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몸매라도 신경 써? 걱정 마. 뱃살은 없었으니까.]
“닥쳐.”
[어떻게 닥쳐? 입을 벌려야 먹지. 네 꿀도 내가 입 벌려서 맛있게 쪽쪽 빨-]
“아가리 여물라고!”
저 새끼가 진짜. 자꾸만 놀리는 녀석을 한 대 쳐 버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지선우가 내게로 다가왔다.
“근데, 너.”
“…….”
“몇 살이야?”
“뭐?”
턱을 괴고 심드렁히 있는데 지선우가 입꼬리를 씩 올린다.
“아니이, 생각해 보니까 맨 처음에 나보고 형이랬잖아. 내가 너 아는 사람이랑 닮은 거야?”
“하…… 몰라.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
“너 나보다 어리지.”
기억 잃은 거 맞아? 기가 막히게 자기 유리한 쪽은 잘 떠올리네.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게 아니고! 음, 이름이 뭐야?”
“하, 저 새끼가 말 안 했어?”
나는 은발을 턱짓하며 대꾸했다.
“응. 너 이름 물어보니까 직접 가서 물어보래.”
나는 은발을 쳐다봤다. 놈은 괴물 고기를 잘만 처먹다 눈이 마주치니 능글맞게 웃었다. 하긴 저 새끼가 내 이름을 알 리가 없나? 형이 내 이름을 매번 부르긴 했지만, 관심이 없다면 당연히 기억 못 할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놈은 나를 이름으로 부른 적도 없었다.
“……낙유성.”
“낙유성, 낙유성……. 좋은 이름이네.”
한숨처럼 답하자 지선우가 내 이름을 입안에서 몇 번 굴리더니 칭찬했다. 좋긴 개뿔,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울컥해서 따지려다 말았다. 어차피 현대 세계로 돌아가면 그때부터 천천히 형이랑 다시-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서. 어디서부터, 또……?’
“윽.”
“어어, 왜 그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머리 아픈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위가 쿡쿡 쑤셔 왔다. 용암 덩어리라도 삼킨 것처럼 뜨거운 통증이 일어 나는 주르륵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곤 그늘로 걸어갔다. 따라오려는 지선우에게 오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가 소중한 건 여전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하아, 그래. 인정하자. 나는 한계에 도달해 가고 있었다.
‘피곤해.’
어차피 현대 시대로 돌아가서 지선우랑 지지고 볶아야 할 거,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화롭게 보내고 싶었다. 현실 도피라 해도 할 말은 없다. 설핏,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현대에 있을 때 느껴 보지 못한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온 탓이다. 내가 이토록 나약한 인간이었다니.
* * *
그 이후, 우리는 빌어먹을 알파와 오메가를 찾기 위해 나타나는 모든 던전을 끊임없이 클리어해야 했다. 정확하게 알파와 오메가가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하나하나 닥치는 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젠장. 가짜 녀석, 뭘 설명 해 줄 거면 제대로 하고 사라지든가.
악조건 속에서 능력을 써야 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예민해지는 건 당연지사. 그건 은발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놈은 가이딩을 받지 않는 것에 이미 꽤 익숙한지 나만큼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지.]
내 컨디션이 막 내려가기 직전, 은발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은발은 근처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 물이라곤 한 방울도 없을 것 같은 사막 같은 광경 뒤로 조금 커다란 강이 보였다. 퍽 깨끗한 물은 아니었지만, 몸을 씻기엔 충분해 보였다.
[운이 좋군.]
나른한 짐승처럼 은발이 몸을 쭉 펴며 웃었다.
[으응, 아가. 아까 씻고 싶다고 했지? 마침 잘됐군. 괴물이 나올 수도 있으니 같이 갈까?]
“아, 아가……?”
지선우는 은발의 호칭이 적응되지 않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인지 ‘아무리 봐도 내가 아가로 보일 나이는 아니지 않아?’ 하고 되묻는데, 삑사리까지 났다.
“음, 그래도 땀을 너무 흘려서 몸을 씻고 싶긴 해.”
잠시 고민하던 지선우는 곧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걸로 결정을 끝냈다. 역시 쾌남. 기억을 잃었어도 여전하다. 그는 몸을 가리고 있던 천을 훌렁 벗어 던지고 은발을 따라 강으로 척척 걸어갔다. 꼼실거리는 엉덩이가 굉장히 신나 보였다.
나는 지선우의 알몸을 단속하기보단 시선을 돌리는 쪽을 선택했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그늘에 자리를 잡으니 저 멀리서 지선우가 의아해하며 소리쳐 왔다.
“어! 너는 안 씻을 거야?”
몸이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저 정신없는 사이에 껴서 씻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작은 소망을 무시하듯 지선우가 방향을 틀어 내 쪽으로 다시금 척척 다가왔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네 볼일이나 보라며 까칠하게 대응하고 싶었으나 오로지 나만을 담고 있는 까만 눈동자를 보니 차마 모진 말이 나오지 못했다.
“나중에.”
“에이! 뭔 나중이야! 다 같이 씻자. 더 친해질 겸! 음, 친목 도모?”
형의 오지랖이 이럴 땐 참 밉다. 나는 샐쭉한 눈으로 지선우를 흘겨봤다.
