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미안. 응? 미안해.”
“흑…… 왜, 왜? 네가 뭐가 미안해, 네가 뭐가아!”
“미안해.”
내 가슴팍과 얼굴을 마구 밀어 대는 지선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뤙 바오치오로 착각한다 해도, 결국 돌고 돌아 나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지선우가 사랑스럽다면 난 정말 미친 새끼가 맞는 거겠지.
“내가 실수했어. 응?”
“다정, 흐…… 다정하게 말하지 마. 네가 뭔데!”
“미안해. 용서해 줘.”
“뭘?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잘못했어. 형.”
“하지 마. 뤙인 것처럼 굴지 마……. 너는 아무것도, 나한테…… 나한테 아무 사람도…….”
“제발, 나 미워하지 마. 선우 형.”
내게서 벗어나려 바둥거리는 지선우를 잡고 그의 뺨에 입 맞췄다.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내 생각보다 형은 나를 많이 사랑했나 보다. 참을 수 없는 행복이 올라왔다.
쪽쪽쪽- 눈, 코, 입, 뺨 할 것 없이 입을 맞추자 지선우의 반항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뭔가를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
지선우가 내 품으로 고개를 기대며 입을 열었다.
“나 있잖아…….”
그의 목소리는 지쳐 보였다.
“흑, 나아…… 이럼 안 되는 거 아는데…….”
다시 또르르 작은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나 너한테 흔들려, 유성아.”
* * *
‘X같네.’
송여환은 눈앞에서 방실방실하고 있는 지선우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젯밤, 낙유성과 함께 사라졌던 저 빌어먹을 가이드는 그의 품에 달랑 안긴 채로 돌아왔다. 둘이 새벽 내내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건지 목과 어깨에 남은 붉은 자국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 실수다.’
“하! X바알.”
송여환은 하늘을 보며 경쾌하게 욕을 뱉었다. 본래 욕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게 또 된다.
“하핫, 촤암 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지랄하며 싸워도 커플은 커플인가 보다. 송여환은 가슴의 시큰함을 느끼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뭐, 어차피 고백이나 키스 한 번 갈긴다고 저 까칠한 놈과 연인 사이가 될 거란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크으으, 절로 눈물이 핑 고였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이쪽도…….”
송여환은 식량을 확인하고 있는 지선우에게로 다가갔다.
“형님.”
“아, 어. 어어…….”
대놓고 불편해하네. 이러면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기분이긴 한데. 송여환은 어깨를 으쓱이곤 지선우의 옆에 자리 잡았다.
“도와줄게요.”
심드렁히 말하자 지선우가 아니라며 손을 내젓는다.
“혼자 해도 충분하니까 걱정 말고 너 할 일 해도 돼.”
‘내가 그쪽 걱정을 왜 해?’
송여환은 지금 자신의 심사가 굉장히 뒤틀려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형이 이토록 얄밉게 보인 적은 맹세컨대…… 음, 그래. 몇 번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미운 적은 처음인데. 따지자면 저쪽이 정실이고, 내가…… 남첩이지.’
아니, 정확히는 남첩 후보라도 되고 싶은 엑스트라 1이었다. 제 처지가 쓸쓸해 송여환은 또 눈물이 찔끔 났다. 팀원들이 울보 찌질이라 놀려 대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송여환은 한숨을 쉬며 말을 뱉었다.
“하아, 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이런 곳에서.”
“…….”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지선우는 애써 송여환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바쁘게 손을 놀렸다. 송여환은 그런 지선우를 흘끔거리다 대뜸 한마디를 던졌다. 마치 ‘식사했어요?’ 같은 높낮이 없는 가벼운 물음이었는데, 그 뜻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걔랑 잤어요?”
“콜록!”
지선우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레들린 듯 기침을 크게 쏟아 냈다. 뽀얀 얼굴이 빨갛게 변하고 작은 등이 들썩인다. 낙유성이 봤다면 두 눈을 뒤집고 달려왔을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송여환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등 한 번을 두드려 주지 않았다.
“뭐, 뭐뭐-?”
“뭘 놀라요. 알아봐 달라고 달고 온 거 아냐?”
송여환이 목 부근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그제야 이해가 된 듯 지선우는 화들짝 놀라며 목을 손바닥으로 다급히 가렸다. 이미 다 봤는데? 송여환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잘해요? 쓰으, 잘할 거 같긴 하다. 키스도 잘하던데.”
“…….”
“형님 근데 그래도 되나 몰라? 저쪽에 있는 낙…… 아니, 파트너가 알면 어쩌려고 바람을 피워요.”
사실 바람은 아니지만, 어차피 다른 놈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송여환은 부러 지선우에게 상처 주는 말만 골라 뱉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현대 시대에서 잘 지내던 그때처럼.
그러나 눈이 차가웠다. 입꼬리는 다정하게 올라가 있었으나 시선이 매서웠다. 그 묘한 간극이 소름 끼칠 정도였다.
기실 지선우가 느끼기에 지금의 송여환은 사회화가 잘된 사이코나 인간의 가면을 쓴 뱀, 아니면 더러운 밑바닥을 가진 사이비 교주처럼 보였다. 실실거리며 사람 아픈 부분만 골라 찌르는 족속들 말이다.
