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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42)화 (42/115)

42화.

다갈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놈의 손은 전체적으로 길고 하얬다. 손톱과 가까운 끝부분만 발긋한 게, 꼭 복숭아 향이 날 것처럼 생겨서 참 고왔다.

그러나 아무리 기생오라비 같대도 곳곳에서 사내새끼 특유의 냄새가 팍팍 풍겼다. 손바닥이 솥뚜껑처럼 큼지막하다거나 손등 위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핏줄 따위가 큰 예였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관심조차 없었을 부위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뭐?”

놈의 손을 훔쳐보느라 반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내가 호구 같냐고. 그래서 이러는 거 아니야?”

놈이 내게로 한 발짝 다가왔고, 동시에 나는 한 발짝 멀어졌다. 아랫배에서 자꾸만 느껴지는 미묘한 열감 섞인 간지러움에 주먹을 꽉 쥐었다. 놈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응, 맞아.”

내뱉는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시선을 빼앗았던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놈이 한 발 한 발 큼직하게 뻗어 거리를 좁혔다.

“잘 봤네. 나 형한테 호구 새끼 맞아. 앞으로도 그럴 자신이 있고.”

“야, 송여환.”

“근데 아무리 호구 새끼라도 나름의 선이 있거든?”

송여환이 다가올수록 알 수 없는 강한 에너지가 느껴졌고, 그것은 나를 아주 진득하게 자극했다. 나는 놈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놈의 몸을 제외하곤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계속, 자꾸만.

‘원해.’

놈을 원했다.

난생처음이었다, 이런 기운은. 바라보고 있자니 목덜미가 뜨거워지고 절로 침이 고인다. 또 멋대로 열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턱을 움찔하며 고개를 슥 돌렸다.

‘위험해.’

진짜로 위험했다. 놈을 계속 보고 있다간 다시 억지로 덮쳐 버릴 것만 같았다.

‘오지 마. X발, 오지 말라고!’

속으로 간절하게 놈과의 안녕을 바랄 때였다. 간신히 외면하고 있던 내게 놈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젠장,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나는 깜짝 놀라 허공으로 손을 휙 들어 올렸다. 본능적인 방어였다.

당장에라도 내려칠 기세로 들어 올렸건만, 송여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왜? 때리려고 든 거 아니야?”

오히려 홍조가 잔뜩 오른 한쪽 뺨을 내밀며 그가 젖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여우 같은 새끼가 아주 작정이라도 했는지 눈을 반달로 사르르 접는다. 가이드들 꼬시고 다닐 때부터 가벼운 건 알고 있었는데 씹, 비위도 좋지. 같은 에스퍼…… 그것도 그렇게 싫어하던 나를?

“때려, 형.”

“…….”

“기회 줄게. 아주 죽여 버려. 헛짓 못 하게.”

나는 치켜든 손을 부들거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래라면 나 죽이소, 하고 내민 놈의 면상을 원하는 대로 시원하게 죽사발 내놓았을 텐데. 젠장. 왜 안 되는 거냐고. 도저히 저 뺀질뺀질해 보이는 얼굴을 내려칠 수가 없었다.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관찰이라도 하듯 나를 빤히 보는 눈동자가 점점 더 깊어진다. 내가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놈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 갔다.

“……하, 차.”

혼자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린 송여환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했다. 숨소리가 내 것만 들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간질거리고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다 나온 것처럼 나른하고, 힘든 운동을 끝낸 다음 날처럼 몸 군데군데가 뻐근했다. 묘한 쾌감을 동반한 근육통이 느껴졌다. 덥고, 또 더웠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참, 누구 놀리나.”

“…….”

“그런 얼굴로 머뭇거리면…… 나보고 쓰레기 짓 하라는 거잖아, 형.”

송여환이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감싸고, 몸을 뒤로 밀치며, 천천히 입술을 삼키는 모든 과정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벽과 송여환 사이에 낀 나는 놈의 거친 입맞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싹오싹한 무언가가 발끝을 타고 허리, 등줄기, 그리고 머리끝까지 찌르르 올라왔다. 소변을 참듯 발가락이 움치고, 이내 말하기 민망한 그곳에 강한 자극이 왔다.

“읏, 응…….”

억눌린 신음이 신호탄이 된 양 놈은 조금씩 더 사나워졌다.

“하아, 하…… 입술 깨물, 지 마.”

“응…… 응, 그래, 그래요.”

혀, 시선, 숨결. 놈과 얽히지 않은 게 없었다. 송여환은 깊게 섞던 입을 떼어 내곤 내 입술과 턱에 연신 가벼운 키스를 날렸다. 그러더니 끝이 발긋한 손가락으로 내 허벅지 위를 피아노 치듯 가볍게 두드렸다. 은근한 손길이 야릇했다.

