송여환은 슬슬슬 걸음을 옮겼다. 이름하여 ‘이- 세계의 연애 단속반’이다. 낙유성과 지선우를 방해할 생각에 헤실헤실 웃음까지 샜다.
‘앗, 차거, 차거!’
뛰어가는 뒷모습은 억센 빗물을 맞으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아오, 추워!”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막 도착한 건물에서 송여환은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뭐, 당연히 우산 없이 비를 맞았으니 느낄 수 있는 한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젖은 털을 푸르르 털어 내는 개처럼 갈색 머리카락을 좌우로 흔들어 물기를 없앴다. 그러곤 부러 기척을 내며 계단을 밟았다.
텅, 텅, 텅-! 막상 눈앞에서 흘레붙는 모습을 보면 혈압이 오를 거 같긴 했지만 그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니 잘 참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목표는 둘을 떼어 놓는, 아니…… 큼, 보초를 잘 서라며 잔소리를 하는 거였으니까 말이다.
텅-! 깜짝 놀랄 두 사람을 기대하며 마지막 계단 한 칸을 성큼 올랐다.
쏴아아아- 비는 여전히 매섭게 내렸고,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소름 끼치는 침묵이 흘렀다.
“……농담이지?”
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꽤 크게 고인 피 웅덩이. 그리고…… 그 옆에 붉은 웅덩이의 주인이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플 정도로 시끄럽던 빗소리가 머릿속에서 도각도각도각 이상한 소리로 변했다. 그러다 점점 귀가 먹먹해진 순간.
─낙유성!! 우렛소리 같은 절규가 검은 밤을 뒤흔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처참한 광경을 본 것이 이로써 벌써 두 번째다. 송여환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군가 본다면 흠칫 몸을 떨 만큼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새카맣게 칠해져, 표정이랄 게 없을 정도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표현의 한계를 넘었다. 그는 ‘좌절’ 그 자체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아아, 아…….”
덜덜거리는 손이 낙유성의 뺨을 매만졌다.
“안 돼, 안 돼……. 낙유성, 유성아. 형…….”
계속 불러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몸이 너무 차가웠다. 비에 젖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송여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멍청한 새끼, 지금 이렇게 등신 머저리처럼 울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상황을 판단해. 빠르게 조치를 취하라고! 형 죽게 놔둘 거야?’
“안 돼. 안 돼, 절대로 안 되지.”
자문자답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킨 송여환은 머뭇거림 없이 낙유성을 안아 들었다. 찰박찰박, 다급한 발소리가 반복해 울렸다.
그렇게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는 문득 이곳에 낙유성 말고 지선우도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낙유성이 이 정도로 당했다는 건 지선우 역시 온전치 못하다는 걸 의미한다.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으나 지선우는 보이지 않았다.
‘납치인가?’
그와의 사이가 어찌 되었든 위험하다면 구조해야 하는 게 맞다. 특히나 그는 아무런 힘도 없는 가이드니까. 그래, 그래야 하는데. ……에스퍼인 자신이 가이드인 지선우를 보호해야 하는 건데.
“……미안.”
송여환이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미안해.”
찰박, 찰박! 발소리에 미련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해, 형. 조금만 버텨 줘. 제발.”
품에 안긴 유성을 향한 말인지, 어디론가 끌려갔을 선우를 향한 말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송여환은 뒤돌아보지 않고 천둥과 폭우를 뚫고 내달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도덕적 가치관이나 대의 따위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송여환은 스스로의 정의를 외면하면서도 지키고 싶은 쪽을 택했다.
* * *
‘안녕. 너 내 이름 알아?’
꺼져. 난 가이딩 같은 거 필요 없어.
‘너 탕수육 좋아해? 나 지인짜! 맛있는 곳 아는데.’
너 뭔데 자꾸 따라다녀. 꺼지라고 한 거 벌써 잊었어? 너 돌대가리야?
‘아플 거면 같이 아파. 그러라고 있는 거야, 나는!’
……뭐, 뭐 왜 울고 그래.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쟤네가 A급 에스퍼였다고? 어쩌라고! 널 욕하고 있잖아!’
……네 안전이나 챙겨. 난 그게 더 걱정되니까.
‘유성아, 이거 봐. 매칭 파트너끼리 하는 커플 템이래.’
유치해. ……아, 알았어. 그런 표정 짓지 마. 줘 봐.
‘웬 꽃이야? 응? 아하하하! 벌써 우리 기념일이야?’
……웃지 마. 나만 들떠서, 바보 같으니까.
‘양말 제대로 벗으랬지. 알람 좀 한 번에 들으면 안 돼? 샤워도-!’
잔소리 좀 그만해. 알겠으니- 아! 아파. 아프다고! 네가 에스퍼냐? 힘이 무슨 오우거- 악!
‘왜 웃냐고? 당연하지! 내 에스퍼가 협회 랭킹 연속 1위를 하고 있는데. 자랑스러운 게 당연하잖아.’
……우리 부모님보다 좋아하네.
‘뭐야, 뜬금없이 웬 레스토랑? 여기 되게 비싼 곳 아니야?’
……그, 우리 이제…… 내가…… 좀 더 제대로…… 할 말이 있는데…….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가 아니라, 낙유성과 지선우로 이어져서…… 나와 평생을 함께해 주면 안 될까?
‘……큭, 크, 아하하! 뭐야. 완전 웃겨. 반지이? 반지 봐, 아학학학! 야. 무슨 돌 반지냐?’
짜증 나, 지선우.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장난치지 마.
‘웃긴 걸 어떡하냐? 어울리지도 않게 머리까지 세팅하고 와서는…….’
만지지 마.
‘너 이거 아주머니한테 물어본 거지? 아하학! 아저씨 보쌈하셔서 너까지 얻어 냈다고 나한테 그렇게 자랑하셨잖아. 흐흐, 역시 로맨티시스트의 아들이야?’
고백 날에 분위기 잡치게 부모님 연애사까지 들어야 해? 아, 됐어. 취소.
‘정말 취소?’
뭐.
‘다시 고백해. 그럼 받아 줄게.’
……치사해.
‘어허. 안 해? 흐음, 그으래. 싫음 말아라.’
아, 좋아한다고. 많이, 좋아한다고 지선우. 네 생각보다 많이…… 내가 너를.
‘용서 못 해.’
‘죽어 버려. 낙유성.’
‘죽어. 죽어서 사죄해!’
“……허억!”
큰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축축하게 젖은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건 수척해진 모습의 송여환. 놈은 잠시 두 눈을 크게 뜨다 곧 부서져 내리는 햇살처럼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부러 느리게 재생시킨 영상처럼 놈의 모습이 천천히 시야에 박혀 들어왔다.
“안녕. 낙유성.”
잔뜩 쉰 목소리로 전하는 싱거운 아침 인사. 나는 뭐가 뭔지 몰라 느릿하게 두 눈만 껌뻑였다. 그때 뺨을 툭 치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저놈에게 감사해.]
은발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의 등 뒤로 찬란한 주홍빛 노을이 내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유독 더 반짝거렸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