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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40)화 (40/115)

40화.

‘분명 선우 형님 지키겠다고 무리했겠지.’

안 봐도 뻔했다. 지선우 하면 껌뻑 죽는 놈이니까.

‘나라면…… 내가 지켜 줄 텐데.’

괜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송여환은 시커먼 속내를 감추기 위해 부러 장난을 쳐 댔다.

“나 완전 잘 끓이지 않냐? 장가와도 돼. 아니면 내가 갈까?”

“……까불지 마.”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우물거리던 낙유성이 미간을 팍 찌푸린다. 송여환은 그 모습에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덩치도, 성격도, 산군 중의 산군 같은 놈을 보고 이토록 귀엽다 느끼니 이것도 중증이라면 중증이었다.

현대에서는 아무래도 ‘지선우’라는 넘지 못할 벽에 위축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낙유성이 그의 옆에서 행복해 보이니 적극적으로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좀 다르다. 그 괴물에게 죽을 뻔했을 때 다짐하지 않았는가. 살아남는다면 그땐 죽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너 이제 큰일 났다.”

송여환은 턱을 괸 채 낙유성이 듣지 못할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 햇살 같은 웃음이 부드럽게 퍼졌다.

* * *

“와아! 행복했다!”

지선우가 풀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오랜만에 먹은 라면이 정말 좋았는지 하얀 뺨이 복숭아처럼 발긋했다.

“양은 좀 적었는데, 그래도 그게 어디야.”

뒤이은 말에 나는 약간 양심이 찔렸다. 아까 괜히 먼저 한 입 한 게 신경 쓰였다.

“돌아가면 라면 파티해요, 형님.”

하지만 송여환은 내가 몰래 먹은 걸 얘기할 생각이 없는 듯 특유의 웃음을 짓고서 지선우랑 깔깔거리기 바빠 보였다.

[으음, 신기한 음식이었어. 태어나서 처음 먹어 봐. 꽤나 재밌는 식감이고? 꼬불꼬불.]

은발도 그 사이에 껴 라면에 대한 감상을 늘어놨다. ‘면’이라는 걸 처음 본다며 주절거리는 얼굴이 꽤 어려 보였다. 지금까진 영 삭아 보였는데 말이다.

나는 늦은 밤, 왕왕 떠들어 대는 세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지선우가 중간에 껴 은발과 송여환의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나와 두 사람만 있을 때보다 훨씬.

확실히 송여환이 오고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무리에 어째서 분위기 메이커가 필요한가를 새삼 깨달았다. 무엇보다 지선우가 편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얼굴이 생겨서 그런지 내가 곁으로 다가가도 전보단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 형님은 신체 강화계 능력이구나?”

[회복 쪽으로 더 특화되어 있긴 하지. 으응- 강아지야, 네 힘은 뭐지?]

“여환이는 번개를 다뤄. 긴장해야 할걸? 엄청 강하다고.”

지선우가 진지하게 말하자 은발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른함은 여전했지만, 에스퍼 특유의 투쟁심이 들끓어 오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내는 송여환 역시 비슷해 보였다. 배시시 웃곤 형님, 하며 스스로를 낮출 줄은 알았으나 그렇다고 은발의 기세에 눌리진 않았다.

나는 심드렁하게 하품을 하며 두 에스퍼의 기 싸움을 지켜봤다. 꼴에 에스퍼라고 가이드인 지선우 앞에서 폼을 잡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특히 송여환. 지선우에게 하는 꼴을 봐 익히 알았지만, 저 새낀 유독 가이드한테 약했다. 에스퍼 체면은 저 새끼가 다 깎아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이드가 화를 내면 깨갱거리고, 때리면 맞아 줬다. 등신 아닌가 싶을 때도 많았다.

지선우를 제외하곤 누구도 봐주는 법이 없는 나로선 가이드들에게 가끔 뺨을 맞고도 되레 울려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헤픈 놈이니까 업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놈이 같은 에스퍼에게만큼은 달랐다. 기본적으로 호구 새끼처럼 굴긴 하되 에스퍼가 선을 넘는 것에는 꽤나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친하지 않아 정확히 어떻게 다르다는 말은 못 하지만, 송여환에게 힘으로 굴복당한 놈의 수가 협회의 반을 넘는다는 걸 얼핏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싸움 중 송여환이 먼저 나서서 시비를 건 적은 없는 걸로 안다. 이 바닥의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도니까 정확하리라.

‘……씹, 그럼 왜 나한텐 매일 시비를 걸고 다닌 거지?’

[한번 붙어 보고 싶은데?]

“나랑 같은 생각하는 거 맞죠? 우리 형님.”

