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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44)화 (44/115)

44화.

“이 씹!”

들고 있던 땔감들을 바닥으로 던지며 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저렴한 도발에 넘어간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대 제대로 갈기지 않으면 이 화가 희석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은 내 격한 행동에도 능글능글 사람을 약 올려 댔다. 베- 혀를 내밀고, 눈을 반달로 히죽 접어 웃는다. 붉고 질척한 살덩어리가 유독 반질거렸다.

[꽤 진하던데, 네 구멍 맛.]

놈이 손가락으로 쭉 내민 혀를 가리켰다. 개 같은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퍽! 놈은 주먹에 얼굴을 가격당해 뒤로 나뒹굴면서도 와학학! 웃음을 터뜨려 댔다. 젠장, 정말로 죽여 버리고 싶다. 나는 쓰러진 놈의 가슴팍을 발로 짓밟고 목소리를 깔아 경고했다.

“일단 한 번 죽어라.”

[아아…… 이런 취향?]

바닥에 누워 가슴을 밟힌 채로도 놈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하, 농담인 줄 아네? 나는 입꼬리를 올리곤 한 손으로 불꽃을 피워 냈다. 잘 타는 쓰레기는 언제나 환영이지.

“계속 쪼개 봐.”

[아학, 아하하! 알겠어. 응? 알겠다고.]

놈이 내 다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무시하고 아예 반 죽여 놓을까 생각했지만…… 됐다. 가이딩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굳이 쓸데없는 일로 힘을 빼고 싶진 않아 다리를 치웠다. 열이 올랐던 머리가 빠르게 식어 갔다.

[성내지 마. 답답해서 장난 좀 쳐 본 거니까.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라고?]

몸을 일으킨 은발이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말이 장난이지 그냥 쌓인 심술을 풀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쓰레기 자식.

[오메가를 잡은 다음부터 영 진전이 없으니 속이 쓰려서 그렇지 뭐. 어서 아리아를 만나고 싶은데 말이야. 으응,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루라도 빠르게 돌아가고 싶은 거 아냐?]

놈이 한쪽 눈썹을 구기며 능글맞게 말했다. 실제로 오메가라는 괴물과 싸운 후 더 이상 어떤 던전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에 놈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솔직히 오메가를 찾은 건 정말 운이 좋았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강한 상대였지만 어쨌든 클리어했으니까. 그러나 ‘알파’ 역시 운 좋게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즉, 이 여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은발 새끼도 웃고 있지만, 속으론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거다. 우린 모두 각자의 뚜렷한 목표가 있으니까.

‘던전…….’

알파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나는 문득 ‘던전’이란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왜 이러는 거지?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모여들었다. 급한 소변을 참는 것처럼 발끝이 오그라들고 조마조마한, 이유 모를 긴장감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쿵, 가슴이 철렁였다.

나는 숨을 작게 헐떡이며 애써 내 상태를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이제 열넷.」’

분명 죽었을 오메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와 나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키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나와 있는 건 은발뿐이었다.

‘왜 이러는 거야.’

놈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 모두 괜찮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응? 이봐. 도련님?]

“……하아, 학, 허억.”

가슴에 큰 통증이 일어났다. 입술이 덜덜거렸고, 귀에선 삐- 긴 이명이 들려왔다.

‘「네 안구를 도려낼 거야. 혀를 깨물지 않도록 해야겠군.」’

‘「끓는 기름이다. 그래, 더 크게 벌려야지. 식도가 타들어 가는 고통은 생각보다 버티기 힘들거든.」’

‘「피가 쏠려? 이제 네 몸을 반으로 가를 거다. 마음껏 비명을 질러도 좋아. 그게 네게는 유일한 피난처일 테니까.」’

‘「살아 있는 채로 갉아 먹히는 건 어때? 네 허벅지까지 벌레가 우글우글하구나.」’

[이봐, 이봐! 야! 너 왜 그래.]

“하아, 그, 그…… 하으, 그만, 싫, 싫…… 오지 마. 아니, 아니야. 아니야.”

[어이. 야. 젠장, 이거 왜 이래?]

“하악, 학! 하, 으…… 으, 으으으!”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자꾸만 지선우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을 하는 악마가 다가와 웃는다.

나는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려 스스로를 스물세 번이나 버렸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섬뜩한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속이 메스꺼워져 헛구역질이 꺽꺽 올라왔다. 바들바들, 오한이라도 온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왼팔, 오른팔, 왼 다리, 오른 다리.」’

‘「사지가 찢겨 나갈 거다.」’

‘「마음껏 울도록 해.」’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제발, 하악, 하! 컥, 커억!”

[……이런, 빌어먹을.]

