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앳된 사람이 서 있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가슴과 중요 부위를 덮고 있어 성별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두운 피부,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 발목에 감긴 붉은 족쇄, 그리고 영롱한 황금빛의 눈동자. 아, 아까 그 눈의 주인이 이놈이구나.
“……넌 누구야.”
내 질문에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불쑥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감을 잴 타이밍조차 잡지 못했다. 생명체가 낼 수 있는 속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빨랐다.
킁킁, 바짝 붙어 냄새를 맡은 놈이 시선을 들어 올려 나를 쳐다봤다. 나보다 작은 몸, 가는 뼈, 힘이라곤 쥐뿔도 없어 보이는 생김새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두려웠다.
「뱀을 찾으러 왔으니 그놈인 줄 알았어.」
「하긴 그놈이 바라는 일은 아닐 테지.」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족쇄가 부딪쳐 까랑까랑한 소리를 냈다. 척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족쇄를 달고 녀석은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마치 춤을 추듯.
「이 몸의 이름은 오메가.」
……오메가? 가짜 녀석이 말한 고대 힘 중 하나의 이름이다. 그럼 역시 이곳은 던전이란 말인가?
고민하고 있자니 오메가 녀석이 괘종시계로 다가갔다. 그러곤 소중하다는 얼굴로 시계 벽면에 이마를 대고 부드럽게 웃는다. 휘어지는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생명과 고독을 다루는 신.」
태양이 부서져 내린다. 마치 비처럼.
황홀하다 할 수 있는 광경에 넋을 놓았다. 오메가를 제압하거나 지선우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은 채 멍하니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다.
바로 그때.
“윽!”
타들어 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퍼뜩 놀라 내려다본 팔뚝엔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후드득, 후드득!
범인은 하늘에서 내리는 황금빛 빗물. 피부가 처참하게 녹아 사라진다. 땅 아래로 떨어지는 건 내 살 조각들이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파, 아파, 아파!
“크윽, 아악!”
제발 그만해 줘, 그만! 그만, 그만!
비명도 내지를 수가 없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쓰러져 끝없는 고통을 따라 몸부림치고 있자니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네게는 악신이겠구나.」
아름답게 웃는 놈은, 신이 분명했다. 말 그대로 악신.
“-헉!”
숨이 한가득 들이켜진 순간, 고통이 사라졌다. 몸의 상처 역시 씻은 듯 깨끗해져 있었다.
“허억…… 헉, 하아, 으……!”
믿을 수 없다. 분명 죽음이 뚜렷하게 느껴졌는데.
「괴로워?」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거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네 힘을 그대로 재현했을 뿐인데.」
가까이 다가온 녀석이 천천히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난 지금 굉장히 화가 났어.」
딱!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구체 하나가 떠올랐다.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그 안에는 그토록 찾아 헤맨 지선우가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아니, 정말 죽은 걸지도 모른다. 이런 괴물을 만났으니까.
‘가짜 녀석, 이런 놈을 우리보고 해치우란 거였어?’
나는 강한 두려움 속에서 또 다른 분노를 느꼈다. 고대의 힘 중 하나인 오메가. 그게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라니.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나와 알파를 자유롭게 내버려 둘 건지.」
「나는 우리의 힘을 나누고 싶지 않아. 마음대로 다뤄서도 안 돼. 너희는 너희만의 흐름, 규칙이 존재해. 우리와 섞여서는 안 된단 말이야.」
「……함부로 문을 열어선 안 됐어.」
「알파가 찾아오기 전까진 잠들어 있어야 했는데.」
「영원이 되긴 글렀군. 결국 끝까지 인간에게 이용당하다니…… 최악이야.」
녀석은 한숨처럼 말했다.
「그냥 끝내도 좋지만.」
「마지막이니까.」
「기회를 줄게.」
놈이 구체를 향해 검지를 세웠다. 그러더니 다른 손으로 내 턱을 강하게 쥐어 들었다.
「저것에게선 너와 교접을 한 냄새가 짙게 나. 네 소중한 것이 분명할 테지.」
「하지만 속엔 교묘한 뱀 새끼 하나가 똬리를 틀고 있어.」
「배짱도 대단하지. 감히 나와 알파를 써먹을 생각을 하다니.」
「내가 끝낼 수도 있지만 그건 벌이 되지 않아.」
「네가 직접 해. 무례를 범한 대가는 그걸로 끝.」
「죽여.」
소중한 걸 네 손으로 죽여. 뱀과 함께 태워 버려.
신이라 불리는 녀석이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밝고 강한 태양, 역광으로 인해 놈의 악귀 같은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어둠 속 흉흉히 빛나는 건 황금의 눈동자뿐.
‘내 손으로…… 형을?’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내가 땀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젓자 녀석이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놓는다.
「네게 선택지는 두 가지뿐.」
「둘 다 죽든, 혼자 살든. 더 큰 자비를 내릴 생각은 없어.」
「결정을 내리는 게 어렵다면 이 몸이 직접 도와주마. 악신도 신이니까.」
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라지.」
놈이 히죽 눈을 접어 웃었다.