딱히 거부하지 않자 놈은 두드리던 손에 힘을 줘 내 허벅지를 갑작스레 휙 잡아당겼다. 놈과 나의 아랫도리가 더욱 가까이 맞닿았다. 묵직한 열감이 느껴진다. X발, 변태 새끼. 욕을 짓씹으면서도 나를 만지는 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나 잘해.”

송여환이 다정히 속삭였다.

‘……대 주고 다녔던 건가?’

하긴 가이드에게 안기는 에스퍼도 몇몇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쾌감이 말도 못 한다나 뭐라나. 나는 몽롱하게 생각하며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는 놈을 바라봤다. 멍청한 놈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고 있다. 어쩌면 좀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뺨, 빨갛다…….’

색소가 옅어 붉어진 피부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진 않았는데 참을 수가 없네……. 유성이 형, 나 사실…….”

키스는 더 안 하는 건가? 아쉬움이 들어 침만 꿀떡꿀떡 삼키고 있을 때였다. 우당탕! 꽤 큰 소리가 흐름을 뚝 끊었다. 재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잔뜩 얼어붙어 나와 송여환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지선우가 있었다.

“어……. 그게, 나는 두, 두 사람이 오지 않길래 호, 혹시 무슨 일이 더 있나 싶어서……. 그게…….”

많이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미안해! 두, 두 사람이 그런…… 사, 사이인 줄 내가 몰, 몰라서…… 방, 해를…….”

허둥지둥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던 지선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갑작스레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어…… 어?”

스스로도 그럴 줄 몰랐는지 화들짝 놀란다. 지선우는 황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 눈물을 닦아 냈다. 내뱉는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뭐, 야…… 흐, 읏…… 나, 응, 왜……. 흑, 아니! 아니, 하…… 흐으, 아닌데…….”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지선우는 빨개진 얼굴로 몸을 휙 돌렸다.

“미안해…….”

흐린 음성만을 남긴 그가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 꼴을 멍하니 보던 나는 여전히 내게 붙어 있던 송여환을 세게 밀치곤 지선우를 쫓아가려 했다. 가려 했는데…….

“가지 마.”

송여환이 내 손목을 세게 틀어잡았다.

“이대로 가면…… 내가 너무 비참할 것 같거든?”

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눈동자도 입꼬리도 마구 흔들리고 있다.

“……제발, 형.”

고개를 푹 숙이는 놈을 본 나는 잡혀 있던 손목을 단호히 뿌리쳤다.

“……이, ……하아, X발.”

가슴이 답답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다가도 결국 내가 저지른 일이라는 걸 알기에 울컥 올라온 분노의 화살은 과녁을 잃어 어디로도 날아가질 못했다. 나는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시선이 다시금 송여환에게로 향했다. ……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데. 도대체 나한테 뭘 기대하길래? 송여환의 기죽은 모습이 알 수 없는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고개 들어.”

나는 마른세수를 하곤 놈에게 말했다.

“내 실수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입안에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잠시 맴돌았지만 차마 전할 수는 없었다. 쓴 물을 삼키듯 사과를 구겨 넣고 몸을 돌렸다. 내겐 송여환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존재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놈을 두고 지선우를 쫓아 달렸다.

“……X발.”

등 뒤에서 사나운 욕설이 들려왔다. 젠장, 한 대 정돈 맞아 줄 걸 그랬나.

* * *

“지선우.”

타박타박 발소리만 들려왔다. ……조그만 게 뭐 저렇게 빠른 거지.

“지선우, 선우야, 형!”

‘형’ 소리에 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목을 조르는 무거운 침묵.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지선우…….”

그는 대꾸 없이 서서히 작은 등을 들썩거리다 곧 바닥으로 푹 주저앉았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나는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왜 울고 그래.”

“보, 흣…… 으엉, 헝…… 보지 마.”

어깨를 잡아 살살 흔들자 하지 말라며 내 손길을 거부한다.

“나도 내가 이상한 거 알아. 아는데……. 아는데…… 싫어! 싫단 말야, 허엉…… 흑, 으흐, 왜…… 왜애 여환이랑 흐으, ……키스해? 왜 해! 왜!”

지선우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랑 아무 상관 없는데!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해? 흐윽…… 으, 몰라. 전부 모르겠어! 뤙이 보고 싶은데, 나한테는 그 애가 있는데……! 왜, 흑…….”

고개를 푹 숙인 채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지선우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올라왔다. 그래, 내가 개새끼다.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거다. 형을 두고 왜 다른 새끼랑 입을 맞추었을까?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혀로 마른 입술만 축여 댔다.

“흐엉, 엉……! 미칠 거 같아, 몰라아, 모른다고!”

결국 자지러지며 울기 시작하는 지선우에 나는 황급히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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