제대로 된 호흡을 하지 못해 숨이 끅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쫘악! 큰 마찰음이 팍 터져 울리며 눈앞에 별이 번쩍 튀었다.

“……아…….”

한쪽 뺨에서 후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자 내 멱살을 잡고 있는 은발이 보였다. 놈은 나를 빤히 보다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곤 말했다.

[이래서 야외에서 함부로 떡을 치면 안 돼. 쯧쯧. 무슨 병이 생길 줄 알고.]

그러더니 내 뺨을 한 대 더 짜악! 세게 후려쳤다.

“큭!”

[고개 바로 하고, 어금니에 힘줘. 잘못하면 이빨 나가.]

쫘악! 이번엔 놈이 반대쪽을 갈겼다. 시큰해진 코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은발은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가, 정신 차려야지. 벌써 망가지면 어떡해? 네가 해 줄 일이 아직 산더미인데.]

내 코 밑을 쓸어 내는 엄지가 무척이나 섬세했다. 놈은 재밌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으응, 뺨이 그새 부었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돌아온 정신을 부여잡았다. 예상치 못했던 나의 상태에 놀라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던전’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 지경이 되다니. ……겨우 그까짓 일 한 번 겪었다고.

“……후우.”

정신 차려, 낙유성. 나는 약해 빠진 스스로를 비난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러면 안 된다. 놈의 말대로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나 너한테 흔들려, 유성아.’

……내가 지켜야 해. 나는 피곤함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아, 손 놔……. 정신 들었으니까.”

다짐은 굳건해졌으나 기분은 밑바닥을 기었다.

* * *

[신기한 색이군. 냄새도 그렇고.]

“그쵸? 형님이 봐도 제 신세가 참 뭣 같죠?”

[너희 세계는 재밌어. 아리아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싶군. 아, 특히 핸드폰이라는 게 신기해.]

“하아……. 차라리 가이드로 발현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말 잘해 줄 텐데.”

보글보글 끓고 있는 카레를 보는 자얀의 눈이 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비록 카레의 재료는 괴물의 살덩이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우울한 표정의 송여환이 있었다. 그는 활활 불타오르는 장작더미를 쳐다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낙유성과 썸씽 아닌 썸씽이 있던 날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안 추워? 밤에 담요 네가 덮어도 돼.”

“됐어. 형 덮어. 난 몸에 열이 많아.”

‘그 담요 내 거거든?’

고작 키스 한 번으론 관계를 특정할 무언가를 만들 수 없는 건지, 자신을 대하는 낙유성의 태도는 어쩐 일인지 전보다 더 무뚝뚝하고 차가워졌다. 송여환은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지선우랑은 더욱 가까워졌으면서.

‘선우 형님, 기억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이미 커플이신데요? 송여환은 입을 삐죽 내밀고 속으로 그들을 한껏 비꼬았다. 그러다 다 익은 카레를 가득 퍼 네 그릇으로 나눠 담았다.

이제 이 괴물 고기에도 익숙해졌다. 그나마 가지고 온 소스들이 있어 요리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특히 낙유성은 비린 건 전혀 못 먹으니까.

‘아, 또 쟤 생각했어.’

으으윽! 송여환은 숨죽여 성질을 부렸다. 입이 오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쳇, 시선 한 번 안 주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아니, 아니지. 솔직히 예쁘긴 엄청 예쁘지. 아! 따지자면 섹시한 쪽인가.’

“먹어.”

송여환은 띠꺼운 표정으로 낙유성에게 카레를 내밀었다. 그런데 지선우가 두 사람 사이로 불쑥 들어와 그릇을 날름 채 갔다. 이이익-! 송여환의 표정이 씹다 버린 껌처럼 변했다.

“고마워.”

“쟤 준 건데요.”

“같이 먹을 거야.”

“형님 몫 따로 있어요.”

“그것도 같이 먹을 거야.”

“그럴 거면 그냥 다 같이 퍼먹지?”

“이게 카레지, 비빔밥이니?”

“비빔밥도 우리 관계보단 가지런할걸요?”

치지직 날 선 스파크 속 유독 신이 난 건 자얀뿐이었다. 이제껏 그가 아는 음식 중 노란 건 괴물들의 내장뿐이었는데, 이런 식의 맛있고 예쁜 노란색이 있다니!

[으응, 참 특이한 향이 나는군?]

자얀은 혼자 중얼거리며 괴물 고기 카레를 입에 쑤셔 넣느라 바빴다.

오직 낙유성만이 카레를 받지 못하고 지선우와 송여환 사이에서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좀 먹으면 안 될까.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성이 난 지선우의 등을 보며 분위기상 그냥 닥쳤다. 조그마한 게 한번 화를 내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까.

그렇게 소란스러운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네 사람은 또 한참을 걷고 걸어야 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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