소름이 돋은 팔뚝을 매만지며 지선우는 수치심에 물든 얼굴로 반격했다.
“……왜, 그런 걸 물어?”
“걱정되니까 그렇죠.”
거짓말. 지선우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다운 얼굴을 하든가.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누구 놀려? 사람을 등신으로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화가 났다는 걸 숨길 마음이 없는 건지. 아무리 봐도 후자인데.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고 있어야 하지?’
물론 현대 시대에서 가깝게 지내던 건 맞지만 둘은 친구라 부르기엔 애매한 동료 사이였다. 거기다 송여환은 파트너인 뤙을 매번 귀찮게 하던 사람이다. 아주 무례하게 말이다. 그런 사람이 뤙을 위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는 건 조금 선을 넘는 얘기가 아닐까?
‘그게 아니면 여환이도 유성이를 좋아하고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가슴 한구석에서 작은 불씨가 화르르 일었다.
“여환아.”
지선우가 바닥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그를 불렀다.
“왜 자꾸 시비 걸어?”
싸늘한 목소리에 송여환은 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너 뭐 돼? 이거냐.’
송여환은 머리를 긁적이곤 ‘음……’ 목을 울렸다.
“시비요? 나 시비 거는 거 아닌데.”
“장난치는 거 아니-”
“화내고 있는 거지.”
지선우의 말을 자르며 송여환은 굽혔던 다리를 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목덜미를 매만지며 하아, 개운한 숨을 뱉어 냈다.
“맞아요. 나 걔 좋아해. 그러니까 이번엔 형이 빠져요. 양보할 생각 없으니까.”
“걔랑 언제 그렇게 봤다고.”
고개를 팩 들어 올린 지선우가 송여환을 노려봤다. 물론 그래 봤자 약이 바짝 오른 다람쥐였지만.
하지만 사자는 토끼, 아니, 다람쥐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송여환은 최대한 열 받으라는 뜻으로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형이나 누나가 제 이런 표정을 볼 때면 참지 못하고 몽둥이를 쥐었으니 효과가 영 없는 건 아닐 테다.
“글쎄? 자격을 논하기엔 형 쪽도 수준 미달인 것 같고요.”
“송여환. 걔 에스퍼야.”
“와~ 더 좋지?”
“…….”
“…….”
두 사람은 서로를 여우라고 생각하며 팩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네가 나 쓰레기라 생각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 유성이랑 잤어. 그리고 아마 유성이도 나한테 호감 있고.”
지선우는 귀가 빨개진 채 악에 받쳐 말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현대에 있을 뤙에게 미안했지만, 그보단 지금 송여환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사실 어제 둘이 키스하던 모습만 생각하면 자꾸 열이 뻗쳐 어떻게든 갚아 주고 싶었다.
“그게 되~ 게 자랑스럽나 봐. 그거 자위 같은 거예요. 자위. 막말로 욕구 쌓이면 푸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난 에스펀데도 입술 비볐고, 그쪽은 가이드니까 꼴렸다로 치면 누가 더 진심이지?”
낙유성과 잤다는 지선우의 말에 송여환은 ‘아아악, 안 돼!’ 비명을 내지르는 속마음을 싹 숨기며 애써 여유로운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다행히도 지선우는 단단히 기분이 상한 듯싶었다. 모욕받은 얼굴로 그가 울컥해 소리쳤다.
“뭐? 야, 너 진짜…… 최악이다. 말조심해!”
“하다못해 개새끼도 제 밥그릇 건들면 무는데, 사람 새끼라고 다르겠습니까? 형님.”
“…….”
“댁이 꺼져. 내가 먼저 침 발랐어.”
두 사람은 서로를 여우가 아닌 개또라이라고 칭하기로 했다.
* * *
[어제 몸 좀 풀었나 보지?]
“헛소리할 거면 닥쳐.”
[으응, 그럼 냄새를 흘리고 다니면 안 되지. 아가. 너한테서 짝짓기를 한 냄새가 짙게 나는데?]
천박한 새끼. 나는 옆에서 히죽거리는 은발을 무시하며 땔감으로 쓸 만한 것들을 주워 담았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니 지선우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송여환을 끌고 오기엔…… 어제의 일이 조금 마음에 걸려 소거법으로 남은 녀석을 달고 온 건데 실수였다. 그냥 혼자 와야 했는데.
[이봐, 도련님. 나도 잘해. 고추도 크고. 이왕 놀 거면 좀 껴 주지?]
“미친 새끼.”
[으응, 와중에 떡치는 너보다야 내가 낫지 않겠어?]
“…….”
[그래서 앞은 걸레고, 뒤는 아다인가?]
놈이 가증스럽게 입꼬리를 올린다. 만약 기회만 된다면 정말 저 새끼의 대가리를 반으로 뚝 잘라 그 안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다. 대체 어떤 뇌를 가져야 저딴 말을 할 수 있는지.
[아하…… 대꾸 안 하시겠다? 그래 뭐, 따지자면 아다는 아니지. 혀라도 뚫은 건 뚫은 거니까. 너 맛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