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밤공기가 되게 차다, 여기.”
어서 돌아가라고, 단둘만 있으면 무섭지 않냐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랫배에서 강한 통증이 다시 느껴져 나는 이를 악물었다. 혹시나 지선우가 알아챌까 싶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다행히도 그런 내 상태를 모르는지 지선우는 뜸을 들이다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저번 일 말인데. 나 사실 조금 혼란스러워서.”
하지만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지? 꼭 몸속 장기가 멋대로 이리저리 구르는 것 같았다.
“네가 한 행동은 잘못된 게 맞아. 무섭기도 했어. 그런데 있잖아……. 웃기게도 싫지…… 않았어. 내가 왜 이럴까? 나한테는 뤙이 있는데. 너한테 흔들리면 안 되는 건데. ……내가 울었던 이유 말이야. 유성이 네가 그러는 게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그 순간 진심으로 거절하지 않은 내가 납득이 되지 않-”
“아, 으!”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뜨렸다.
“유성아?”
내 어깨를 잡아 오는 작은 손이 유독 뜨거웠다.
“큿…….”
“유, 유성아! 너 왜 그래. 유성아! 아. 야, 약을! 아니다, 애들 불러올게.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유성아!”
지선우가 무어라 소리를 치더니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사라졌다.
“젠장, 윽……!”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색색 가는 숨을 내쉬며 나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뒤틀었다. 차라리 누군가 내 배를 도려내 주었으면, 할 정도로 괴롭고 아팠다. 손과 발이 점점 차가워지고 몸이 덜덜덜 떨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한 시간이 지난 건지, 일 분이 지난 건지, 아니면 일 초인지. 고통에 휩쓸려 뭘 제대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악, 흐…….”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보인 건 지선우가 아니었다.
“낙유성!”
흩날리는 갈색의 머리카락, 조금 더 짙은 색의 눈동자, 그리고 느껴지는…… 꽉 차오른, 살이 아주 단단히 오른 것처럼 입맛을 자극하는 에스퍼의 강한 ‘기운’.
“하악, 학……!”
먹고 싶다. 먹고 싶어. 먹을래. 배가 고프다. 목이 말라. 아프다. 저 녀석으로.
“저거…… 로…….”
‘저거면 돼.’
‘저거면 돼.’
‘저거면 돼.’
‘저거면 돼.’
‘저거면 돼.’
미친 듯한 갈증.
‘제발.’
참을 수 없는 허기.
‘내 안을…….’
손가락과 발가락이 곱아드는 외로운 추위.
‘……가득 채워 줘.’
꿀꺽, 피 냄새를 맡은 굶주린 짐승처럼 멈출 수 없는 본능이 깨어났다. 가까이서 풍기는 달큼한 냄새가 자꾸만 나를 자극했다. 그것이 식욕인지, 욕정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당장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낙유성! 정신 차려 봐. 너 괜찮- 큭!”
쿵!
울음을 토해 낼 때까지 핥고, 뜯고, 잔뜩 괴롭혀서 그 피부에 나를 새기고 싶었다. 영원히, 내 것으로.
* * *
낙유성이 순식간에 송여환을 제압했다. 비슷한 체구의 사내를 바닥으로 무자비하게 내리꽂은 채 우위를 선점했다.
“아오, 골이야…….”
송여환은 찡 울리는 고통에 찔끔 눈물을 흘렸다. 얕게 인상을 쓴 그가 자신을 올라탄 낙유성을 쳐다봤다. 괜히 성질 안 좋은데 건드린 건가 싶어 살살 달래 보려 손을 뻗었지만, 그마저도 힘으로 눌리고 말았다.
‘와, 장난 아니네.’
밀어내 보려 해도 팔뚝이 부들거릴 뿐 낙유성은 꼼짝을 않았다.
‘내가 또 기 세고 힘센 사람이 이상형인 건 어찌 알고…….’
이걸 이렇게 갖다 붙일 수도 있나 싶을 만큼 억지였으나 송여환은 이 상황마저 로맨틱하다 생각했다.
반대로 낙유성의 시선은 꽤나 서늘했다. 아니, 어딘가 약간 초점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두려워 실금했을 정도로 굉장한 압박감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누워 있는 상대는 송여환이었다.
“혹시 늦게 와서 화났어? 너 아프대서 약 가지고 왔는데.”
송여환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말없이 쳐다보는 낙유성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당장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창백한 안색인데, 양 손목이 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웃음기를 빼고 힘을 줘 봐도 이길 수가 없었다. 평소 낙유성이 얼마나 봐준 건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빈속에 라면이 너무 매웠나 보다. 너 분 풀리게 한 대 치고 풀어 줘. 빨리 약 먹어야 해.”
