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잉태야말로 기적이라 불리는 힘.」
「이 몸의 이름은 오메가.」
「생명과 고독을 다루는 신.」
「이제는 마지막 권능을 넘겨주며 잠들도록 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인간은 배를 부여잡고 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없던 것이 생기는 과정이기에 고통스러운 게 당연했다. 생명을 창조할 수 없는 가엾은 몸이 축복받아 새롭게 태어나는 거다. 아마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아플 테다.
「이런…….」
힘이 완전히 흡수되자 인간이 축 늘어졌다. 그 찰나, 오메가는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짙은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인간 아이야.」
오메가는 인간을 향해 하나의 예언처럼 말했다.
「너는 많은 아이를 ‘만들고’…… 결국엔 잃을 거다.」
「이 또한 저 뱀이 죽지 않고, 네가 시련을 견딘 시점부터 생긴 새로운 운명.」
하필 힘을 넘겨준 인간의 운명이 이리도 잔혹하다니. 안타까움에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은 오메가가 막 뱀과 인간을 지상으로 던져 버리려던 순간이었다.
피잉! 대뜸, 포털이 열렸다.
「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권능을 넘기며 입구가 닫혔을 터인데 도대체 누가 허락도 없이 오메가의 ‘둥지’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걸까. 오메가가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붉은 포털이 열리고 나타난 건 또 다른 인간이었다. 하나, 그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오, 오, 오! 우와악-!”
넘어지지 않으려 오두방정을 떠는 인간은 고대의 신이 보기에 굉장히 이상스럽고 정신 사나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쌍팔년도에나 쓸 법한 똥파리 색 선글라스, 선명한 파란색 상의, 하얀 팔 토시와 발목을 감싼 두툼한 등산용 양말, 거기다 고작 뒷산 올라가면서도 꼭 챙기는 초경량 등산 스틱까지.
콩!
“악!”
결국 철퍼덕 넘어진 인간은 귀가 빨개진 채 큼큼 헛기침을 뱉어 냈다.
“아이 씨, 뭔 길이 이렇게 더러워…….”
* * *
‘다신 등산하나 봐라!’
엉덩이를 찡- 울리는 통증에 미간을 팍 찌푸린 송여환은 당장 누군가가 제 모습을 봤을까 걱정돼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나 사진이라도 찍힌 건 아닐까? 아오, 그럼 안 되는데. 최근 커피 CF랑 냉장고 CF까지 섭렵한 초절정 인기남이 이런 모양 빠지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으으,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게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데, 응? 뭔가 다르다?
‘산…… 이 아닌데?’
두리번거리던 송여환은 문득 느껴지는 기운에 현재의 상황을 깨달았다.
‘……던전?’
휴일에 등산 좀 했을 뿐인데 갑자기 분위기 던전? 어이씨, 던전 감지반은 일 안 하고 노나? 이런 것도 미리미리 대처 안 하고 뭐 해? 그러다 일반인들이 빨려 들어가면 또 누구를 쥐어 잡으려고!
‘뭐, 또 낙유성 가지고 들들 볶겠지. 하여튼 남 탓하기 좋아하는 놈들. 걔 좀 내버려 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송여환은 대충 던전이나 클리어하고 나가자 싶어 뻐근한 몸을 쭉쭉 풀었다. 하나 울적한 마음은 달랠 재간이 없었다.
‘여기 정상에서 돌탑을 높이 쌓으면 짝사랑이 이뤄진다고 해서 온 건데, 젠장…….’
어차피 이뤄질 수 없는 마음이라는 건 안다. 이미 짝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그래도! 데이트 한 번은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귀한 휴무일에 온 건데!
‘예에에-? 도준이 화들짝! 우리 팀장님 고딴 거나 믿는 사람이었어요?’
‘양심이 있음 짝 있는 사람은 건들지 맙시다.’
‘밀린 서류는 안 보고…….’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걸 믿음?’
웅성웅성. 와글와글. 이때다 싶어 놀려 먹는 팀원들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새삼 부끄러움에 꽉 쥔 주먹이 부들거렸다.
‘하지만 난 간절했단 말이야!’
차마 내지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소리를 꽥 질렀다. 기실 송여환은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아니, 만약 지금 큰누나가 있었더라면 손을 부여잡고 ‘누으나아’ 하며 꺼이꺼이 울었을 거다. 그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사실상 에스퍼에게 휴무일이란 유니콘 같은 존재다. 남들은 국가직이니 뭐니 떠들어 대지만 365일 중 366일을 일해야 하는 게 히어로란 직업이다.
특히나 송여환은 더했다. 잘생긴 얼굴, 밝고 쾌활한 성격, 보장된 능력, 거기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브릭트스컴트’의 차남이라는 타이틀까지!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엔 충분했다.
어디 그뿐인가? 협회의 인간 병기 낙유성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국가 레벨’에 들어가는 에스퍼는 송여환뿐이다. 만년 2위로 이미지가 굳어서 그렇지, S급을 달고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셈이다.
게다가 낙유성이 거절한 인터뷰, CF, 예능, 드라마 카메오, 각종 시사회와 사인회 등등을 전담하며 협회의 이미지까지 챙겨 주고 있다. 많은 시민이 에스퍼를 무서워하지 않고 편히, 혹은 더 나아가 동경의 대상으로까지 보는 덴 송여환의 힘이 컸다.