아무리 내가 무신경을 타고났다 한들 말이야. 기억 잃은 애인과 내 애인에게 집적거리는 양아치 새끼랑 친목 도모를 하기엔…… 개같이 파국적인 조합 아닌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있자 지선우가 맹하게 눈만 껌뻑거린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한 번 더 ‘신경 쓰지 말고 너 먼저 씻어’라고 거절을 하려 했다. 그래, 분명 거절하려 했는데…….
[내버려 둬. 남자란 무릇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이지. 영…… 시원찮다던가? 으응, 선우는 나랑 오붓하게 목욕이나 즐기자고.]
저 새끼가 뒈지려고 용을 쓰나.
“응? 앗.”
지선우가 내 아랫도리 쪽으로 눈을 굴리더니 황급히 시선을 튼다. 뭐가 ‘응? 앗’이냐? 내 걸 제일 잘 아는 게 넌데. 목구멍 끝까지 항변의 말이 차올랐다. 진짜 미치겠네. 한사코 거절해도 둘은 절대 조용히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곤 허리에 두르고 있던 천을 풀어냈다.
“……오오.”
감탄사를 내뱉는 지선우를 뒤로하고 강으로 입수했다. 좋게 봐 줘도 깨끗하다 할 수 없는 강이었지만 안 씻는 것보다는 나을 터. 실제로 막상 몸을 씻어 내니 언짢았던 기분도 한결 상쾌해졌다.
[좋지?]
은발이 능글거렸지만 무시했다. 지선우는 나와 은발이 몸을 삭삭 씻어 내는 걸 보곤 쪼르르 따라 들어왔다.
“으아! 으차차, 완전 차갑네. 너희는…… 응, 근육이 그 정도로 있으면 안 춥겠다.”
미간을 좁히고 꿍얼대던 지선우가 나와 은발의 나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용히 내 팔뚝을 만져 보다 슬쩍 은발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저 새낀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나 살던 주제에 어떻게 저런 몸을 가지고 있는 거지?
물을 퍼 쇄골과 목덜미를 닦아 내는 놈의 팔뚝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딴딴하고 듬직해 보였다. 유독 하얀 피부 위, 바짝 선 핏줄은 마치 지렁이처럼 구불구불 튀어나와 있었고, 옆통은 두툼했다. 아마 뼈대를 굵게 타고난 것 같다. 노력으로는 가질 수 없는 축복받은 체형이었다.
정성을 들여야만 유지되는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괜한 열등감이 느껴졌다. 저 새낀 닭가슴살을 믹서기에 갈아 먹은 적도 없겠지. 아, 여긴 믹서기가 없구나. 아…… 그전에 X발 닭이 없네.
나는 심드렁히 생각하다 픽,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질리던 닭가슴살이 그립다니.
[나 예뻐?]
그 순간, 놈이 툭 말을 던져 왔다. 빤히 살펴보던 내 시선이 거슬렸나 보다. 나는 좀 쳐다봤다고 심한 망언을 해 오는 놈을 향해 한국인의 따스한 정을 떠올리며 대꾸해 줬다.
“X발, 뭐?”
[네가 너무 끈적하게 쳐다보길래, 내가 꼴리게 한 건가 했지.]
역시 외국인. 은발이 개의치 않고 유쾌하게 받아쳤다.
[도련님은 근육이 좀 빠진 것 같아. 으응, 밥을 안 먹으니 그렇지?]
“네가 뭘 안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놈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놈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내게 또 다른 개소리를 지껄여 왔다.
[알지? 네 몸 구석구석을 빨아 먹은 게 난데. 아하…… 저번에는 가슴 크기도 재 줬지 아마.]
삐끗! 순간 미끄러질 뻔했다. 저, 씹, 저 개자식이 도대체 뭐라는 거야.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도 안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다. 황당해하며 쳐다봤으나 놈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 크기가 줄었어. 원한다면 키워 주고.]
갈아 버리고 싶은 고운 얼굴로 히죽이며 웃는데, 진심으로 살인 충동을 느끼고 말았다.
주먹을 꽉 쥐며 놈에게 물살을 헤치고 다가가자 우리 사이에서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얼굴로 조용히 있던 지선우가 황급히 끼어들어 나를 말렸다.
“으아아, 왜 또 싸워!”
“놔! X발!”
[빈유.]
“치, 침착해, 그…… 애, 애애애, 애인끼리 싸우지 마!”
“뭐……?”
애인…… 이라고……?
[침묵이 너무 긴 거 아냐?]
“엇, 유성이 고장 났다.”
……핫! 은발인지 지선운지 모를 이의 웃음을 끝으로 나는 활화산 같은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리 와! 이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으응? 나 잡아 봐라, 하게?]
“으아아아아, 제발, 그만해! 무, 물이 뜨거워진다! 악!”
조용했던 목욕 시간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 * *
“흐어어, 몸이 땀으로 다시 젖었어!”
“…….”
“도대체 헉, 산책을, 어디까지…… 헉, 가는 거냐고!”
꿍얼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쉬지 않고 들려왔지만 나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홀로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낮에 씻었던 강으로 향하는 중인데 어느샌가 지선우가 따라붙어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