바닥에 누워 있던 송여환이 바르작거리며 멋쩍게 웃을 때였다.
“읍!”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낙유성이, 그 천하의 낙유성이, 지선우의 걔가, 먼저 입을 맞춰 왔다. 그것도 송여환에게.
“하아, 잠, 하…… 나 선우 형 아니, 으흡!”
송여환이 당황해 고개를 비틀자 낙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마치 거절은 없다는 양 그의 턱을 한 손으로 붙든 채 다시금 입을 맞췄다.
“읍, 읏…… 하!”
물기 어린 마찰음, 끈적하게 얽히는 숨. 꽤나 거친 입맞춤이 지속됐다. 송여환이 숨 좀 쉬자며 조금만 밀어내도 낙유성은 득달같이 달라붙어 그의 입술을 빨고 또 빨아 댔다. 숨 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는 강압적인 키스였다.
바닥으로 흩어진 다갈색의 머리카락과 발긋하게 물든 밀빛 피부. 억지로 범해진 도톰한 입술과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 듣기 좋은 저음의 신음.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아래, 부드러운 고동색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갔다. 송여환의 고운 얼굴은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송여환이 침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열어 낮게 그르렁댔다.
“……네가 먼저 한 거다. 이거.”
이번엔 송여환이 낙유성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까칠한 놈이 순순히 끌려와 입술을 대는 게 만족스러웠다.
물론 평소 망상해 왔던 낙유성과의 키스 중 이런 건 없었다. 없었지만, 그토록 바라고 바라 왔던 차려진 밥상을 거절할 등신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새낀 고자이거나 아니면 고자가 될 예정이거나 둘 중 하나일 터.
사실 송여환은 키스 정도로 여유를 잃을 만큼 어리숙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어렸으나 순진하지 않았고, 다정했으나 본인의 욕망을 채울 줄 알았다. 무엇보다 주위에는 늘 그를 가지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넘쳐났다.
그러니 고작 키스 정도로 여유를 잃은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정말 첫사랑이란 건 위험하구나.’
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있었으나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건 낙유성이 처음이었다. 건방지지만 그랬다.
송여환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달콤한 침입자가 조금 더 편히 움직일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간지럽히는 스킬이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웃음이 났다.
‘리드 당해 보긴 처음인데, 우리 유성이 형 키스 잘하네.’
두툼한 혀가 빈틈없이 들어차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해 왔지만 싫지 않았다. 이대로 질식해 죽는다 해도 눈을 뜨면 천국일 것 같았다.
“하아, ……으음.”
‘……귀여워.’
송여환의 얼굴은 발긋하게 익어 그의 흥분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약간의 물기 어린 눈매가 특히나 그랬다. 촉촉하게 젖어 반달로 접히는 라인이 퍽 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낙유성은 꽤 집요한 눈길로 송여환을 훑었다. 촉, 입술이 떨어지고 기다란 은실이 두 사람 사이로 주욱 늘어졌다. 하아…… 더운 숨결이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흐으, 끝?”
송여환이 달빛 아래서 한껏 발정 난 여우처럼 바르작거렸다.
* * *
‘끝?’
달아오른 목소리가 뿌옇던 정신을 깨웠다. ……왜 이 새끼가 내 아래에 있는 거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순간의 짧은 기억 상실을 겪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고 눈앞은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아랫배의 은근한 열감으로 인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금세 기억해 냈다.
“이런, X발!”
나는 혐오감으로 얼굴을 와락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내가 왜 이딴 역겨운 짓을 저지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 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가린 채 여전히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놈을 쳐다봤다.
놈은 허둥지둥하는 나를 보더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해진 녀석의 머리카락이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하아, 뭐야. 얌전히 당해 주는 건 취향이 아냐?”
“씹, 퉷-!”
나는 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입안에서 놈의 징그러운 혀가 여전히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불로 혀를 지져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닦아 내자 송여환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곤 픽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이 상해 보였다.
“당겼다…… 밀었다……. 바쁘네, 우리 유성이.”
나른한 눈길로 나를 훑으며 흘리듯 중얼거리는 모습이 퍽 낯설었다. 늘 가볍기만 하던 놈이 나름 무게를 잡는 것 같아 우습기도 했지만 묘하게 긴장이 됐다. 완력으로 완벽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약간의 주눅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곳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내가 호구 같아?”
놈이 부스스한 머리를 마구 흩뜨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