“뭐야. 분위기가 왜 갑자기 그쪽으로 흘러가? 진짜 싸우기만 해!”

멍하니 생각하며 세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걸 흘려듣고 있는데 지선우가 갑작스럽게 나를 보더니 머뭇머뭇 말을 걸어왔다.

“유성이 네가 좀 말려 봐. 진짜 싸우면 어떡해.”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는데. 내가 눈만 껌뻑이고 있자 은발과 송여환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내버려 둬. 하나 뒈지게.”

나는 명쾌한 해답을 돌려줬다.

“…….”

[…….]

두 놈이 나를 보며 삐딱한 표정을 짓는다.

“뭘 꼴아.”

서열 정리라도 원하는 건가?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짜증 나게 구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격이네.”

[신하끼리 칼부림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노릴 거면 왕의 자리를 노려야지?]

두 놈 다 흥이 식었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소란이 적당히 마무리되자 다들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또 다가올 내일을 위해 일찍 잠들려는 거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특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송여환. 저 새끼의 일렁거리는 기운은 당장 가이딩을 받아야 할 정도로 불안했다. 같은 에스퍼니까 알 수 있었다. 놈이 얼마나 괴로운 상태인지.

그냥 이 악물고 참고 있는 거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선우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에 몸을 뉘었다. 그때, 몸 위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송여환의 체향이 짙게 나는 담요였다.

고개를 움직여 녀석을 올려다봤다. 시선을 피한 채 뺨을 긁적거리는 놈의 얼굴에는 모닥불 때문인지 은은한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뭐야.”

“담욘데.”

“…….”

“…….”

“치워.”

“아, 왜!”

“미쳤냐?”

“아니이, 뭐어.”

송여환이 손으로 턱 부근을 매만지며 말을 흐렸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리곤 징그러운 소리까지 해 댔다.

“밤에 추우니까…….”

이 새끼, 아까 라면이 아니라 뭐 다른 걸 주워 처먹은 건가? 약간 머리가 돈 거 같은데.

“뭐?”

“밤에 춥다고. 너 피부도 흰 게.”

까칠하게 되묻자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 댔다. 피부가 하얀 거랑 추운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런 논리라면 나보단 지선우가 더 추워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아, 실제로 형이 추워하긴 하지.

‘자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담요를 집어 들고 지선우에게 다가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어 있던 그에게 조심스레 담요를 덮어 줬다. 뒤에서 송여환이 ‘엇’, ‘얏’, ‘하아……’ 하며 괴상한 소리를 내는 게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목 아래까지 꼼꼼히 담요를 덮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슬며시 뜬 지선우의 두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멋대로 손을 댄 걸 알면 또 겁을 집어먹을까 봐 나는 재빠르게 일어나려 했다.

“미안. 자.”

그런데 지선우가 내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저기…….”

“어?”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조그만 입술을 우물우물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왜?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당장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웬 아동용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들려왔다.

“폭신폭신 몸을 가진 소파맨~ 우리의 친구우~ 소파맨~”

……저 X발.

“푸핫, 송여환 진짜…….”

지선우가 묘한 표정으로 송여환을 흘끔 보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분명 무슨 얘기를 하려던 것 같았는데.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송여환이 누워 있는 쪽으로 괜히 빙 둘러 갔다. 놈을 한 대 걷어차기 위해서.

뻐- 억!

“악!”

죽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라, 넌.

* * *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읏.”

아랫배에서 꽤나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엔 그저 오랜만에 매운 걸 먹어서 배탈이라도 난 건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닌 걸 알았다. 식은땀이 나고, 숨이 차올랐다. 아무리 봐도 잠자긴 글렀다.

계속 부스럭거리다 다른 사람들도 깨워 버릴까 봐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낼 곳을 찾아 다리를 움직였다. 자꾸만 단침이 꿀꺽 삼켜지며 속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훅훅 올라왔다.

“하아, 더워 죽겠네.”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배를 부여잡았다. 그대로 천천히 심호흡하고 있으려니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몬스터라도 있는 건가? 몸을 긴장한 채 감각을 집중시키는데, 정작 톡 튀어나온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지선우?”

“앗, 어! 저기…… 하하.”

산발한 채 막 잠에서 깬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는 지선우. 그는 멋쩍은 듯 뺨을 긁적거렸다.

“화장실 가려고 했는데, 움직이는 거 보고 따라왔어. 막 비틀거리길래 걱정돼서.”

지선우는 잠시 망설이듯 움찔움찔하더니 곧 내게로 다가왔다.

제정신인가 묻고 싶었다. 저번에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뻔히 알면서 이런 늦은 밤에, 그것도 단둘만 있는 공간에 아무렇지 않게 있으려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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