그야말로 몸이 두 개, 세 개라도 바쁜 스타 중의 스타. 하지만 그런 송여환이 유독 한 사람 앞에만 서면 버벅거리기 일쑤였으니.
‘또 너냐? 상대할 시간 없어. 꺼져.’
‘비켜.’
‘눈 깔아.’
까칠의 대명사로 불리는 협회의 ‘걔’. 협회, 아니, 송여환의 마음속 넘버 원 낙유성!
“하아아아, 보고 싶다.”
송여환은 빨개진 얼굴로 뺨을 긁적거렸다. 흔히 좋아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다지만, 그는 정도가 심했다. 대신 일을 해 주면서도 그 잘생긴 얼굴 한 번 보면 억울한 마음이 사르르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다 내 죄다, 죄.”
첫눈에 반한 죄다. 죄!
다른 에스퍼처럼 짝인 가이드나 짝이 아닌 가이드, 아무튼 가이드와 사랑에 빠졌다면 이런 맘고생과 몸 고생은 안 했을 거다. 백 퍼센트 장담컨대 그쪽이 인생 살기 편한 길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X된 지 오래였다.
송여환은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했다. 막 에스퍼로서 능력이 발현돼 협회에 이능력자 등록을 하던 그날. 로비에서 소문의 걔, 낙유성을 본 순간을.
‘야, 쟤가 걔야.’
몸의 체형을 그대로 드러내는 얇은 폴라티.
‘입사하자마자 본인 사수 에스퍼 때려눕혔다는 그 미친놈!’
윤곽이 뚜렷한 가슴과 복부.
‘쟤 한번 잡아 보겠다는 선배들 존나 많잖아. 괜히 얽히지 마.’
탄탄히 올라붙은 엉덩이.
‘우리랑은 뭐, 기수 차이가 나서 상관없긴 하겠다.’
일자로 곧게 뻗은 종아리.
‘가이딩도 거부한대. 자기 몸에 뭐 닿는 거 싫다고.’
살짝 찡그린, 예민해 보이는 얼굴.
‘집이 잘사나? 아, 뭐 그래 봤자 너한테 비하면 쓰레기지. 그치, 여환아!’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헉, 우리 본다! 빨리 가자. 괜히 눈 마주치지 마.’
자신만큼 커다란 손.
옆에서 속삭이는 동기를 무시하고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쟤, 애인 있나?
그때부터 시작된 이 지긋지긋하고 오래된 짝사랑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물론 그렇게 기다리다 ‘지선우’라는 복병을 만나 빼앗기긴 했는데…… 나 송여환,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낙유성 솔로 기원차 정권 지르기 nnnn일 차다.
‘치, 가이드로나 태어날 것이지.’
한숨을 내쉰 송여환은 어느 정도 풀린 몸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무언가가 턱- 시선에 걸렸다.
그건 사람이었다. 당장 긴급 이송을 해야 할 만큼 엉망진창의 모습을 한 사람. 간신히 하의만 가린 채 실신해 있는 사람. 남자. 그리고…… 방금까지 떠올리고 있던 첫사랑.
“왜, 어, 어? 아……?”
미소를 머금고 있던 송여환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린 그가 아주 느린 걸음으로 쓰러져 있는 낙유성에게 다가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떠오르는 건 ‘응?’과 ‘왜?’ 혹은 ‘설마’. 그게 전부였다.
한참을 머뭇거린 손이 낙유성에게 닿았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그는 낙유성의 코 밑에 검지를 갖다 댔다. 당황한 모습과 달리 숨을 쉬는지 확인하는 모습은 꽤나 침착해 보였다.
호흡은 조금 느리지만 정상, 그다음은 몸의 상처, 체온, ……벗겨진 아래를 들추어 혹시 모를 의외의 폭력을 받았는지도 확인.
“…….”
느릿느릿 움직이는 송여환은 말이 없었다. 그저 메고 있던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고, 그 안에서 두툼한 담요를 꺼내 낙유성의 몸을 가렸다. 토닥이는 손길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늦게 와서, 미안해.”
새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로 목이 졸린 것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송여환은 낙유성을 담요로 돌돌 말아 놓은 후 몸을 일으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단단해 보이는 가슴근육이 크게 팽창했고, 목덜미에는 굵은 핏줄이 툭 솟아올랐다.
「인간.」
그가 하던 모양새를 지켜보던 오메가가 말을 건 순간.
“너 그거 아냐.”
콰앙-! 벼락이 떨어졌다. 사방에서, 쉬지 않고.
번쩍이는 벼락은 끊임없이 내리쳐 오메가의 둥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오메가의 황금보다 더 화려하고 강하게 번쩍이는 벼락이 마치 울부짖는 것 같았다.
사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송여환도 이미 눈치챘다. 그저 사랑에 눈이 돌아 존재를 인식하는 게 늦었을 뿐. 권능을 주느라 힘의 90%를 잃은 오메가이나, 신은 신. 겨우 10%로도 한낱 인간쯤이야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남의 첫사랑은 함부로 건드는 게 아닌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