「부디 그 축복이 내 저주보다 강하길 빌지.」
겨우 숨을 몰아쉬던 나는 갑작스럽게 들리는 커다란 이명에 귀를 막았다. 웅웅웅! 점차 커지는 소음이 뇌까지 잡아 흔든다. 멀미가 일며 결국 나는 우웩- 속을 게워 내고 말았다.
하지만 나오는 건 위액이나 타액 따위가 아니었다. 내 몸 안에 자리할 장기들이 꾸물거리며 입을 타고 계속해 쏟아져 나왔다. 멈추고 싶어도 입을 닫으면 내장을 끊어 버릴 것 같아 어찌할 수도 없었다. 철퍽거리는 끔찍한 소리에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이게 처음.」
다시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고통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허억, 힉, 헉!”
죽을 것 같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바들거리며 바닥에 엎드려 컥컥 마른기침을 뱉었다. 환각. 녀석의 힘은 환각인가.
「아니. 내 힘에 거짓은 없어. 너는 이걸로 두 번 죽었다.」
“……!”
「인간.」
「몇 번 죽어야 네가 저 뱀 새끼를 태워 죽일까.」
「이 몸은 궁금해졌어. 그러니 내기를 하자.」
녀석은 재밌어 보였다. 번들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으며 또 한가득 차 보였다. 작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중얼거리던 녀석이 나를 보고 나른히 말했다.
「스물셋. 나의 알파가 나를 위해 견딘 고문의 횟수지.」
「하나하나가 끔찍해서 과거에도 이 시련을 견딘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어.」
「같은 방식으로 끝까지 버틴다면 너 대신 뱀은 살려 주마.」
「물론 실패해도 좋아. 자진해 그만두겠다 하면 너는 살려 주도록 하지.」
멈추는 방법은 뱀을 태워 죽이는 것.
「시작할까.」
싸워 이길 자신도, 생각도, 각오도 들지 않는 상대에게 철저히 유린당해 얻어 낸 승리라도 형은 내게 잘했다고 해 줄까. 아니면 바보 같다고 화를 낼까. 나는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스물세 번, 내가 죽는 것만이 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그래, 잊고 있었어.」
오메가는 제 아래에 쓰러져 있는 인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혀와 눈을 뽑고, 산 채로 불에 태우고, 사지를 찢어 내도 이 하찮은 것은 뱀을 공격하지 않았다.
물론 스물세 번의 죽음 속 몇 번은 손을 뻗어 조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한참을 머뭇거리다 포기했다. 그 후 깍지를 낀 채 고통을 참다, 풀리려 하면 팔뚝을 물어뜯었다. 악을 쓰다, 빌어 보다, 실금을 하다, 기어코 눈을 뒤집고 기절했다.
스물세 번의 시련. 알파가 오메가를 되찾기 위해 견뎠던 스물세 가지의 고문. 그건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당연하다. 인간이 본질을 벗고 감히 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니까.
「꽤 괴로울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공격하지 않는군.」
「제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걸까.」
오메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인간이란 아주 믿을 수 없는 종족으로, 이기적이다. 나약하고 비겁해서 온전한 사랑 따윈 만들 수 없는 하등 존재. 어떻게든 본인 살 궁리만 하는 쓰레기들. 기적을 품어 내는 신과는 다르다.
「흐음…….」
하지만, 그렇다. 오메가는 잊고 있었다. 인간은 언제나 신과 가장 닮은 존재라는 것을. 자신을 위해 신이 된 알파처럼.
특히나 눈앞의 인간은 자신의 알파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심지가 굳었다.
「이로써 스물셋.」
마지막으로 꼭 보고 싶었던 알파를 본 것만 같았다.
「이 몸, 약속은 지킨다.」
오메가는 사뿐한 걸음으로 쓰러진 인간에게 다가갔다. 흐트러진 새까만 머리카락에 가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벌려진 입가로 침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는 걸 미루어 정신을 놓은 듯했다.
「이런 놈을 보고 순간 알파를 떠올리다니. 나의 알파는 더욱 아름답고 강한데 말이지.」
오메가가 혀를 차자 구체에서 뱀을 품은 인간이 뚝 떨어졌다.
「그렇지만…….」
두 명의 인간을 번갈아 본 오메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놈을 죽이는 건 퍽 끌리지 않아. 어차피 이 몸은 오늘이 끝이다. 다시 잠들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거든.」
「너는 특별히 마음에 드니 내 가장 큰 ‘권능’을 내려 주도록 하마. 모든 인간이 내려 달라 간청하던 힘이지.」
「네게는…… 축복보단 저주가 될 것 같지만.」
오메가의 양쪽 눈동자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힘의 압축체가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만약 알파를 찾게 된다면 분명 이 힘을 느낄 터. 그가 분노할지 애달파할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그에게 닿을 마지막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