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45)화 (45/115)

45화.

“아오, 다리야! 오늘은 여기서 쉴까?”

여러 폐건물이 무너지고 쌓여 마치 하나의 거대한 동굴처럼 만들어진 장소. 네 사람은 그곳을 새로운 베이스캠프로 정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 물이 없어 목을 축이거나 몸을 씻을 수는 없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이거 없다, 저거 없다, 불평을 하는 건 그저 투정일 뿐이니까.

잠시 후, 낙유성을 포함한 모두가 각자 자리를 잡고 막 눈을 붙일까 하던 찰나였다. 톡…… 토독. 톡……. 거짓말처럼 작은 빗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쏴아아아-! 거대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앗! 비다!”

신이 나서 입구로 달려가는 지선우.

“먹어도 되나 모르겠네. 이걸로 물 받아도 되나?”

빈 냄비와 그릇을 들고 중얼거리는 송여환.

[비라니 운이 좋군.]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자얀.

‘비…….’

불안한 건 낙유성 한 명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절로 지선우 쪽으로 향했다.

‘이제야 다시 사이가 좋아졌는데 설마 비 때문에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건 아니겠지? 그 개 같은 ‘운명’을 또 떠올리면 안 되는데.’

초조한 낙유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선우의 표정은 밝았고, 딱히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괜찮은 거겠지?’

낙유성은 비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고 와아, 소리를 내는 지선우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형에게 상처받을 일은 없겠지? 하고 말이다. 틱, 틱- 초조함으로 뜯어낸 거스러미 사이, 피가 배어나는지도 모르고.

* * *

완벽한 보름달이 뜬 밤. 비는 여전히 매서운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꼭 한 맺힌 구슬픈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은발과 송여환 다음으로 보초를 서게 됐다. 잠시 붙였던 눈을 떠 베이스캠프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비를 막아 줄 천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피곤해.’

젖은 머리를 털며 한숨 아닌 한숨을 뱉어 냈다. 주변 공기는 차갑고 눅눅했다.

회색빛의 무너진 세상은 괜히 기분을 음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마음은 초조했지만…… 그렇기에 현재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던전을 깨고, 형을 지켜 내며, 같이 돌아가서, 다시 함께하는 미래를 그린다.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래, 멍청할 정도로 지선우만 생각했다. 첫사랑이자 현, 그리고 미래까지 함께할, 내 의지로 선택한 나의 단 한 사람.

“선우…….”

“왜 불러?”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자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다가오고 있는 지선우가 보였다.

“귀신이라도 봤어?”

나를 보며 지선우가 어깨를 으쓱인다. 묻는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뭐야.”

“뭐긴 뭐야. 야, 너야말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불러도 몰라?”

“……그냥.”

“……싱겁긴.”

지선우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작은 사탕이었다.

“여환이 가방 구석에서 발견했지롱. 자, 옜다.”

“비도 오는데 이거 주려고 왔어? 됐다. 너나 먹어.”

“너 여기서 밥도 잘 안 먹으면서? 받으시고요, 당 충전이라도 하세요. 그래야 날 지켜 주지?”

“뻔뻔하긴.”

“히히.”

지선우가 억지로 사탕을 쥐여 줬다. 나는 손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입꼬리를 슥 올렸다. 기억이 있든 없든 사람 챙기는 거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나.

“귀엽게 굴지 마.”

가볍게 웃으며 뺨을 툭 건드리자 지선우가 새치름한 얼굴을 했다.

“내가 연상이라는 거 알지?”

“내가 연하라는 거 알지?”

“야!”

“하하.”

반응이 재밌어서 자꾸만 장난을 쳐 댔다. 지선우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반격하더니 문득 내 어깨로 고개를 기대 왔다. 내려다본 귓바퀴가 붉었다.

“저기, 유성아.”

“응?”

“나 너 좋아해.”

갑작스러운 고백에 잠시 목이 탔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알아. 나도 형 좋아해.”

“근데 나한테는…… 너도 알다시피 다른 짝이 있어.”

지선우가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어. 알아.”

“…….”

“…….”

“……걔랑 헤어질게.”

“뭐?”

순간 나도 모르게 삑사리가 났다. 지선우가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를 뤙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런 ‘뤙’과 헤어지고 이쪽의 ‘나’와 연애를 하겠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솔직히 자신은 없어. 뤙 얼굴 보면 흔들릴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내 마음을 따르고 싶어. 여기 와서 기댈 사람이 너뿐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응, 그래서 너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의 나는 네가 너무 좋아. 뤙만큼.”

“…….”

“이런 나는 안 돼?”

안 될 리가 없잖아. 내가 누구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건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지선우를 꽉 끌어안았다. 무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선우 역시 나를 마주 안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우리는 서로를 또 한 번 품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마주 안은 타인의 온기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쾅! 땅이 작게 진동하더니 전갈을 닮은 몬스터 하나가 천둥과 함께 나타났다.

“아, 엇!”

“괜찮아. 피해 있어.”

휘청이는 지선우를 바로 잡아 줬다. 딱히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나는 간단히 해결하고 오겠다며 지선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몬스터를 향해 걸어갔다.

화륵, 손안에서 작은 불꽃이 만들어졌다. 쏟아지는 빗물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몬스터는 생각보다 더 쉽게 잡혔다. 나는 가뿐히 상황을 정리한 후, 지선우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손을 탈탈 털며 별거 아니었다고 말을 전하는데 지선우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지선우?”

아까까지만 해도 걱정 어린 눈빛이던 지선우가 지금은 창백히 질린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

바짝 충혈된 눈동자는 어째선지 약간의 소름까지 돋았다.

“……비, 불꽃…….”

혼란스러워 보이는 지선우가 웅얼거리며 말을 뱉었다.

“그래, 비.”

“형?”

“불꽃…….”

“지선우? 지선우, 괜찮은 거야?”

왜 그러는 거지? 혹시 싸우는 게 무서웠나? 심상치 않아 보여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불꽃, 아악!”

짜악! 그가 내 손을 거세게 쳐 냈다. 지선우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더니 곧 하, 하하 짧게 끊기는 웃음소리까지 흘렸다.

“형?”

“왜……. 그래, 아, 왜…… 왜! ……왜 이상하다고 생각을 못 했을까.”

“선-”

“왜 죽였어?”

내뱉는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내리는 비처럼 우중충하고 차가운 목소리. 나는 지선우의 질문에 어떤 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뭐지? 왜 죽였냐니, 뭘? 설마 기억을 찾은 거야? 그대로 굳어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있으니 지선우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진짜구나.”

“아니, 형. 자, 잠깐만. 지금 어떻…… 어디까지 기억이 난-”

“네가 뤙을 죽였어. 네가 죽였어. 네가.”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피눈물이 난다던데,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 꼭 그랬다. 투명한 눈물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붉어 보였다. 지선우는 한참을 울다 결국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네가 나를 속이고.”

“형, 잠시만 내 말 좀-”

“누가 네 형이야!”

지선우가 내 멱살을 콱 잡았다.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와 손이 낯설었다.

“분명, 그 방에 같이 있었어……. 네가, 네가 뤙을 죽였어. 그 애가 뭘 잘못했다고…… 고문하고…… 윽, 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지선우가 갑작스레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찡그린 얼굴이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형!”

“손대지 마!”

헉헉 숨을 몰아쉰 지선우가 나를 노려본다.

“죽여, 헉…… 죽여 버릴 거야, 너! 뤙을, 윽…… 그 애를, 죽였어. 죽여서, 왜…… 읏!”

지선우의 기억이 무언가 이상하다. 아마 기억이 섞이며 돌아오고 있는 듯싶다.

나는 주저앉아 끙끙거리는 지선우에게 약을 찾아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란 말을 전했다. 분명 송여환이 가지고 있는 구급상자에 두통약도 있을 터. 지금은 나에 대한 분노보다 형의 안정이 먼저였다. 오해는 나중에 풀면 된다.

그리 생각한 나는 재빨리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뻐억!

“……?!”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강한 충격과 함께 몸이 휘청였다. 그리고 또 한 번 뻑!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억, 헉…… 너, 너…… 너! 너너너너!”

흐려지는 시야로 악에 받친 지선우가 보였다.

“죽여 버릴 거라고!”

그의 양손에는 꽤나 큰 크기의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어쩌면 부서진 건물의 파편일 수도 있다.

제대로 머리를 후려 맞았으나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축 늘어져 턱을 바르르 떨었다. 몸보다 마음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회복이 안 됐다. ……아니, 회복할 수가 없는 충격이었다.

지선우가 흥분한 채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내가 널 좋아한다 하니 얼마나 웃겼을까?”

나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게 아니라고, 형이 전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